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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신백일장] 나는 선택하지 않았다.
게시물ID : readers_212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상상속동물
추천 : 3
조회수 : 25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8/11 04: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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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나는 선택하지 않았다. 

 차에 치이는 꿈을 꿨다. 너무나도 현실같은 꿈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악몽을 꾸다 깨는 것처럼, 반쯤 접히는 것처럼 상체가 굽혀지고 튕기듯 침대에서 떨어져 버둥대다가 이마가 바닥과 모닝키스를 하기 직전에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내 평생에 이렇게 강렬하게 잠에서 깨는 경험을 하긴 처음이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바로 세웠다. 
 '악몽이라고 하면 전역 후에 가끔 군대 꿈을 꿨다고 생각될 때 뿐이었는데... 차에 치이는 꿈이라니 재수 없군.' 
 가끔 군대 악몽을 꿨을 때처럼 양 손을 비벼본다. 악몽에서 깨어나면 늘 땀에 찌들어서 깼기 때문인데 어디에도 젖은 느낌은 나지 않는다. 이것도 최초라면 최초네. 

 "끼리릭 끼리릭" 
 시계 태엽을 감는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무지개 색 총공격이다."
 아침을 깨우는 룰루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미친 웃음소리라서 절로 정신이 들게 된다. 이 웃음소리를 모닝알람이나 벨소리로 해놓는다면 끼리릭 하는 시작음이 들리자마자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찾아 알람을 끄던가 전화를 받게 될 것이다. 그 뒤에 들려오는 룰루의 웃음소리를 듣지 않기 위한 뇌의 무의식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나 자신의 천재성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후훗. 기분좋은 시작은 아니었지만 그렇더라도 출근은 해야겠지. 

 5분 후. 

 엘리베이터를 타면 늘 중간에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9층에서 띵- 하는 벨소리와 함께 잠시 멈추는 동안 손에 든 핸드폰을 키고 딴청을 피울 생각을 하고 있을때 문이 열리면서 처음보는 여자가 탔다. 맙소사 가끔 오징어들이 먹물튀기면서 칭찬하는 인증샷의 주인공인 처자들처럼 예쁘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우리 아파트에 사는구나, 악몽을 꾸더니만 길몽이었나? 한 쪽 손에는 뭔가 A4용지 뭉치를 들고 가벼워보이는 백을 메고 있다. 

 "끼리릭 끼리릭" 
 갑자기 밀폐된 엘리베이터의 정적을 깨며 시계 태엽을 감는 소리가 요동치듯 울려퍼진다. 반사적으로 손에 쥔 핸드폰에 시선이 갔는데 그곳에는 아이 뿐, 알람이나 전화 표시는 보이지 않았다. 

 "어맛!"
 짧은 탄성소리와 함께 A4용지 수십장이 우수수 바닥에 떨어진다. 곧 룰루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가득 퍼져 정신을 산만한게 만들었다. 퍼뜩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 기억나서 바로 몸을 낮춰 떨어진 A4용지들을 줍기 시작하는데 곧 룰루의 웃음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여자도 치마입은 다리를 묘하게 꽈서 어정쩡하게 몸을 숙여 떨어진 종이들을 줍기 시작했다. 
 
 [ 사랑의 장기 기증 서약서 ] 
 A4용지는 장기 기증을 하겠다는 서약서였다. 뭔가 봉사활동이나 관련 단체 연관된 일을 하는가보다. 
 
 "룰루 웃음소리가 모닝콜로 좋더군요. 저도 그거 써요."
 좁은 공간에 둘이 아무 말도 없이 종이만 줍고 있자니 너무 어색하기도 하고, 저런 엽기적인 음악을 모닝콜로 쓰는 사람이 나말고 또 있다는게 반갑기도 해서 말을 붙혀본다. 여자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다. 
 
 "네에..."
 별다른 호응 없는 목소리다. 몇 장 남은 서약서를 줍는 동안 여자는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다. 곧 다 주워 함께 문을 나서면서 서약서를 돌려주자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별거 아닌데요, 뭐"
 인사치례를 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몸을 돌렸다. 겉으로는 태연한척 하면서도 홍조를 띄고 시선을 회피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드는 생각은 오로지 '룰루 이야기 하지말껄...' 이었다. 시간만 좀 더 있었으면... 서약서 관련된 이야기라도 한번 꺼내봤을텐데... 다음에는 장기기증 서약하는 이타심 넓은 남자라고 매력어필이라도 해볼까? 지각을 각오하고 서약서 쓰는 시간만큼 이야기라도 했으면 좋았을껄하는 뒤늦은 후회가 든다. 

 '바보같으니라고...'
 모태솔로의 자괴감에 고개를 숙인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오고 양 옆에 사람이 횡단보도로 나서 그들의 발걸음을 따라 길을 건너는데 이상하리만큼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이 길, 이 곳, 이 시간 어느 하나 익숙하지 않는게 없지만 마치 한번 봤던 영화를 또 다시 보는 것처럼 뇌리에 각인된 영상을 재생하는 듯한 느낌에 주변을 살펴보고자 하는 순간 은색 재규어가 눈에 들어온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사람들이 그를 피해 몸을 던지는 장면들과 그 재규어와 내 다리가 부딪히며 몸에 떨림이 전달되어 묵중한 충격음이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 쯤, 알 수 있었다. 
 
 '이거 꿈에서 봤는데...' 

 "으아아아!!"
 또다시 이마가 바닥과 모닝키스를 할 뻔했다. 잠깐, 또다시라고? 나는 분명 차에 치이는 악몽을 꾸었고, 그 날 아침에 꿈과 똑같이 차에 치였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깬 곳은 병원 침상위어야 정상일텐데 집이다. 
 
 "끼리릭 끼리릭... 무지개 색 총공격이다!" 
 망할 룰루 웃음소리가 듣기 전에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쥐고 알람을 끈다. 알람이 꺼져 나온 화면에 메모장이 보이는데... 이상하다... 평소 나는 메모장을 잘 사용하지 않는데, 메모장에 뭔가 빼곡히 적혀있네? 뭐지? 

 =========================
 맨 위에 메모
 =========================
 23. 교통사고
 22. 교통사고
 21. 교통사고
 20. 교통사고
 ...
 2. 교통사고 
 1. 교통사고
 
 맨 윗 메모에는 1번부터 23번까지 사고 기록이 적혀있다. 

 =========================
 이전 메모
 =========================
 몇 번이나 사고를 당하고 다시 침대에서 깨어나는지 모르겠다. 
 매번 사고가 날 때마다 기억이 흐릿해지고 있다. 무섭다. 

 이게 무슨 소리지? 메모의 내용을 미뤄보건데 나는 벌써 23번 사고를 당했다. 그리고 매번 침대에서 다시 깨어난 것이다.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앞선 교통 사고는 어떻게 설명하지? 기억이 너무나도 또렷하다. 그 공간의 빛과 질감과 향이 느껴질 정도로 그리고 차와 부딪힐때의 충돌이 온 몸에 각인되 상기할 수 있을 정도이다.


 ... ...

 몇 번의 실험 끝에 어떤 원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오늘 아침 침대에서 깨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일은 오지 않는다. 유일하게 남는 것은 핸드폰에 남은 메모 뿐, 아니 이것 자체도 말이 안되지 않는가? 아니 지금 현상 자체가 말이 안된다. 말이 안되는 세상에 말이 안되는 일이 벌어지는게 오히려 정상인가 싶다. 메모에 기록은 100을 넘어가고, 이젠 무슨 짓을 해도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것 같다. 아무런 희망이 없지만 기계처럼 잠자리에 든다. 혹시 내일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반쯤 포기한 희망을 품고...


 다시 그녀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인사를 건낸다. 어차피 오늘 아침으로 다시 돌아갈거란 생각에 없던 용기가 생기고, 머리 속에서 수십번 시뮬레이션 했던 대로 작업 멘트를 날려야겠다는 결심이 든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그녀도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한다. 그리고 곧 룰루의 웃음소리와 함께 흩뿌려진 서약서들을 줍기 시작한다. 
 "장기기증 서약서네요?" 
 "네... 관련 단체에서 서약서 받는 봉사를 하거든요..."
 뭔가 자신 없는 말투같다.
 
 "이런거 응해주는 사람 별로 없을거 같은데..."
 "네 정말 그래요. 필요한 사람은 많은데..."
 "평소에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오네요. 답례로 커피 한잔 사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다소 놀란 그녀의 표정에 자신감이 충만해진다. 

 "이렇게 좋은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커피 한잔 대접해드려야죠. 껄껄!"
 "아뇨, 정말 감사해요. 제가 사드리고 싶어요."
 하는 일 만큼 개념이 충만한 여자인거 같다. 아흐 좋아라. 

 커피숍에 도착해서 그녀와 나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곧 서약서를 달라고 해서 작성하기 시작했다. 서약서에 주민등록번호 칸에 기재를 하다가 책으로 배운 연예 지식을 써먹을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여기서 주민등록번호 살짝 실수하면 다시 연락오겠지? 브릴리언트! 역시 난 천재야!'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주민등록번호 한 자리를 틀리게 기재하는 동안에는 다시 시간이 아침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자! 여기 다 작성했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정말 좋은 일 하시는거에요. 혹시 잘못 기재한 곳 없는지 확인 한번만 해주시겠어요?"
 신중하기까지, 일처리도 꼼꼼한게 참 참하다 싶다. 

 "네 정확히 기재했네요."
 대충 확인하는 척 하고 서약서를 그녀에게 건냈다. 
 그녀는 서약서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웃으면서 백에거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꺼냈다. 아니 뭐?? 
 
 퓩퓩-
 영화에서나 듣던 퓩퓩소리를 듣고 소음기 달린 총에 맞아 죽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미안해요. 당신 장기가 필요한 분들이 있어서 그래요. 좋은 일에 쓸게요."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극심한 통증과 함께 기도로 피가 역류해 입으로 피만 컥컥대며 토할 뿐인 나를 그녀는 물끄럼히 지켜봤다. 
 
 "참, 이 총 이름이 뭔지 알아요?"
 그녀는 뜬금없이 발랄하게 미소지으며 상기된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 총 이름은 '스피드웨건'이에요. 당신처럼 용기 못내는 사람 처음이에요. 제가 시간을 몇 번이나 돌려야 했는지 아세요?" 
 아무말도 할 수 없다. 
 
 "그래요. 그런 표정이에요. 몇 번이나 시간을 돌리는건 정말 힘들지만, 자발적으로 여기에 사인하게 만든 뒤에 진실을 알려줘서 절망하게 하는거 그게 이 일에 오는 유일한 만족감이라구요."
 눈이... 감...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깼다. 내 눈 앞에는 처음보는 여자의 등이 보이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망할 놈, 자기 주민등록번호를 틀려?"

 씩씩대며 뭔가 탁탁 거리는 소리가, 손톱을 약간 기르는 여자들이 핸드폰을 할때 손톱과 액정과의 충돌로 내는 소리와 흡사한것 같다. 이 여자는 누구이고,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으며, 대체 내 핸드폰을 가지고 뭘 하는거지? 

 "108번째는 조금 특별하게 총에 맞았다고 써줄께."
 ???
 
 "내 사랑스러운 '스피드웨건'에 말이야. 깔깔깔"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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