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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신백일장]그 많던 고추는 누가 먹었는가
게시물ID : readers_211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방울성게
추천 : 16
조회수 : 792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5/08/10 00:5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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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 방황하는 그대여, 책게로!
 
-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농담이라도 해도 고추가 없어졌다고 하는 녀석은 없기 때문이다.
승철이는 좀처럼 보기 힘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덩달아 나도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하는 이야기는 정상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원래부터 이상한 녀석인 건 알았지만, 이정도로 이상한 걸
알았다면 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가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리를 하자면."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면서 내가 말했다. 승철이의 시선이 자연스레 내 손으로 따라왔다. 나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고추가 없어졌다."
 
"그래."
 
"그러니 고추를 서리하자."
 
"그래."
 
승철이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번 수학여행 때?"
 
"그렇지."
 
승철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 손가락을 튕겼다.
 
"왜, 좋은 생각이라도 있냐?"
 
"있지. 역시 넌 미친놈이야. 나는 또 뭔 이야기를 하나 했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승철이 팔소매를 잡았다. 승철이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여줄까?
 
-
 
충격을 받았을 때 짓는 표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럼에도 비슷한 모양새가 있다. 나는 그것이 반작용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은 충격이 표정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내 표정은 굉장히 우스꽝스러울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있자 승철이 당황한 표정으로 어깨를 흔들었다.
 
"야, 어때. 혹시 너도 없냐?"
 
그 말에는 저절로 험악한 표정이 지어졌다. 내가 너처럼 고자…… 거기까지 꺼냈다가 입을 급히 다물었다. 잘게 쪼개진 고자
라는 단어가 찾을 길 없이 화장실 공기중에 녹아들었다. 안경을 세면대에 올려두고 마른세수를 했다.
 
"병원에는 가봤냐?"
 
"너라면 갈 수 있겠냐? 고추가…… 아오."
 
한숨에서 답답한 기분이 그대로 읽혀왔다. 나는 잠깐 환기할 겸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봐도 되냐?"
 
"뭘."
 
"네 고추. 있어야 할 게 없으니까 신기하긴 하다."
 
"뒤질래. 빨리 농담하지 말고 고추 서리할 방법이나 생각해보자. 아니면 네꺼 가져가고."
 
결국 나는 더 아무말 않고 승철일 돕기로 했다. 그 말을 하면서 내 고간쪽으로 던진 시선이 불편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고추가 없어진 기분은 상상은 커녕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녀석을 돕기로 결정한 건 그런 이유때문도 아니었다.
고추 서리라는 말에 들떴다면 적당히 미친 게 아닌 모양이었지만, 어쩌면 고추를 잃어버린 녀석과는 죽이 잘 맞는 콤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야기는 간단했다. 자고 있는 아이들의 바지를 벗겨서 고추를 확인한다. 그 중에서 가장 괜찮은(?) 고추를 고르는 것이다.
생각이야 하고 있었지만 정작 계획을 듣고나니 정말 미친놈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달리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어떻게 멀쩡히 있던 고추가 없어질 수 있는가. 그 물음에 대답하려고 하면 어떻게도 할 수 없다. 뭔가 비정상적인 일이 생겼다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다…… 그게 녀석의 말이었다. 딱히 궤변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역시 무리야."
 
"또 뭐가."
 
수학여행까지는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이 정도 멍청한 계획이라면 게이 콤비가 되기 딱 좋다. 대체 고추를 확인한 다음은 어떻게 할 건데?
그렇게 말하자 승철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먹어야지, 하고 말했다. 너무 덤덤한 표정이라 오히려 지을 표정을 잃어버린 건
내 쪽이었다.
 
"오줌은 어떻게 누냐."
 
"야, 장난칠 때가 아니라."
 
승철은 그렇게 대답하다 내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녀석을 돕는 조건 몇 가지를 내걸었다. 하나는 이 일에 대해서는 둘만의
비밀로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내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것이었다. 첫째는 쌍방의 합의같은 거였다. 고추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발각되는 건 승철이에게도 기피할 만한 거지만, 고추 서리를 도왔다는 누명은 나로서도 사절이었다. 나머지 하나에 관한 건 순전히 내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였다. 호기심의 말로라고 해야 할까.
 
내 질문에 대답하는 승철의 표정이 비참해질 때까지 질문을 계속했다. 오줌은 못 누지만 똥에 섞여 나오는 모양이다, 고추가 없어도 사실
그렇게 불편할 건 없다, 그게 설 일이 없으니 노심초사하는 일도 없다, 오히려 전보다 조금 평온해진 것 같다…… 그런 대답들이었다.
녀석에게는 이미 남자로서의 위상이나 그런 건 없는 것 같았다.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 아니, 사실 다른 것도 많긴 하지만."
 
연습장을 펼치면서 내가 말했다. 시선은 계속 핸드폰으로 갔다. 사람을 피해 옥상까지 올라오는 바람에 수업에 맞춰 내려가려면 시간이
좀 빠듯하다. 나는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이 남아있는 연습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많이 양보해서 네가 원하는 고추를 찾았다고 하자."
 
"그래."
 
"어떻게 한다고? 먹는다고 했나."
 
"그렇지. 누군지 모르겠지만 내 고추를 먹었으니 나도 하나 얻어와야 할 거 아냐."
 
"……그래. 그럼 가만히 있을까? 자다가 고추를 물리면 어떻게 반응할 지는 굳이 실험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데."
 
내 이야기를 들은 승철이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표정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건 고추를 잃어버린 것에 비하면 좀
현실적인 문제지만, 역시 생각할 수록 미쳤다는 것만 실감하게 될 뿐이었다. 고추를 먹는다니…… 상상만 해도 토가 쏠릴 것 같다. 이럴 때
써야하는 말이 바로 혐오지. 으으.
 
종이 칠 때까지 고민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우리가 내놓은 답은 '일단은 먹고 보자!'는 것이었다. 글쎄, 잘 될련지 어떤지.
 
-
 
침이 계속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녀석이 핀잔이라도 줄 것 같았지만, 그쪽 사정도 별로 다르지는 않았다. 어둠 속에서
두 남자가 침을 삼키는 소리만 기이하게 들려왔다. 핸드폰 조명을 가장 낮은 밝기로 켜서 주위를 살폈다. 깨어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녀석이 계속 여자애들쪽으로 가려고 해서 옷소매를 잡고 당겼다. 이 놈은 고추도 없는 주제에 왜 자꾸 이래.
 
생각한 것보다 현실은 훨씬 끔찍했다. 녀석이 바지를 내려서 남의 고추를 꺼내 진지하게 확인하는 건 그야말로 못볼 꼴이었다. 고개를
돌렸지만 어줍잖은 코끼리가 계속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속으로는 애국가를 불렀지만 별 효과는 보지 못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고추를…….
 
야, 찾았어.
 
승철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돌아보던 나는 식겁해서 녀석을 노려보았다.
 
미친놈아. 선생님 고추를 네가 왜 써.
 
승철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대답했다.
 
애들 고추보다는 어른 고추가 낫지.
 
아니, 그래도 젊은 고추가 좀 낫지 않을까…… 아니, 이게 아니라. 설득하기에는 새벽은 너무 짧았다. 녀석의 비장한 표정을 보니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 자기 고추가 없어졌는데 남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야 하겠어? 내 고추는 무사한지 확인하면서 고개를
끄덕여줬다. 녀석도 힘을 얻었는지 곧장 선생님의 고추로 다가갔다.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꾸 고개가 돌아갔다. 이런 장면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인간 본연의 본능이기도 했다!
…… 그런 합리화를 하면서 나는 기어코 녀석이 선생님의 고추를 향해 입을 벌리는 모습을 머릿속에 담고야 말았다.
 
-
 
2015-08-10 00:49
 
끔찍한 꿈이었다. 잠깐 잔다는 게 벌써 날이 바뀌었다. 오늘부터 등신백일장이 시작된다고 했나. 준비할 때는 뭐든 써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컴퓨터에 앉으니 막막했다. 대체 어떤 걸 써야 화려하고 멋진 등신이 될 수 있을까. 그러던 찰나에 전화가 왔다.
소름이 돋았다! 전화를 건 것은 승철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
 
"아니, 뭐 별건 아니고."
 
승철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너 고추 있어?"
 
-
 
"우리는 세월호를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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