청군은 강소성을 함락시킨 것 외에도 강서성(江西)도 제압하고 복건, 절강성으로 전진했다. 북부에서 어떻게든 저지해보려던 시도는 완전히 실패하고 이제 그 청군이 코 앞까지 다가온 것이었다(강서성이니 복건성이니, 지도로 현재 중국의 성(省)들을 보시면 이해가 더 잘되실 것이다).
바로 윗 성들이 함락되고 이제 복건이 지척에 놓이자 남명의 조정대신들은 융무제 주율건에게 천도를 권했다.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든지, 서쪽으로 도망가던지간에 우선은 당장의 불길을 피하고 보자는 얘기였다. 여기서 영토도 화남에 국한되었던 남명정권이 어떻게 다른 지방으로 도망갈 수 있겠냐고 물으실 분이 있을런지 모르겠다. 허나 앞선 홍광제 주유숭의 때와는 달리, 이 융무제의 치세 때는 광동, 귀주, 운남성에까지 그 세력을 키웠으며 그때까지만 해도 그 일대엔 청의 영향이 아예 없던 때다. 여기서 잠깐 이것에 관해 얘기를 하자면, 지금껏 나는 청이 명의 수도 북경을 함락한 이래로 마치 청이 중국 전 대륙을 얻고 이제 마무리로 화남의 남명을 토벌하는 듯한 형식으로 써왔지만, 사실 당시 청이 점령하고 있던 영토는 양자강 이북에서 서쪽으로는 서안(西安 : 장안), 감숙, 섬서성을 제외한 일대로 지도 상으로 보면 그다지 넓은 땅이 아니었다. 양자강 이남의 성들, 즉 그동안 많이도 나온 절강, 광동, 복건 등의 해안가 성들을 시작으로 서쪽으로 호남, 귀주, 운남에 이르기까지의 영토는 아직까진 남명의 세력하에 있었던 것이 당시 실태였다. 그랬기에 그 넓은 땅을 기반으로 하는 남명정권이 힘을 키워 언제든지 다시 그들을 위협할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청은 얼른 일을 끝내고자 했던 것이다.
여튼, 융무정권이 망명하려 했던 그 밖의 이유로는 귀주, 운남과 가까운 사천성 일대에는 이건 나중에 간략하게 설명하겠지만, 장헌충이란 사람의 대서(大西)정권이 들어서 있었고 당시 이 장헌충과 남명은 연합을 도모하려 했었다. 거리가 가까운 만큼 싸움도 용이할 터였다. 앞서 언급한 이자성과의 결탁과 같은 맥락이라 보면 되겠다.
물론 주율건 역시 여차하면 다시 망명하고 싶었지만 아직 노왕 주이해의 방어선이 유효했으며, 근거지인 복건에도 수천의 병력이 건재해있었기에 망설였다. 허나 앞글에서도 말했지만 청군은 수십만 대병이라 했다. 이건 뭐 상대가 될래야 쨉도 않되는 게임이었으니 엄청난 무리수를 두고 있던 셈이다. 결국 1646년 6월, 선방해오던 노왕 주이해의 병력은 청군의 맹공에 격파당하고 패주한다. 이 말은 곧 최후의 마지노선이 뚫려 복건으로 곧장 향하는 길이 마련되었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절강성까지 떨어졌다는 급보도 전해진다. 아닌게 아니라 청군은 곧장 복건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일이 급해지자 융무제와 문무관료들은 정주(汀州)로 도망갔고 채 피하지 못했던 뭇 관료들은 청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이때 정성공의 아버지이자 당시 군권을 쥐고 있던 정지룡도 투항했다고 한다.
하지만 제 아무리 도망간다 한들 문무관료들은 물론, 융무제의 황후와 후궁들, 기타 시종, 하인들을 모두 거느리고 도주하는 입장이니만큼 그 속도가 빠를 수는 없는 법이다. 반면 청군은 주력이 기병으로, 흔히 말하는 팔기군이다. 따라잡히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결국 얼마 채 가지도 못하고 복주에서 사로잡히는 꼴이 되고 만다.
그리고 얼마 후, 융무제 주율건은 처형당하니 그때가 1646년 7월이라 했다. 그리고 이건 또 번외 이야기지만 이듬해 겨울, 즉 1647년에 융무제의 동생 소무제(紹武帝) 주율오(朱聿鐭)도 광주에서 잡혀 살해당한다. 이 소무제는 남명의 제 3대 황제로, 주율건이 앞서 1646년에 살해당하자 또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황제다. 허나 이렇다할 일 없이 곧바로 광주에 들이닥친 청군에 의해 똑같이 죽은 것이다. 허무하지만 그냥 그 동생도 죽었구나 하고 생각하시면 되겠다.
정권 수립 불과 2년 만에 황제 3명이 죽은 셈이다. 그만큼 청군의 토벌속도가 빨랐다는 말이다. 여튼, 이 소무제 주율오의 죽음으로 남명은 역시나 아직 끝난게 아니었다. 참으로 끈질긴 생존력이 아닐 수 없다. 또 이 소무제의 뒤를 이어 즉위하는 황제가 있었으니 남명의 제 4대 황제, 영력제(永曆帝) 주유랑(朱由榔)이란 사람이다. 근데 여기서 이 남명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아시는 분들이라면 내가 왜 남명의 네번째 황제를 이 영력제라 했는지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동무제(東武帝) 주상청이란 사람이 아니냐고 물으실 것 같아 분명히 해두는 것이지만 나는 여기서 남명의 비정통 황제들은 취급하지 않을 생각이다. 당시 남명에서는 황제들이 연달아 살해되었던 만큼, 그를 대비하여 임시로 각지의 황족들에게 국정을 맡기는 형식을 취했다. 그리고 그 국정을 맡은 이들을 실제로 황제에 버금갔다 하여 황제로 추존했던 것인데 이것은 그냥 무시하겠다. 아니 뭐 다루어 볼만한 건덕지도 없거니와 그들도 정통 황제들마냥 청군의 의해 죽거나 요절한 경우다. 고로 아니 다룰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