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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신백일장] 오늘만 대충 수습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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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선셋시머
추천 : 0
조회수 : 18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8/10 15:2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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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좋아하시는 분들은 누구나 책게로 자유롭게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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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눈이 뜨이지 않는다. 손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온몸은 묶여 있었다. 납치당했다는 생각에 내 심장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범인이 요구조건 무시하고 그냥 죽이면 어쩌나, 범인의 목적은 장기 적출이나 섬 노예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우후죽순처럼 떠오르니 그 동안의 삶이 주마등처럼 흘러나갔다. 벌써 망막을 적출당한 게 아닌가 싶어서 힘겹게 눈을 떠보니 낯익은 방 안이었다. 방 안은 살짝 어두웠고 별다른 가구는 없었다. 바닥에 어떤 물체들이 있었고 벽에는 한 장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어떤 나이 든 경찰관 앞에 나와 여자친구가 다정하게 껴안은 사진이었다. 그제야 나는 이 방이 여자친구의 방이라는 걸 깨달았다. 저 경찰 아저씨는 그녀의 아버지였던가. 그렇다면 그녀가 나를 납치한 것인가.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어젯밤 내 개인 사정상 핀란드로 떠난다고 그녀와 마지막 밤을 즐기는 장면이었다. 그때 그녀는 슬픈 눈으로 둔탁한 물체를 내 머리를 향해 휘둘렀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사실 나는 내 여자친구가 최근 들어 이상해졌다는 걸 눈치챘다. 처음에는 부인했고 내 지인이 그녀에게서 압박을 받고 그녀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는 증거가 나왔을 때도 그러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순수하고 헌신적이었다. 심한 땅콩 알레르기를 앓고 있어서 땅콩 냄새만 맡아도 두드러기가 나지만 땅콩 샌드위치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여러 번 조리해주는 그녀. 벌이가 시원찮은 마술사 일을 하는 나를 묵묵히 뒷바라지해주는 그녀. 그런 그녀가 언제 이렇게 타락을 했을까. 그녀의 집착이 심해질수록 나의 사랑은 식어가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나의 탓인지 그녀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분노의 감정과 함께 미안한 감정이 교차하는 건 기분 탓일 것이다.

 누군가 콧노래를 부르며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였다. 그녀는 환한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았다.

 “, 자기 일어났네? 간밤에 불편했지?”

 나는 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내 입에 재갈이 물려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도 버둥거리는 거 말고는 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내 볼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자기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게 다 자기를 위한 거야.”

 그녀는 나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역겨웠다.

 “요즘 난 악몽을 꿔. 그 악몽은 전부 다 자기가 나를 버리고 가는 걸로 끝나. 자기가 나를 떠나는 건 상상도 하기 싫고 말이야. 그런데, 오늘 자기가 핀란드로 떠나는 날이지? 자기가 떠나지 않게 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어. 정말 미안해.”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이런 모습은 아주 낯설었다.

 “자기야, 핀란드로 안 가면 안 돼? 자기가 정말로 그 짓을 할까 무섭단 말이야. 그냥 여기에 있어주면 안될까?”

 그녀의 눈가에 별빛이 맺혔다. 하지만 그 눈물은 악어의 눈물이 틀림없다. 그녀는 잘 모르겠지만 난 그녀를 버리고 핀란드로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아니, 그녀도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서서히 고개를 저었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야, 난 자기를 믿어. 하지만 자기의 친언니에게서 물어볼 게 있어.”

 그녀는 내 누나에게도 손을 댈 작정인가 보다. 그동안 그녀가 한 행동을 보아 내 누나도 무사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의 폭주를 막아야 하지만 온몸이 묶이고 방구석에 감금된 현재로써는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무력감이 등골을 타고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자기의 눈빛이 흔들리네. 자기의 언니가 걱정되는 거야 아니면,”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기이하게 빛났고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물 밖으로 드러날 추악한 진실이 걱정되는 거야?”

 그녀는 점차 광기에 사로잡혔다. 목 언저리에 얹은 그녀의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갔고 울먹이면서 말했다.

 “어떻게 날 두고 바람을 피울 수가 있어? 자기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숨 막히고 괴롭다. 발버둥을 쳐봤자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손에 힘을 풀고 무표정으로 말했다. 생기 없는 눈은 소름 끼쳤다.

 “자기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누구보다도 믿고 있어. 하지만 믿음을 저버린다면, 자기의 친언니를 데리고 와서 똑똑히 보여줄게.”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방을 나갔다. 그녀가 누나에게 어떤 일을 할지 모르니 최선으로 누나를 지켜야 하지만 빠져나갈 수 없는 지금 상황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한숨을 내쉬면서 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밖에선 칼로 도마를 쿵쿵 내리찍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엔 급히 청소한 흔적이 보였지만 군데군데 붉은 자국이 보였다. 우리 집 누나 방에 있는 곰 인형과 똑같이 생긴 인형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그녀의 광기에 혀를 내두르다가 문득 붉그죽죽한 칼이 보였다. 핏자국이 말라 엉겨 붙은 것처럼 보였다. 그 칼로 밧줄을 풀고 방을 나가려고 하는데 방문 밖에선 그녀가 칼을 갈 가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은 잠겨져 있었고 방문은 열려있지만, 함부로 나갈 수 없는 상황. 그녀는 방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방문을 등지고 있었기에 나는 모험을 했다. 문을 살포시 열고 온몸을 숙이며 살금살금 걸어나갔다.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칼을 가는 소리에 내 발걸음 소리는 파묻혔다지만 심장 소리가 온 집안에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이 긴장감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힘겹게 현관까지 왔다. 대충 아무 신발이나 신고 나가려는데. 어느덧 칼 가는 소리는 멈춰있었고 뒤에서 스산한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있었다. 그녀가 칼을 들고 어젯밤 나를 보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오금이 지렸다.

 “자기야, 어디가?”

 빛나는 칼과 대비되어 그녀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다.

 “나에게서 도망치려고? 아까도 말했잖아. 자기를 떠나 보낼 수 없다고.”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었고 마녀의 웃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점차 나에게 다가왔다. 내 뒤엔 현관문이 있었고 탈출하고 싶었지만 그러기 전에 그녀가 나를 찌를 것 같았다.

 “헤헷,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다, . 얼굴 좀 펴. 에이, 왜 그렇게 어두운 거야. 내가 설마 자기를 해치기나 하겠어? 물론 자기가 어디를 가든 나는 끝까지 찾아갈 거지만. ”

 그녀는 뭐라고 지껄이는지는 모르겠다. 그녀가 든 칼만 바라볼 뿐이다. 칼이라……. 내 손에는 피 묻은 칼이 있었다.

 칼을 던지고서는 문을 열고 정신 없이 도망쳤다. 칼을 빗맞혔지만 신경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뒤에선 그녀가 쫓아오고 나는 이리저리 헤매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두 다리는 풀리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살기 위해서는 도망쳐야 했다.

 그녀의 추격을 어느 정도 따돌리고 앉아서 쉬고 있었다. 물 한 모금이 절실했다. 그녀의 집과 우리 집은 한 시간 거리였고 그녀 집 주변의 지리는 잘 몰랐다. 거기에 정신없이 쫓긴 끝에 여기가 어딘지 몰랐고 가진 건 하나도 없었다. 온 동네에 그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낭랑하게 퍼져나갔다. 소리로 보아서는 내 주변에 그녀가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 걸리면 내 사지가 잘려나갈지도 모르겠다. 이게 악몽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던 중 파출소가 보였다. 파출소로 정신없이 들어갔다. 파출소에는 나이 드신 경찰 한 분이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저기, 아저씨! 아저씨!”

 “흐음, 여보, 그게.”

 “아저씨!”

 “으어.”

 아저씨는 하염없이 주무시고 계신다. 내 속은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른 채 주무시고 계신 것을 보면 정말 암울했다. 그녀에게서 벗어나려면 공권력을 빌려야 하지만 밖에서 누가 죽든 말든 공권력은 자고 있다.

 답답한 대기상황이 계속되고 있을 때 경찰들이 들어왔다. 알코올 냄새로 보아하니 아마도 회식을 하고 온 것이 틀림없다.

 “저기요! , 제발 살려주세요!”

 “, 또 뭐에요?”

 경찰들은 귀찮아하는 티를 역력했다.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지만 정말 다급했다,

 “저기, 한 번만 도와주실 수 있나요?”

 경찰들은 심드렁했다.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복장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경찰에게 모든 걸 의지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나 누나나 무사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무릎이 꿇렸고 경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지만, 경찰들은 무심했다. 그렇게 빌기를 30, 누군가 들어왔다.

 “아가씨! 오랜만입니다. 여기는 어쩐 일이시죠?”

 지금까지 자고 있었던 늙은 경찰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말했다. 아차, 생각해보니 그녀는 경찰서장의 딸이었다. 애초에 파출소에 오는 게 아니었다. 워낙 다급했다고 하지만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갈 줄이야. 절망적이다.

 “제 남자친구가 사라져서 이곳 저곳을 찾아보고 있었던 중이에요. 그런데 여기 있었네요.”

 그녀는 나를 보고 생긋 웃었다. 경찰마저 그녀의 편인 이상 공권력은 더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경찰들에게 내가 정신적으로 불안해서 피해망상에 시달리니 이해해달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내 누나도 내 힘으로 지켜야 하는 상황이다.

 또다시 정신없이 도망쳤다. 이번에는 경찰들도 가세해서 나를 쫓는다. 지금은 어떻게든 추격을 따돌리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일평생 법을 어긴 적이 없어도 죄인의 몸이 되어 쫓긴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미 한참을 뛰었고 어느덧 따라잡히기 일보 직전까지 왔다. 앞에는 대로였고 차들이 많이는 없지만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차에 치이든 그녀에게 죽든 죽는 건 마찬가지이고 이 도로를 경계로 경찰서 관할 구역이 바뀔 거라는 생각에 도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도 내가 뛰어들자 나를 잡으러 같이 뛰어들었다. 말 그대로 광란의 질주였다. 천운이 따랐는지 다 건너갈 때까지 차에 치이지 않았다. 무사히 건너고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나를 쫓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들리는 급브레이크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세단 한 대가 그녀에게 들이박는 장면을 아주 잠깐 보았다. 찰나의 순간, 나는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을 보았다.

 순식간이었다. 그녀가 진짜로 차에 치였는지 제대로 못 봤지만 그녀의 처참한 몰골을 다시 볼 용기가 없었다. 나는 사고현장에서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내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고 급작스러운 사고에 놀란 사람들은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찢어지지만, 왠지 모르게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녀의 눈빛이 내 마음을 사정없이 쑤시면서 터벅터벅 걷고 있을 때였다.

 “! 어디가? !”

 주위를 둘러보니 거리는 한산했다. 그제야 저 부르는 소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뒤를 돌아보니 누나가 있었다. 누나는 나에게 다가와 손수건으로 내 땀과 눈물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걔 안 봐도 돼? 지금은 아니더라도 한 때는 네 여친이었잖아.”

 나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누나는 내 눈치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진짜 좋은 애였는데 안타깝네.”

 마음속에 무언가가 울컥거렸다. 누나 품에 안겨서 울었다. 나에게 고통과 시련을 준 그녀였지만 미안한 감정도 있고 그녀의 마지막 눈빛도 생생했다. 만에 하나를 걸고 그녀의 생사를 알고 싶어서 겨우겨우 입을 떼고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말했다.

 “, 걔는 어떻게 되었어?”

 누나는 뜸을 들이다가 낯빛이 묘하게 바뀌면서 말했다.

 “걔는 죽었어.”

 실감 나지 않았다. 그녀와의 추억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누나가 이끄는 대로 가다 보니 멀지 않은 곳에 누나의 차가 있었다. 차에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그걸 깨는 건 나였다.

 “누나, 괜찮을까?”

 “? 뭐가?”

 “우리가 이러는 거. 괜히 우리 때문에 걔가 죽은 거 같아.”

 누나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면서 말했다.

 “괜찮아. 비록 가슴 아프지만, 우리 미래에 걔는 없어.”

 집에 돌아왔다. 온종일 힘들었지만, 내일 새벽 비행기로 핀란드로 갈 준비를 해야 했다. 누나는 짐 싸는 것과 별개로 바쁘게 움직였다. 누나는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나는 말없이 땅콩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밤이 아득해졌다. 누군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였다. 분명히 죽었던 그녀였다. 분명히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무릎에 찧어진 상처를 제외하면 너무나도 멀쩡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먼저 말을 꺼낸 건 그녀였다.

 “자기야, 아직 안 떠났네.”

 “, 저기. 너 거. 거기서 죽, , 죽지 않았…….”

 혀가 공포에 얼어붙어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소름 끼치게 미소를 지었다.

 “에이, 죽긴 누가 죽어. 단지 턱에 걸려 넘어졌을 뿐인데, .”

 어느새 내 뒤에 누나가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녀가 살아 돌아온 건가. 아니면 누나가 나를 속였나. 나는 믿을 수 없어서 누나를 바라봤다. 누나는 매우 당황했는지 나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녀도 눈치를 챘는지 누나를 노려보았다.

 “누나, 얘 죽었다며. 어떻게 된 거야?”

 “언니, 멀쩡한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둔갑시킨 이유가 뭐죠?”

 누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눈빛을 이글거리면서 말했다.

 “그래, 얘가 죽었다고 속여서 미안해. 그런데 넌 얘에게 쫓기는 거 아니었니? 너를 살리려면 어쩔 수 없어.”

 나와 그녀 둘 다 누나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누나가 이렇게까지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눈가 주위가 빨개지더니 울부짖으면서 말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자기야, 진짜로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지? 자기를 독차지하겠다잖아!”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를 스토킹하는 그녀, 나를 속인 누나, 지금은 둘 다 똑같다는 생각만 들지 내 머릿속은 완전 백지였다. 오늘만 대충 수습하면 되는 일이지만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 누나는 나를 제치고 앞으로 갔다. 요리하다 온 누나의 손에 식칼이 들려져 있었다. 그녀는 누나의 손에 들려진 것을 흘겨보더니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그래, 어디 한 번 해봐라. 자기야, 똑똑히 봐둬. 자기의 애인은 영원히 나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누나의 배에 주먹을 날렸다. 누나는 앞으로 고꾸라졌고 칼을 떨어뜨렸다. 누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벽에다 그녀의 머리를 두 번 박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빠져나왔고 누나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두 여자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냥 포기해라. 이런 건 사랑이 아니고 네 동생은 너를 버렸다.”

 “포기? 사랑을? ? 자기가 나를 버릴 리는 없는 거 잘 알잖아요. 자기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러는 거에요? 자기야, 말 좀 해봐!”

 나는 이 싸움을 지켜보는 입장에서 어떻게 개입해야 할지 모르겠다. 둘 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또 나를 배신하기도 했다. 말리는 게 상책이지만 너무 살벌해서 함부로 들어가다간 오히려 내가 다칠 것 같았다. 그녀는 비장하게 말했다.

 “좋아, 자기야. 그럼 이렇게 하자. 거기 발밑에 칼 있지? 내가 싫다면 그걸로 나를 찔러줘. 자기가 원하는 게 그거라면 기꺼이 따라줄게. 하지만 나를 사랑한다면 핀란드행 티켓을 불태우고 이 땅에서 알콩달콩 살아가자.”

 그녀의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상 내 손에 모든 게 달려있었다. 둘 다 나에게 소중했다. 어떤 걸 골라도 결국 평화롭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핀란드행 티켓을 찢어봤자 싸움이 끝이 날까. 내가 그녀를 죽이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어떤 짓을 하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은 굳혔지만, 도저히 그걸 실행하기 힘들었다. 끝을 내더라도 내가 내야지. 황급히 짐짝을 뒤져 티켓을 찾았다.

 “, 뭐 하는 거야! 진짜로 쟤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거야? 미쳤어?”

 누나는 깜짝 놀라 튀어나가려고 했다. 그녀는 누나를 붙잡았다. 나는 라이터를 꺼내 티켓을 불태웠다. 누나는 망연자실해있고 그녀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역시 자기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누나는 넋이 나간듯했다. 그녀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자기는 입술마저 사랑스ㄹ……. , 땅콩?”

 그녀는 나를 놀란 듯이 바라봤다. 그녀는 미친 듯이 입을 씻어내려고 애를 썼지만, 알레르기 반응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고 목을 부여잡고는 기침 발작을 했다.

 “, 어째서? 콜록, 콜록. 나를 사, 사랑한다며…….”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미안해. 나도 자기를 사랑하지만 미운 마음이 더 큰 거 같아. 우리 미래에 자기는 없는 게 나을지도.”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손은 부르르 떨리고 계속 기침을 하고 있었다. 심한 땅콩 알레르기를 앓고 있는 그녀는 곧 있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녀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봤다. 드디어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뒤에서 누나가 나를 끌어안았다.

 “드디어 단둘이 있게 되었네.”

 “그러니까, 누나. 그녀는 정말 성가셨어. 이제는 방해거리는 없는 거지?”

 나는 고개를 돌려 누나와 달콤한 키스를 했다. 누나의 입술은 꿀을 발라놓은 것 같았다.

 “누나, 핀란드에 가면 우리 둘이 진짜로 결혼할 수 있는 거 맞지?”

 “물론이지. 이 나라에서의 모든 삶은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거야. 자기야, 그렇지?”

 우리 둘은 앞으로의 행복한 미래를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나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비행기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속임수를 써서 티켓을 태우는 척을 했다고 알려주자 누나는 한 번 더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누나의 입술은 언제라도 달콤했다.

 “자기야, 사랑해.”

 “누나, 나도.”

 그렇게 우리는 한국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무참히 버려진 그녀의 눈가에 왠지 모를 눈물이 맺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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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월호를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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