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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신백일장] 관계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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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프란츠
추천 : 1
조회수 : 31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8/10 00: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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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자리가 한 번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필히 밟아야 할 절차가 있거든요. 솔직히 저는 당신이 먼저 저라는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갖고 다가와주길 바랐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요. 이유라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죠. 제가 당신의 주목을 끌 만한 존재가 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관계에 적극적이지 않은 당신의 태도 자체가 문제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외의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변수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순조롭게 흘러가던 우리 사이를 어지럽힌 것일 수도 있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제가 스스로를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게 가장 근본적인 이유 같았어요. 그래서 언제라도 한 번은 당신한테 제 사정을 진지하게 털어놓을 기회가 필요하다고 느꼈죠. 그 기회가 지금 이렇게 찾아올 줄은 예상치 못했지만요. 여하튼 전 이 자리를 빌어 당신한테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것도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라 특별히 납득시켜야 할 이야기요. 비단 당신만이 아니라도 대충 설명해서는 아무도 믿지 않는 이야기거든요. 정말 지금까지 그래왔어요. 모두들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의심의 여지도 없는 개소리로 치부했어요. 속이 많이 상했죠. 하지만 당신만큼은 절 이해해줄 거라고 믿어요. 왜냐고요? 그건 들어보면 알게 될 거예요. 당신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도 듣다 보면 알게 될 테고요.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설명할 테니 일단은 들어보세요.
 
  전 인간관계의 모든 양상을 파악하고 있어요. 철저하게 이성적인 판단 하에 관계를 구축할 수 있죠. 쉽게 말하면 어떠한 관계에 대해서도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행착오도 많았어요. 이제 갓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나이 치고는 제법 많은 사람들을 겪어봤고 그만큼 실패도 많이 맛봤어요. 얼마나 울고 아파했는지 다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예요. 하지만 덕분에 저는 어느 누구한테서도 상처받지 않는 법을 알게 됐어요. 멋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상처받은 이력의 포장 내지는 처절한 자기합리화쯤으로 여길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들이 뭐라 생각하건 이제 저는 누구보다 철두철미하게 관계의 탄력성을 유지할 수 있어요. 남들처럼 애태워가며 상대한테 매달리는 바보짓은 하지 않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아요. 각각의 사람들의 성향을 대강 파악해서 그에 맞는 역할을 부여하는 거예요. 필요 이상으로 친밀감이 생기려 하면 그들의 결함을 부각시켜 거리를 만들고요. 예를 들어 설명해보죠. 이를 테면 희중과 창민에게는 술친구 역할을 시켜요. 술이 고픈데 혼자 마시는 술은 싫다? 또는 공짜 술이 당긴다? 그럴 때면 희중과 창민한테 연락하죠. 주변에서 그 둘만큼 술을 좋아하는 녀석들을 본 적이 없어요. 특히 희중은 간이 영 안 좋아졌다느니 쓸개즙이 올라온다느니 하고 건강 좀 챙겨야겠다면서 금주 선언까지 해놓고는 얼마 전에 음주운전으로 한 건 제대로 했죠. 녀석, 아버지의 아우디를, 그것도 할부 끊은 지 몇 달 안 된 새 차를 가드레일에 꼬라박았으니 난리도 보통 난리가 난 게 아니었죠. 사람이야 크게 안 다쳤으니 다행이라곤 하지만 당시엔 여러모로 정신없었어요. 그런데도 그때 그 녀석이 한 말이 뭔지 아세요? “난 금주는 못할 것 같다.” 정말 그 녀석은 골백번은 죽어보지 않고는 절대 정신 못 차릴 것 같아요. 창민도 희중 못지않게 애주가예요. 말이 좋아 애주가지 하는 짓 보면 병신도 그런 병신이 없죠. 돈이 없으면 빚을 져가면서까지 술을 부어대는데 학자금 대출도 못 갚을 처지에 친구들한테 끌어다 쓴 돈 하며 외상 술값까지 도합 삼백 정도 된다더군요. 더 웃긴 건 그 녀석은 친구들 술값까지 자기가 다 낸다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한테 돈을 빌려다 그 친구 술값을 내주는 장면도 심심찮게 연출되죠. 돈도 없는 녀석이 자기 앞가림이나 잘 할 일이지 오지랖은. 그래도 형편이 어렵다면 그건 그 녀석 사정이지 제 사정은 아니거든요. 얻어먹는 입장에선 그저, ‘이러다 녀석이 더 이상 돈을 끌어오지 못해서 공짜 술을 얻어먹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따위의 걱정만 하면 되는 거죠. 여하튼 그 녀석들만큼 좋은 술친구는 없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술친구라는 역할에 대해서만이죠. 매일같이 술을 달고 사는 녀석들 치고 제대로 된 놈들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것들 꼬락서니가 그래요. 제정신일 때보다 취해 있을 때가 더 많고 욱하는 성질머리로 걸핏하면 사고나 치고 다니는 녀석들이에요. 기대할 수 있는 게 고작 술친구 역할밖에 없는 머저리들한테 제가 인간적으로 기댈 이유는 없죠.
 
  역할놀이의 배역은 술친구만 있는 게 아니에요. 성규 같은 경우는 과제 도우미로 적당해요. 어느 대라고 했더라. 이름 들으면 알 만한 명문대에 붙었는데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학비가 싼 우리 학교에 들어왔다고 해요. 여기야 공부건 뭐건 다 어중간한 애들이 들어오는 학교니까 성규의 수준이 돋보이는 건 당연하죠. 그러다 보니 과제도 눈에 띄게 잘하는데, 도움을 받으려면 그런 친구한테 받는 게 맞는 일 아니겠어요? 어떤 어려운 과제가 떨어진대도 전 걱정하지 않아요. 과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성규한테 비벼대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기 과제물을 이메일로 보내주는데, 그것의 어조나 구성을 적당히 바꾼 다음 제 이름을 써서 내면 되니까요. 교수가 알아채지 않겠냐고요? 제가 과제를 어떻게 했는지 알아챈 교수는 지금껏 한 명도 없었어요. 점수가 어떻게 나왔는지를 보면 알 수 있죠. 물론 성규도 제가 자기 과제물을 통째로 옮겨 쓴다는 걸 몰라요. 그걸 알면 당연히 저한테 지랄을 해대겠죠. 가끔 미심쩍다는 눈치를 보내기는 해요. “넌 나 없으면 과제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너, 설마 내 꺼 그대로 베껴서 내는 건 아니지?” 하면서 틈틈이 떠보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대충 둘러대고 밥 한 번 사주면 다 풀려요. 제 학점에 기여한 바를 생각하면 학교 식당 돈가스나 냉면 따위 몇 번 대주는 건 싸게 먹히는 거죠. 어울려 다닐 때가 많으니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가까운 사이로 비쳐질 수도 있는데 이런 성규도 제가 정을 주는 상대는 아니에요. 공부 좀 한다고 으스대는 꼴도 건방지고 또 요즘 들어선 아예 대놓고 밥값을 벗겨 먹으려고 드는데 없던 정도 떨어질 판이에요. 얼마 전엔 심지어 “그간 받아먹은 게 있으면 토하는 것도 있어야 되지 않냐?”라고 한 적도 있다니까요. 총 맞아 죽을 녀석. 그 녀석은 절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 녀석을 단순한 거래 상대 정도로만 여기고 있어요. 졸업하고 나면 안면몰수하고 연락도 안 할 사이예요.
 
  그 자식들이야 동성 친구니까 벽을 두자면 왜 못 두겠냐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동성 친구니까 그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제 원칙은 이성 친구들한테도 적용되고 있어요. 어쩌면 더 효과적으로 말이죠. 정연을 예로 들어볼까요? 정연은 사려심이 깊어요. 누구한테나 상냥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이죠. 그래서 얼굴은 좀 별로지만 동기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아요. 이미 몇몇 남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관심 갖는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정연의 진짜 성격을 몰라요. 사실 정연은 굉장히 소심해요. 겉으로 보이는 상냥함과 서글서글함도 실은 자신의 소심함을 감추려고 더 유난을 떠는 거죠. 일종의 방어기제랄까요. 그래도 그런 내성적인 성격 때문인지 그녀는 마냥 활달해 보이는 외면과 다르게 속이 무척 깊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고민에 공감할 줄을 알죠. 저에게 그녀는 터놓고 고민을 얘기하기에 좋은 상대예요. 그러니까 고민을 들어주는 역할이라는 거죠. 뭐, 그녀도 역시 그 이상은 아니에요. 나름대로 진지한 얘기들이 오가서 그런지 저한테 은근히 관심이 있는 눈치던데 제 입장에선 그런 분위기가 썩 반갑지는 않아요. 사실 좀 그렇잖아요? 기껏해야 좀 싹싹하고 얘기 잘 들어주는 것밖에 없는 여자한테 어떻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고요.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얼굴이 별로라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어쨌든 역할 말고는 별다른 매력이 없으니 저로서는 굳이 관심 가질 필요가 없죠.
 
  반면 미라와 민희는 잠자리 상대로 딱이에요. 미라는 교양 수업 때 만났고 민희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만났는데 둘 다 조금 말을 섞어보니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들이란 게 보이더라고요. 대강 훑어봐도 얼굴도 꽤 반반하고 몸매도 적당히 볼륨이 있어 보이길래 바로 약점을 파고들었죠. 술자리를 만들어서 그녀들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양 너스레를 떨어주니 전략이고 뭐고 생각해볼 것도 없이 바로 넘어오더군요. 미라는 가슴이 참 예뻐요. 퍼지지 않으면서도 큼직한 분홍빛 가슴은 그 자체로도 예술이지만 특히 옆에서 볼 때의 라인이 정말 환상적이죠. 감촉도 자연산답게 손에 착 감기는 몰캉몰캉한 느낌이 아주 부드럽고 좋아요. 한바탕 게임이 끝난 뒤 봉긋하게 솟은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며 잠드는 게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다니까요. 민희는 엄격한 군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고 하는데 오히려 그 때문인지 잠자리에서 매우 난폭해져요. “나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죄의식이 간혹 엿보이기도 하지만 막상 게임이 시작되면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저를 짓이겨놓죠. 대실을 잡으면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씻지도 않고 시작해버리는데 폭발적으로 달려드는 그 기세는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와 어우러져 마치 한참을 굶주린 들짐승을 떠올리게 해요. 한 번은 게임이 너무 격렬했던 탓에 침대 시트가 찢어지기도 했었다니까요. 그 질긴 시트가 말이죠. 그 모텔 대실비도 싸고 거품욕조도 있어서 자주 다녔는데 앞으로 못 가게 된 게 좀 아쉽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게임은 남자가 리드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민희를 만나면서 싹 바뀌었어요. 힘깨나 쓴다고 자부하던 제가 잠자리 한 번으로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릴 정도니까요. 우먼파워, 함부로 무시했다간 큰 코 다치겠어요. 이렇게까지 얘기하고 있으니 마치 연인과의 성생활을 얘기하는 것 같네요. 뭐 가끔 보면 사랑스럽기도 해요. 어떤 여자든 그만큼 몸을 섞으면 없던 감정도 생겨나게 마련인데 저라고 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제가 그녀들한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냐고 묻는다면, 아니요. 천만에요. 예나 지금이나 저는 그녀들에게 절대로 자신을 내어줄 생각이 없어요. 몇 마디 달콤한 말만 듣고 별 생각 없이 몸이나 대주는 골빈 여자들과 양질의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 안 하거든요. 실제로도 그래요. 무슨 얘기를 하든 조금이라도 진지한 얘기를 나누려 하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무식한 소리를 해대는데, 대통령이 일을 못해도 국민이 뽑은 대표니까 군말 말고 따라야 한다느니, 역사 문제 따위는 먹고사는 일에 도움될 거 없으니까 신경 쓸 필요 없다느니, 독서는 잘난 척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허세 부리려고 하는 짓이라느니, 진짜 별의별 소리를 다 한다니까요. 두 여자 모두 어쩌면 그렇게 헛소리를 기똥차게 하는지 아주 정나미가 뚝 떨어져요. 상식도 없는 것들. 그것도 그렇지만 애초에 전 다가갈 때부터 경계선을 확실히 그어놨거든요. 그녀들이 절 가질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게임에서만이라고요. 그러니 저와 그녀들의 관계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걸로 딱 정리가 되죠. 아, 참고로 그녀들은 서로를 몰라요. 아마 두 사람은 각각 자기가 저와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있는 줄 알겠지만 전 어느 쪽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적당히 재미 보고 챙길 것만 챙기는 거죠. 이런 얘기를 그녀들한테 하면 당연히 이해 못할 거예요. 십중팔구는 분노를 못 참고 머리끄덩이를 잡아가며 온갖 지랄을 해댈 게 뻔해요. 괜히 쓰레기 취급받으면서 난감한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만약에라도 당신이 그녀들과 대화를 하게 된다면 이 얘기만큼은 비밀로 해주세요.
 
  얘기가 꽤 길어졌는데 이 정도 예시들이라면 설명으로 충분하겠죠? 이런 식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몰래 역할을 부여하고 관계를 오로지 그 역할로만 대하도록 하는 거예요. 괜히 감정이 사적인 방향으로 쏠리게 될 것 같으면 반대편에 그들의 결함을 무게추로 달아서 저울의 평형을 유지하고요. 역할에 대한 인식 이상의 관심은 위험해요. 마냥 관심을 쏟고 호감을 주면 그들로부터 언제 어떻게 뒤통수를 맞을지 몰라요. 사람이란 게 그렇잖아요. 믿을 만하면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칼끝을 들이대는 족속이 사람인 걸요. 그 불편한 속성을 알고 있다면 불상사가 일어나기 전에 조치를 취해놔야죠. 이런 역할극을 고안한 이유가 그 때문 아니겠어요. 역할극의 배우는 그들이고 저는 감독이에요. 배역에 감정을 이입하는 건 그들에게 맡기고 저는 무대 뒤에서 그들을 관리하면 되는 거예요. 말이 쉽지 그게 가능하냐고요? 당연히 말처럼 쉽지는 않죠. 저도 지금과 같은 경지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요. 하지만 제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에요. 상당 기간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한 번 굳게 마음을 먹고 감정을 중립에 놓는 데에 성공하면 그때부터 관계란 건 정말 재미없을 정도로 쉬워져요.
 
  사람의 성격을 냉철하게 파악한다면 어떤 사람한테서라도 필요한 걸 얻어낼 수 있어요. 동시에 자신의 손실도 최소화할 수 있죠. 사람한테 감정을 쏟는다는 건 그 사람한테서 손해를 볼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작 그 사람한테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손해를 보게 되면 자기가 언제 그런 각오를 가졌었냐는 듯이 분노해요. 자신들이 어떤 각오를 갖고 있었는지조차도 모르는 거죠. 멍청한 것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모든 인간관계의 양상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조율할 줄 아는 저는 손해를 볼 각오를 하지 않고 또 그 각오의 표현으로 오해될 수 있는 어떠한 제스처도 취하지 않아요. 단지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 약간의 투자를 하는 것뿐이죠. 저로서는 드러낸 적도 없는 진정성을 봤다고 우기며 절 곁에 두려는 사람들도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제가 진정으로 마음을 준 적이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그때 가서 배신당했다고 바락바락 화를 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겐 아무런 죄가 없거든요. 책임이 있다면 오히려 제가 이런 사람이란 걸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그들 자신에게 돌아가야죠. 이처럼 저는 어떠한 관계에 있어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아요. 어느 누구도 제게는 주어진 역할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고, 그로써 저는 인간관계 때문에 고통받을 일이 없어요. 서로 간의 보이지 않는 서열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깨지지 않는 갑을 관계를 만드는 것. 이것이 제가 삶을 통해 배운 성공하는 관계의 법칙이에요.
 
  이쯤 되면 제가 당신한테 이렇게 긴 설명을 늘어놓는 이유를 알겠죠? 당신은 조언자의 역할이에요. 그러니 저라는 인간을 이루고 있는 것들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어요. 제 성격과 행동을 뿌리부터 확실히 이해해야 제대로 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까지 제가 조언자로 점찍었던 사람들은 항상 제 얘기를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피해갔어요. 어렵게 얘기를 꺼내도 무시하기 일쑤였고 이렇게까지 길게 얘기를 할 수도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 제 앞에 있는 당신은 분명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과 달라요. 그래서 제가 믿음을 갖고 이렇게 자리를 만든 거죠. 결국 당신은 제 이야기를 모두 들어줬어요. 그건 곧 당신이 제 조언자가 될 자격과 의지가 모두 충분하다는 뜻 아니겠어요? 이로써 당신은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있고 저로부터 커다란 기대를 받는지를 스스로 입증해냈어요. 전 이제 당신을 완벽히 믿을 수 있어요.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자세로 제 고민을 이해하고 누구보다 사려 깊은 조언을 해줄 거라 믿어요. 그렇게 해줄 거죠? 특별한 거부 의사가 없다면 제 제안을 받아들인 거라고 생각할게요.
 
  그럼 슬슬 제 고민에 대해서 얘기를 하도록 하죠. 사실 저, 요새 마음에 드는 여자가 생겼어요. 인터넷 랜덤채팅을 통해서 알았는데 성격도 비슷하고 말도 잘 통해서 연락처도 교환하고 금세 친해졌어요. 사진도 받아봤는데 정말이지 인형이 따로 없더라니까요. 이젠 채팅만으론 안 되겠어서 수시로 통화하고 메시지도 주고받고 그러는데 그때마다 너무 설레서 주체할 수가 없어요. 다음 주에 오프라인에서 직접 만나기로 했는데 남자친구도 없다고 하니 고백해도 되겠죠? 그런데 저는 이렇게 설레고 떨리는데 정작 그 애가 절 남자로 보지 않는다면 전 어떡해야 하죠? 무턱대고 고백했다가 차이면 그땐 어떡하죠? 그렇다고 고백 안 하고 우물쭈물하다간, 금방 다른 남자들이 채갈 것 같은데…… 또 그렇다고 고백하려니 거절당해서 이도저도 아닌 사이가 돼버리면…… 그래도 저한테 호감이 있으니까 계속 연락하고 직접 만나자고도 하는 걸 텐데, 아, 그런데 이것도 만약 저 혼자만의 착각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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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월호를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
출처 순수한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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