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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소설 <88> (부제: 알 수 없는 부상)
게시물ID : art_18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날라가붕게
추천 : 1
조회수 : 81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11/02 17:49:20
1

의사 선생이 말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나는 속으로 울컥 했다.

"외상도 없고, 혈관도 딴딴하고, 혈기도 왕성할 나이인데..."

의사 선생은 말끝을 흐렸다. 그 말 속에는 약간의 동정이 묻어났다.

"불시에 발딱 발딱 거려서 당황할 청춘이란 말이지... 그런데 왜 죽어있는고?"

죽어있는 녀석은 나의 분신을 말하는 것이었다. 녀석은 꽤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혼수상태에 있는 환자마냥 아무리 두들겨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녀석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석 달 전 여자 친구와의 잠자리에서였다. 나는 식전 의식에서 여자 친구의 정성이 부족함을 탓했다. 그러나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일어나지 않는 나의 분신에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떨쳐내며 허허 웃었다.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봐."

여자 친구는 수긍하는 눈빛이었으나 내 스스로도 수긍할 수 없는 이유에 나는 겁이 났다. 다음도, 그 다음에도 일어나지 않는 분신에게 국문학과 출신인 여자 친구는 구지가를 불러주는 정성을 보였다.

거북아 거북아 고개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여자 친구의 정성어린 주술에도 나의 분신은 생기가 빠져버린 화석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 친구는 슬픔을 담아 말했다.

"오호, 통재라"

의사 선생은 차트를 끼적거리더니 서랍을 열어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젊은 녀석에게 비아그라를 처방할 수도 없으니, 다른 데를 소개시켜주지, 뛰어난 심리치료사야."

의사선생의 말을 끝으로 나는 진찰실을 나왔다. 초음파 검사비 육만원을 현금카드로 결재하고 나는 병원 밖으로 나왔다. 또 한 바퀴를 돌았구나. 비뇨기과는 심리치료사를 소개하고 심리치료사는 민간요법을 소개했다. 민간요법은 다시 비뇨기과를 소개했는데 이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만 같은 순서였다. 이 패턴을 세 번 돌고나니 나의 분신이 진정 화석이 된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여자 친구의 말을 되뇌었다.

"오호 통재라."

내가 듣기에도 슬픔이 넘쳐나는 한 마디였다.



2

「시청에 있는 cave 커피숍에서 보자」

학원에서 교사용 책상에 앉아 문자를 쓰고 전송을 눌렀다. 멍하니 눈만 껌뻑이는 사이에 석민이 형이 마우스를 뒤적거리며 물었다.

"태근 선생, 이번에 연수는 어쩔 거야?"
"뭘 어쩝니까? 가야죠."
"이건 뭐, 학원 선생들도 연수를 가야 한다는 건 어느 나라 법이야? 학원 주제에 원하는 자격증도 참 많아요. 도대체가 언제 놀라는 건지."

석민이 형은 인터넷 고스톱을 치며 한탄했다. 평일에 고스톱 칠 시간도 모자라는 판국에 교사 연수를 주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자못 억울한 모양이었다.

"구속 받기 싫어서 학교에서 나왔더니, 이젠 학원에서도 이래?"
"솔직히 말하면 짤리신 거죠."
"쉬벌, 맞을래?"

석민이 형은 똥을 먹으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파혼 이후에 화투에만 빠져 사느라 학교에서도 짤린 형의 인생에 측은해졌다. 측은하여 눈물이 다 나오려 한다.

"그렇게 먹으면 싸요."

아니나 다를까 서비스 피와 똥광과 쌍피는 석민이 형에게 돌아오지 않고 화투판에 주저앉았다. '인생이 뻑이야' 라는 효과음이 들려왔다.

"거봐요. 싸잖아."

석민이 형은 쥐었던 주먹으로 내 정수리를 때렸다. 오늘 이놈의 머리통은 남의 손에 잘도 놀아나는 것만 같다.

"내가 싸서 때리는 게 아니다. 네 놈의 주둥이가 화근이야."

맞는 순간에도 머릿속에서는 계산기가 돌았다. 월급 백이십 만원에 교사 연수비 십만 원을 빼면 백십 만원이다. 이놈의 학원은 정말 교사 실력을 외치는 건지, 아니면 원금 회수를 외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요즘에는 자기 계발이 필수야."

술 좋아하는 원장선생이 그 말을 했을 때, 알았던 자기계발의 의미조차 혼란스러웠었다.

"나 수업 들어갑니다. 사월 먹을 생각 말고 비광 버리세요."

나는 책을 들고 나왔다. 교실로 향하는 길에 '인생이 뻑이야'라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 양반이 기어코 사월을 먹고 싼 모양이다. 뻔히 못 먹을 것 버리는 게 그리도 어려운가? 불쌍한 양반...



3

수업이 끝나고 학원에서 나오는 길에 약속장소로 향했다. 다시 들른 커피숍은 평일이라서 그런지 한산했다. 한산한 커피숍이 습하고 어두워만 보였다. 약속 장소를 잘못 고른 건가? 어두운 조명 아래서 나는 홀로 앉아 있었다. 아무도 안 보는 동안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손을 좌우로 벌려 보기도 하고 다리도 벌려 앉아 보았으나 채워지지 못하는 넓은 공간만 의식하게 된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기다렸다.

"나 왔어"

한참을 멍하니 기다리는 사이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응,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그럭저럭"

현아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자리에 앉았다. 가슴이 반쯤 드러난 원피스 사이로 봉긋한 가슴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움찔거린다.

"일은 잘돼?"
"입에 풀칠은 하지."
"몸은?"
"우리의 호프는 아직 잠들어 있다."

현아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진다. 그래도 웃는다.

"구지가가 효과가 없었나 보네. 정성을 더 들여야 하나?"
"아서라, 그러다 정말 구워먹으면 깨어날 일이 전혀 없다."

나와 눈을 마주하기 위해 상체를 숙이는 모습에 나는 다시 움찔한다. 가슴골이 보인다. 갈색 원피스는 어두운 조명에 검게만 보였다. 검은 어둠 속에서 보이는 현아의 가슴은 갑자기 나타난 기적마냥 희고 탐스러웠다. 커피를 시키는 동안에 나는 현아의 가슴만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반쯤 넋이 나가서, 게다가 부끄럽게..."
"부끄럽기는..."

나는 피식 웃었다. 현아와의 잠자리를 생각했다. 첫 관계 때 민망하던 우리의 수줍음은 점차 사라졌다. 거듭되는 잠자리마다 현아의 몸뚱이는 출렁거리며 나를 몰아붙였다. 그게 부끄러움의 표현이었을까?

"이번에도 이유를 모르겠다네. 심리치료사의 명함만 얻어왔다."
"또?"

현아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진다.

"그래서 말인데..."

목이 타오르고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그 한마디는 갈라지는 목과 입술 사이로 쥐어짜듯 나왔다.

"우리 헤어지자."

현아는 한 동안 멍하니 있다가 되려 웃었다. 

"왜 또 그래? 내가 너랑 잠만 자려고 만나니? 그런 거 아니잖아?"

'그래'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나는 더 이상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점점 생각해야 하는 결혼 문제도, 날아가 버린 돈도, 무엇보다도 내가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이후로 점점 심해지는 현아의 가슴 파인 옷까지도... 그녀 또한 불안하고 다급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채워지기 위해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채울 수 없음을 알았고 그에 결정했다. 그래도 현아는 웃었다.

"남자들은 다 그러더라. 여자가 그 짓에 맛들이면 요부가 된다고."
"남자가 재구실 못하면 따신 밥 못 얻어먹는다는 소리도 있다."
"내가 따신 밥 챙겨 줄 테니까 걱정 마. 그 이야긴 그만 하자. 아참, 나 여기에 오는 도중에 있지..."

현아는 말을 돌리며 웃었다. 그 모습에 나는 고마움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말을 끊는다. 

"아니... 결국엔 너도 변할 거야."

내 말에 내가 놀라 앞이 검게 변한다. 격해지던 말 속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이 튀어나온다. 나중에는 나 홀로 있는 커피숍에서 부어오른 뺨만 느낄 뿐이다. 현아는 그렇게 떠났다. 3년의 시간이 그렇게 정리됐다. 첫 월급날을 생각한다. 통장에서 세금과 잡비가 빠져나가고 그려진 88만원이라는 숫자를 보며 현아는 깔깔 거리며 웃었었다.

"우리도 그 유명한 88만원 세대가 되는 거야?"
"요렇게 라도 모아서 880만 원짜리 단칸방에 너랑 나랑 살자. 아침저녁으로 자고 또 자서 열 명만 낳자."
"윽, 저질 흥부기질이야."

그 때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녀의 냄새가 떠오른다. 그녀 속에서의 아늑함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녀가 떠났다. 아마 돌아올 길이 전혀 없을 것이다. 흐르는 눈물에 피식 웃었다. 딱히 중얼거릴 말이 떠오르지 않는



4

어제 들어온 월급을 확인하러 은행에 들렸다. 약간의 비가 내린 덕분에 은행 안 인출기 앞은 습하고 허전했다. 나는 추운 손을 떨며 통장을 꺼내들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죄여왔다. 가슴이 답답하다. 한참을 망설이다 작심하고 통장을 기계에 넣었다. '지지지직' 거리는 소리가 빈 공간을 채웠다. 널찍한 공간에 그 소리는 너무 허전했다. 대충 머리로 계산한다. 병원비, 핸드폰비, 커피값, 연수비 등등 

'철컥'

통장이 나왔다. 망설이다 작심하고 들어서 읽었다. 대충 생각했던 것들이 빠져나갔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말했던 보험료가 벌써 빠져나가 있음에 치를 떨었다. 그래서 잔금은....
난 눈을 밑으로 훑어 내렸다. 그 순간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880,128원」

난 그 네 개의 동그라미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동그라미들은 나를 붙잡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네 개의 구멍들은 채우고 채워도 변화시킬 수 없는 우주의 법칙처럼 다시 돌아와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아득한 옛날의 저주처럼 보였다. 


「0000」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것들을 채우고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손으로 아랫도리를 쥐었다. 녀석은 더 오그라들어 백악기 정도의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3년이 지나도, 30년이 지나도 빠져 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예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우웩~"

입구녕에서 먹은 것들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현금 투입구에 쏟아냈다. 나는 주저앉아서 한참을 있었다. 현아와 살고 싶었던 방을 생각한다. 현아의 냄새를 생각한다. 현아의 아늑함을 생각한다. 현아의 눈을 생각한다. 현아의 따스한 말을 생각한다. 그러다 떠나 버렸음이 생각난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현아의 억양을 따라 말했다.

"오호, 통재라..."

아마도, 웃으며 한 번 더 돌아오고 나면... 그때 쯤 갈 길이 보일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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