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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신백일장]
게시물ID : readers_212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고기를묵자
추천 : 1
조회수 : 303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5/08/12 23: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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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의 유머의 소중하고 소중한 첫 게시글을 등신백일장에서 쓰게되어 크게 영광입니다.
등신백일장 2회에 참여할까말까 고민하다가 마감 며칠 안남기고 소심하게 참여해 봅니다.
이 글은 제가 제 오랜 친구인 그리고 지금 오유 어딘가에서 눈팅하고 있을지 모를 익명의 의미가 없다는 'P 계하'씨가 꾼 황당한 
SF판타지 꿈 내용을 소재로 작성한 SF 소설입니다.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삘로 써보려고 노력만 했습니다. 하지만 노력은 노력일 뿐이었고요...
쓴지 완전 오래된 글이지만 수줍수줍하게 올려봅니다. 그럼 오유님들 즐거운 밤 되세요.

-------------------홍보글이라고 쓰고 자기소개서라고 읽음-------------------------------------------------------

() HOPE

 스토푸리는 우주를 가로지르며 날고 있었다. 그의 개인 우주선인 ‘SPACE CAN'에서는 우주공화국의 최신 유행곡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스토푸리는 흥겹게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우주선 안을 가득 메우는 인기곡인 개념은 안드로메다로를 따라 부르며 스토푸리는 우주선 조작을 자동으로 돌렸다. 이제 곧 한 시간 후면 목작지에 도착할 예정이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한 번 더 고객에 관한 자료를 검토해보고 싶었다. 고객과 만나기 전 그에 관해 회사가 건네준 자료들을 확인해보는 것은 스토푸리의 오랜 습관 중 하나였다. 스토푸리는 다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고객의 프로파일을 읽었다.

스토푸리는 영원 사원으로 그가 일하는 회사는 우주 다목적 기업 () HOPE 이다. HOPE는 드넓은 우주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기업 중 하나로 일종의 보험회사이다. 드넓은 우주시대에서 어떤 사고를 어떻게 당할지 모르기에 보험가입은 필수다. HOPE의 인기보험 상품은 인생 바꿔주기였다. HOPE식으로 말하자면 운명의 전환 상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상품이야말로 HOPE를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슈퍼기업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이다. 스토푸리는 그 보험회사의 영업사원이었고 오늘도 불행한 고객의 인생을 수정하기 위해 의뢰인을 찾아가고 있었다. 스토푸리는 회사에서 그에게 넘겨준 고객의 신상명세 서류를 눈으로 훑어보았다. 열 페이지는 족히 넘을 듯 보이는 서류들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절로 아파왔다.

우주여행을 하는 시대에 아날로그적 자료들이라니, 기도 안 차서 원. 내 참나.”

높으신 분들의 생각은 알다가도 정말 모를 일이라고 그는 투덜거렸다. 종이파일의 두께가 그를 짜증스럽게 만든다. 이렇게 불필요한 수작업을 할 바에는 홀로그램 디스크 작업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3D로 구성된 홀로그램 하나와 음성메시지면 충분했다. 그런데 그걸 굳이 이렇게 사진과 문서화한 종이뭉치를 주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날로그 감성이라도 표현하고 싶은 모양일까?

아날로그 좋아하시네.”

다 개소리다. 스토푸리는 가볍게 이죽거리며 종이문서를 한 장 넘겼다. 이번 고객의 이름은 햄보칼이라고 했다. 스물여덟 살의 지구인이다.

지구는 사람이 살기 좋은 별이 아닌 모양이 틀림없어. 절대로.”

이번 달 들어 지구인만 벌써 세 번째였다. 변방의 외딴 별 주제에 툭하면 운명전환 신청 예약이 줄을 잇다니. 분명 척박한 환경의 살기 힘든 별이 틀림없다고 그는 확신했다.

시간은 어느덧 훌쩍 흘러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스토푸리는 읽고 있던 자료를 조종실 한구석으로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우주선의 운전을 자동에서 수동으로 다시 돌려 직접 운전을 시행했다.

우주공화국에서 지정한 행성보호법에 의거해 행성간의 공식행사가 아닌 개인의 행성방문은 은하계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다. 때문에 그와 고객의 만남은 항상 지정된 우주정거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구의 우주정거장은 달이었다. 스토푸리는 수동으로 돌린 우주선을 조종하며 정거장을 향해 날아갔다.

한때는 지구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들을 버리는 곳이었기에, 빈정거리기 좋아하는 일부 우주인들 사이에서 지구의 정거장은 달의 똥구멍이라고 불렸다. 지구의 정거장은 급조로 만들어진 건물이었기에 매립장 한가운데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정거장 주변을 떠다니는 오물들을 피해 날아다니는 일은 확실히 불쾌한 경험이었다. 이번 업무만 끝나면 지구 관할 구청에 이 오물 투성이의 정거장에 관해 제대로 탄원해야겠다. 굳게 마음먹으며 스토푸리는 정거장 안의 우주선 주차장 안으로 조심스레 우주선을 정차시켰다.

, 그러니까 햄보칼 씨? HOPE에서 파견 나온 스토푸리라고 합니다.”

주차 허가증을 끊고 정거장에 마련된 휴게실에 들어간 스토푸리는 당장 자신의 고객부터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휴게실 안에 사람은 다섯 사람 정도였다. 스토푸리는 곧바로 문서에서 보았던 얼굴을 찾을 수가 있었다.

....... 제가 햄보칼입니다. 당신이 스토푸리....... ?”

긴 곱슬머리 사이로 파리한 인상의 청년이 그의 인사에 답했다. 청년의 수심어린 이마 위로는 동그란 회색 보석이 박혀 음산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햄보칼은 보는 사람도 기운 빠지게 만드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운명전환을 신청한 이유는....... 735일 아홉시 뉴스를 보셨다면 아시리라 믿어요.”

모를 리가 있겠어. 아주 장안의 화제인 사건이었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스토푸리는 실로 유감스럽기 그지없다는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그건 정말 유감이었습니다. 참 힘드시겠습니다. 햄보칼 씨.”

스토푸리는 지극히 형식적이고 사무적인 말투로 햄보칼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눈앞의 햄보칼은 일전의 그 불행한 사건으로 인해 매스컴을 타버려 언론에 얼굴이 노출되었다.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햄보칼은 우주에서 손에 꼽히는 유명인사중 하나였다. 햄보칼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햄보칼은 우울과 절망으로 잘 버무려진 얼굴을 하고 물었다. 기대라고는 단 1%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제가 정말....... 운명을 바꿀 수가 있을까요? 저의 인생을 말이에요.”

불치병에 걸린 환자가 의사를 붙들고 회복가능성을 묻듯이 햄보칼은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스토푸리는 딱한 심정으로 햄보칼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지구인 청년은 정말로 불행해 보였다. 하긴 무리도 아니었다. 우주적 왕따라니. 그라면 진즉에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었으리라. 스토푸리는 생각했다.

우주적 왕따. 지극히 드물게 발생하는 현상으로 최근 들어 이슈가 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왕따라는 것은 따돌림을 당하는 존재를 뜻했다. 어떠한 원인으로 주변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되는 걸로 모자라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이다. ‘우주적 왕따라는 것은 일반적인 사례보다 훨씬 더 확장된 개념으로 온 우주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을 지칭했다.

여기서 모든 것들은 사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점이 더더욱 큰 문제였다. 문자 그대로 우주의 모든 것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다. 사물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리고 눈앞의 햄보칼이 그 우주적 왕따였다. 그는 혹시나 천장에 이상이 없는지 슬그머니 살펴보았다. 우주적 왕따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스토푸리는 계속해서 건물 천장을 흘끔거리며 일련의 사건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그 사건은 지난 735일에 발생했던 일로 당시 햄보칼은 목성의 주변을 돌며 헬륨가스를 채집하는 중이었다. 한참을 헬륨가스 채집에 집중하던 중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햄보칼은 헬륨가스 수집로봇을 서둘러 우주선 안으로 불러들인 다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워프기능을 작동시켜 시공간 도약을 하기 직전 그는 분명히 보았다고 했다. 목성의 중력에서 벗어나 그가 있던 자리를 덮치는 위성의 존재를 말이다. 간발의 차로 그는 위성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햄보칼은 목성이 자신을 공격했다고 주장했지만 정부는 그의 주장을 미친놈의 헛소리로 묵살했다. 하지만 목성의 위성이 제자리를 벗어난 이 어마어마한 사건은 곧바로 매스컴을 탔고, 그 자리에 있었던 햄보칼은 졸지에 유명인사가 됐다. 이제 온 우주인들이 그가 우주적 왕따임을 알게 되었고,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고 했다.

모두가 날 떠났어요. 지구 와서 알게 된 사람들 모두가 전부 다 날 멀리하고 외면해요. 나랑 있으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고요. 나랑 있으면 어떤 우주재해를 맞을지도 모른다면서 말이에요. 그래도 그건 이해할 수 있어요. 나라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다른 사람들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 말입니다.”

햄보칼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모두가 나를 당연하다는 듯이 괴롭혀요. 매스컴을 타기 전까지는 관심도 없던 사람들조차 이제는 그를 괴롭힌다고 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 이유 없이 돌을 던지고 도망가는 사람들, 그가 언제 죽을지 들으라는 듯 떠들며 돈 내기를 하는 사람들. 그 모든 사람들의 냉소적인 호기심이 그는 무섭고 두렵다고 말했다. 말을 마친 햄보칼은 탁자 위에 고개를 숙인 채 서럽게 훌쩍거렸다. 우주적 왕따현상의 발생원인은 현재까지 뚜렷하게 밝혀진 바는 없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그저 해당 피해자는 필연적으로 우주재해와 괴롭힘을 당하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고향별을 떠나 다른 별로 망명해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재수 없을 경우 시공간 도약 중 예상치 못한 사고로 죽을 수도 있었다. 햄보칼이 목성에서 당했던 사고가 가장 좋은 예였다.

정말로 목성이 위성을 날려서 그를 공격했을까. 그건 솔직히 비약이 너무 심하잖아. 미친 소리라고.’

스토푸리는 여전히 천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자자 진정하십시오. 햄보칼 씨가 겪은 일은 듣는 것만으로도 제가 다 가슴이 아플 지경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사셨을지 짐작이 가는군요. 하지만 이제 걱정 마십시오.”

그는 마음에도 없는 위로의 말을 던지며 바닥에 내려놨던 가방을 탁자 위로 들어올렸다. 그는 가방의 잠금 쇠를 리듬감 있게 풀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저희 HOPE에서 개발한 이 기계 하나면 앞으로는 모든 일이 만사형통 다 잘 풀리게 될 겁니다. 당신의 인생을 바꿔드리겠습니다.”

호언장담을 하는 그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햄보칼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심쩍은 기색이 역력했다. 스토푸리는 그런 햄보칼에게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호감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가방 속에서 사다리꼴 모양의 원통과 계약서류 파일을 꺼냈다. 그가 꺼낸 원통은 검은색 바탕에 은색 띠가 둘러져 있었고 위에는 빨간색 뚜껑이 달려있었다. 뚜껑을 열자 통 안에는 검은색으로 도색된 귀모양의 이어폰 한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토푸리는 그 이어폰을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스토푸리의 행동을 무심히 지켜보던 햄보칼의 눈이 이어폰의 귀 모양이 고정된다. 햄보칼은 놀란 숨을 들이키며 스토푸리와 이어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이, 그 그것이로군요. 카오스 이.......”

. 바로 카오스이어입니다. 당신의 운명을 바꿔줄 검은 귀. 저희 HOPE의 자랑이지요.”

카오스이어(Chaos Ear). HOPE의 창시자이자 위대한 기술 공학자였던 러블리가 발명한 우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계 중 하나였다. 얼핏 보면 한물 간 구식라디오처럼 생겼지만 그 성능은 라디오를 초월했다. 스토푸리는 기기의 모니터가 달린 부분을 눈앞의 지구청년 앞으로 돌렸다. 그는 작은 모니터 부분을 가리키며 기계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햄보칼 씨가 이어폰을 꽂으면 이 기계가 자동으로 작동을 시작합니다. 이어폰의 귀모양이 당신의 뇌에서 산출되는 기억의 알파력을 분석하여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해석된 기억을 영상화시키죠. 그럼 제가 그 출력되는 영상을 통해서 문제점을 찾아 수정합니다. 즉 쉽게 말해서......”

과거의 기억을 수정하는 거군요. 트라우마 제거의 일종인가요?”

햄보칼이 그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끼어든다. 절망이 가득했던 그의 눈에 일망의 희망이 깃드는 순간이었다. 그는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검은색 귀 한 쌍을 집어 들었다. 그는 귓불에 해당하는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정말 찾을 수 있을까요. 우주에서 내놓으라는 학자들도 우주적 왕따의 원인을 못 찾았는데. 혹시라도 발생 원인이 아예 없으면 어떡하죠.”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법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결코 없다. 창립자 러블리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카오스이어를 개발했다고 했다. 카오스이어는 사용자의 과거를 영상화하여 제 3자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진짜 성능은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기억을 영상화하는 기기는 이 넓은 우주에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 기술은 흔해빠져 식상할 정도로 많았다. 카오스이어는 사용자의 기억을 영상화시킨다. 그가 잊고 있거나 억지로 닫아둔 무의식의 기억까지도 카오스이어는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제 3자는 그 영상을 보고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가 있다. 기억을 건드려 조작하는 일이 가능했다. 기억이 조작된 사용자의 기억은 조작된 시점부터 전부 재조립 됐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은 그때부터 발생했다. 기억조작으로 재조립되는 것은 단순히 기억만이 아니었다. 사용자의 인생 자체가 뒤바뀌었다. 과거의 기억 하나만 건들임으로써 그의 현재 모습도 달라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미친 소리 같지만 전부 다 사실이었다. 나비효과. 그것이야말로 이 놀라운 기기의 진정한 능력이었다. 어떤 원리로 그런 성능을 발휘하는 지는 단순한 영업사원인 스토푸리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기기의 성능만은 그도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그 믿기지 않는 현상을 셀 수도 없이 직접 봐왔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그의 앞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다. 이름과 얼굴만 같고 전혀 다른 고객. 그 괴리감 앞에서는 그는 매번 같은 진리를 깨달았다. 혼돈에는 그 어떤 법칙도 존재할 수가 없다.

여전히 주저하는 햄보칼을 향해 스토푸리는 계약서류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그가 내민 서류 역시 우주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철제파일에 종이서류가 가득 끼워져 있다. 정말이지 회사의 방침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는 파일을 넘기며 햄보칼에게 계약사항을 보여주었다.

, 일단 당장 시작하자는 건 아닙니다. 망설여지는 점도 충분히 이해하구요. 일단 주요계약사항 세 가지만 우선 설명하지요. 나머지는 집에 가져가서 읽어보신 후 결정하시면 됩니다.”

스토푸리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레이저 펜을 꺼내들었다. 펜 끝의 빛을 노란색으로 고정한 그는 계약서의 첫 페이지에 밑줄 네 개를 찍찍 그었다. 그가 밑줄 친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다음의 사항은 반드시 준수해야 합니다.>

1. 보험 계약금 15,000칼라는 선불입니다. 할부, 후불, 분납 전부 금지입니다. 반드시 일시불로 지불해야 합니다. 계약금 15,000칼라는 반드시 우주화폐로 지급되어야 하며, 고객의 행성 화폐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2. 계약서를 작성하는 즉시 고객님의 개인정보는 HOPE의 투자증권, 부동산, 카드 등의 자사계열에 속하는 기업에 정보가 제공됩니다. 이 점 반드시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3. 카오스이어로 운명전환 프로그램이 작동을 시작하면 도중에 그만둘 수 없습니다. HOPE에서 파견된 사원의 지시에 반드시 따르시길 바랍니다. 만일 지시를 따르지 않아 발생하는 모든 사고들은 HOPE에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4. 기기의 작동이 완료되고 뒤바뀐 현재의 운명에 대한 불만은 접수되지 않습니다. HOPE에서는 고객의 바뀐 현재모습에 대하여 그 어떠한 책임도 일체지지 않습니다.

<위 모든 사항에 동의하시면 아래 동의 란에 HOPE에서 지급된 레이저 팬으로 서명하시기 바랍니다. 서명할시 색은 반드시 주황색으로 하셔야 합니다.>

레이저 펜이요?”

노랗게 밑줄 친 부분을 다 읽고 난 후 햄보칼이 고개를 들어 질문을 던진다. 스토푸리는 들고 있는 레이저 펜의 빛을 노랑에서 주황으로 바꾸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서명은 반드시 이 레이저 펜으로 받아야 해서요. , 그렇다고 당장 하라는 건 아닙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우물대는 햄보칼에게 스토푸리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는 레이저 펜을 빛을 끈 다음 다시 양복 안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그는 안주머니에서 다시 명함 한 장을 빼들어 햄보칼에게 내밀었다. 스토푸리는 자신의 명함과 계약서를 햄보칼에게 떠넘기다시피 안겨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는 조급함을 감추지 못하며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갑자기 서두르는 그의 초조한 등 뒤로 햄보칼의 얼떨떨한 시선이 느껴진다. 짐을 서둘러 다 정리한 스토푸리는 햄보칼에게 고개를 숙여 심각하게 속삭였다.

지금...... 금이 갔어요.”

?”

저기 오른쪽 천장 구석 보입니까...... 아까부터 조금씩 금이 가고 있습니다.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늦을지도 몰라요.”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훨씬 커진 천장의 균열을 가리키며 스토푸리는 다급함을 담아 말했다. 그의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와 가리키는 방향으로 보이는 균열에 햄보칼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는다. 균열은 이제 노골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라고 할 새도 없이 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빠른 종종걸음으로 휴게소를 빠져나왔다.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햄보칼의 뒷모습을 향해 스토푸리는 크게 외쳤다.

읽어보고 연락 꼭 주세요. 기다릴 겁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차장을 향해서 뛰어갔다. 그가 방금 튀어나온 휴게실 방향으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서두른 결과 간발의 차로 우주선에 탈 수 있었고 긴급대피 안내 메시지 사이로 간신히 탈출 할 수가 있었다. 그는 시공간 도약 엔진을 발동시켜 화성으로 향했다. 화성 근처에 우주선을 멈춘 그는 서둘러 라디오를 틀어 오늘의 뉴스를 확인했다. 틀자마자 홀로그램 영상과 함께 오늘의 주요누스가 흘러나온다. 지구의 달 정거장이 붕괴했다는 소식이었다. 붕괴된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건물건설 초기의 부실공사가 원인이지 않느냐며 조심스레 추정하는 뉴스앵커의 말을 마지막으로 라디오를 껐다. 정거장 건물이 붕괴되는 순간의 녹화장면이 픽 허공에서 꺼진다. 그는 조종석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좁은 우주선 내부의 천장을 올려보며 스토푸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목성의 위성을 던졌다는 이야기. 어쩌면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햄보칼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닷새 후였다. 합성 우주식으로 한 끼를 때운 스토푸리는 조종석에 앉아 낮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벌써 오 일째, 아무런 연락도 오고 있지 않았다. 화성 근처에 우주선을 정착시킨 채 그는 햄보칼의 연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고 스토푸리는 기다리기를 단념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돌아가고 싶었지만 본사에서 지정한 의무대기일 7일은 필수적으로 채워야만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태양계에 남아 의무대기일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며 돌아갈 준비를 했다. 스토푸리는 지루함과 싸우며 본사로 돌아간 후의 일을 걱정했다. 그의 깐깐한 상사가 이번 일에 대해 뭐라고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낮잠이 든 그는 꿈속에서 상사에게 크게 혼나는 악몽에 시달렸다. 스토푸리가 현실성 높은 가위에 눌려 괴로워하고 있을 때였다. 36개월 할부로 산 핸드폰이 미니로봇으로 변신해 그를 깨우기 시작했다. 콧구멍과 입술을 마구 잡아당기며 들볶는 로봇의 행동에 그는 억지로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스토푸리는 안 떠지는 두 눈을 비비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졸음에 반쯤 취한 눈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순식간에 떠졌다. 조종석에 비스듬히 누워 전화를 받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그의 의뢰인 햄보칼이다. 그는 정자세로 앉아 전화를 받았다. 떨림이 가득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다소 후회 섞인 목소리로 햄보칼은 말했다.

저 결심했습니다. 계약하겠어요.”

계약서에 안내되어 있던 계좌번호로 입금도 완료했다고 그는 단숨에 말했다. 스토푸리는 재빠릴 본사로 입금내역을 확인했다. 그의 말대로 계약금 15,000칼라가 입금됐음이 확인됐다. 스토푸리는 조종석 화면을 끄며 온화하게 말했다.

, 햄보칼 씨. 확인했습니다. 그럼 이제 약속장소를 어디로 정하냐고 중요한데 어디 좋은데 아십니까?”

달 정거장은 지난번 붕괴사고로 이용 할 수 없는 상태이기에 그들은 화성 슬럼가 안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계속되는 인구증가로 지구는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더는 증가하는 인류를 수용할 수 없었던 지구연합회 EUN에서는 주변 행성들로의 강제이민 정책을 시행했었다. 가장 먼저 이민 보낸 곳은 화성이었다. 지구에서 낯선 별로 강제로 쫓겨난 불쌍한 빈민들은 살기 위해 행성을 개척하고 빈민촌을 형성했다. 그 빈민촌이 지금까지 이어져 지금은 행성 자체가 거대 슬럼가를 구축하고 있었다. 우주시대에도 별 하나가 통째로 슬럼별을 형성하는 일은 분명 드문 일이었다....... 스토푸리는 어두운 실내의 카페 한 구석에 앉아 생각했다. 처음 와보는 별이었지만 정말 기분 나쁜 행성이었다. 괜한 으스스함에 옷깃을 여미며 그는 햄보칼이 속히 오기만을 기다렸다. 다시 십 분의 시간이 흐르고 빨간색 주발을 밀치며 햄보칼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와본 화성의 분위기에 어색한 그와 달리 눈앞의 햄보칼은 익숙해 보였다. 그 이유를 조심스레 묻자 햄보칼은 편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전 사실 화성에서 자랐어요. 지구에서 산지는 겨우 2년 지났어요.”

원래가 화성출신이었단 말인가. 그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이제야 납득된다. 스토푸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들어 식탁 위에 올려놨다.

그랬었습니까. 그럼 시작해볼까요. , 혹시 계약서 가져오셨습니까?”

형식적인 절차이지만 사인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의 물음에 햄보칼은 긴장된 눈빛으로 품속에서 서류를 꺼내 내려놨다. 스토푸리는 그런 햄보칼에게 회사에서 지급한 레이저 펜을 건네주었다. 팬의 레이저 빛을 주황색으로 고정해 건네주며 스토푸리는 말했다.

이름만 써도 됩니다. 어차피 입금도 완료하셨고.......”

햄보칼이 그의 말에 희미하게 미소를 던진다. 서명을 확인하고 스토푸리는 가방을 열어 기계를 꺼내들었다. 삼류 구식 라디오처럼 생긴 기기를 작동시키는 척하며 스토푸리는 생각했다. 햄보칼은 지구에서 산 지는 2년에 불과하다고 했다. 지구 거주권을 얻으려면 꽤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이전 고객에게서 들은 기억이 난다. 화성 슬럼별 출신의 그가 어디서 그런 돈을 구했는지 궁금하다. 계약금 15,000칼라도 은하계 공용화폐기준으로 작은 돈이 아니었다. 그는 기기의 뚜껑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햄보칼을 흘긋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그의 젊은 고객은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범벅이 된 눈을 하며 초조하게 앉아있었다. 범죄를 저지를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범죄? 스토푸리는 고개를 흔들며 머릿속에 든 생각을 털어냈다. 빈민가 출신이라고 들은 순간 머릿속에 든 편견 섞인 의문이라니 속물적이다. 그는 기기의 뚜껑을 열어 그 속에 들어있던 이어폰을 건네주며 웃었다. 그는 지극히 영업적이고 사무적인 미소를 입가에 띠운 채 다정하게 말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아프거나 전기적 쇼크가 있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햄보칼 씨는 그냥 끼고만 있으면 됩니다.”

검은색으로 도색된 귀 모양의 이어폰을 들고 햄보칼은 잠시 망설이는 듯이 보였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는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폰을 든 그의 손이 희미하게 떨린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이어폰을 귀에 얼른 꽂았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기계의 진동음이 그의 주변을 가득 메운다. 가벼운 진동과 함께 반투명한 푸른빛의 장막이 햄보칼의 몸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양 귀를 누르고 있던 그의 손이 스르륵 풀린다. 의자 위로 힘없이 떨어지는 두 팔에 의식을 잃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스토푸리는 재빨리 가방 안에서 다른 헤드셋을 꺼내 들어 머리에 썼다. 헤드셋 위쪽으로는 지팡이 모양의 안테나 한 쌍이 달려 있었다. 지직, 지직 백색잡음과 함께 카오스이어에 달린 조그만 화면 위로 불이 켜진다.

화면은 스토푸리 쪽으로 영상을 쏘았다. 그 영상은 점차 커지는가 싶더니, 이내 식탁만 한 홀로그램 영상 하나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식탁 위로 가볍게 떠 있는 커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반투명 영상 속에는 지금보다 좀 더 어려 보이는 햄보칼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앉아있었다. 기억 속의 그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앉아있는 장소는 현재 그들이 앉아있는 장소와 어딘가 분위기가 비슷했다. 침체된 어두운 분위기의 장소. 이때의 그는 아직 화성에서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스토푸리는 고개를 살짝 숙여 기억의 년도를 확인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삼 년 전의 기억이었다. 스토푸리는 헤드셋의 볼륨을 한 칸 더 올렸다. 기억을 보고 원인을 파악하는 일은 신중을 기하는 일이었다. 나비 날개 짓에 태풍이 온다. 그 사실을 명심하며 그는 정신을 화상 속으로 집중했다. 홀로그램 화상속의 기억은 계속해서 시간이 흘러갔다. 햄보칼은 이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그가 주문한 갈색의 걸쭉한 음료는 바짝 말라 굳어졌다. 햄보칼은 초조함과 설렘이 깃든 시선을 창문 밖으로 향했다. 창문 너머의 하늘은 어둡고 칙칙했다. 태양빛이 인공구름에 가려져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햄보칼은 그 회색 장막에 가려진 하늘을 올려보며 지구에 관하여 들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지구에서 보는 하늘은 시시각각 푸른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한다고 들었다. 화성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로써는 시간마다 색이 변하는 하늘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의 이마에 박힌 보석이 초록색으로 깜박였다. 햄보칼은 이마 위의 보석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메시지를 수신 받았다.

도착했어. 곧 올라갈게.

메시지를 확인한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는 행복감으로 가득한 눈을 하고 이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향해 눈을 돌렸다. 잠시 후 계단 위로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갈색의 파마머리와 하얀 가운을 위에 걸친 젊은 여성이었다. 경쾌한 그녀의 분위기는 화성의 변두카페에 이질감을 형성했다. 동그란 보석이 이마에 박힌 햄보칼과 달리 그녀의 이마는 깨끗했다. 스토푸리는 그의 고객이 눈앞의 여성에게 호감을 가졌음을 곧 깨달았다.

스토푸리는 서둘러 화면 위의 녹색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머리 위로 간단한 신원 정보가 나타났다. 그는 재빨리 그녀의 이름을 확인했다. ‘이 연사. 물리학자, 사망사망이란 두 글씨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붉게 깜박거린다. 죽었단 말인가. 하지만 햄보칼의 기억 속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생기에 넘쳐 있었다. 스토푸리는 의아해 하며 다시 관찰을 재개했다. 이 연사가 창가에 앉은 햄보칼을 알아보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그 순간 화면이 꺼졌다. 작동 중 갑자기 화면이 꺼지다니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깜짝 놀란 햄보칼은 카오스이어를 들어 이상이 있는지 확인했다. 기기는 아무런 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의 햄보칼은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였다. 까맣게 변했던 화면이 갑자기 켜진다. 다시 켜진 화상 속에서 그들은 더 이상 카페에 앉아있지 않았다. 둘은 팔짱을 낀 채 화성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다시 화면이 꺼진다. 화면이 꺼지기 직전 이연사의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지구에 눈을 보러가자. 분명 네 마음에 들 거야.”

그리고 다시 화면이 꺼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스토푸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정말 기기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봤다. 고장 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기기가 다시 작동한다. 햄보칼은 이제 푸른 하늘 아래에 서 있었다. 스토푸리는 의아해 하며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지구다. 스토푸리는 화면 속의 푸른 하늘을 보며 직감적으로 생각했다. 멋진 색이었다. 햄보칼은 그 하늘 아래 멍하니 서 있었다. 잘 정돈된 아스팔트 거리 한 가운데서 그는 허공에 시선을 던지며 서 있었다. 도시에 무수히 들어선 높은 건물들의 그런 그를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햄보칼의 어깨를 치며 무심히 지나쳤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어딘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그저 도심 한복판에 서 있을 뿐이었다.

왜 저러지?”

어딘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스토푸리는 햄보칼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기억 속의 그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안에 떠는 그의 눈동자랑 순간 마주친다. 햄보칼은 엄마를 잃고 길을 헤매는 아이처럼 갈피를 못 잡고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힐조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서글픈 그의 눈에 돌연 눈물이 고였다. 햄보칼은 그 눈물을 닦으며 어째서 자신이 슬픈 이유를 몰랐다. 이유도 모르는 채 그는 한없이 슬퍼했다. 길을 지나가던 아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이의 얼굴은 한없이 무표정했다.

아이가 가던 길을 멈췄다. 아이가 허리를 숙여 땅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워 올렸다. 돌멩이였다. 아이가 햄보칼을 향해 돌연 돌을 던졌다. 아이가 던진 돌이 그의 이마를 맞췄다. 그것을 시작으로 길을 가던 사람들이 동시에 발을 멈췄다. 마치 희극 영화에서 보는 장면처럼 그들이 발을 멈춘 채 일제히 햄보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적의에 찬 눈동자. 겁에 질린 햄보칼은 그대로 뒤돌아 달아났다. 요 근래 들어 자꾸만 일어나는 이 괴악한 현상을 그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그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다. 괴롭힘은 점점 더 심해져 이제는 인간 외의 것들까지 그를 들볶았다. 햄보칼은 달리고 달려 한적한 교외로 도망쳤다.

드문드문 교외로 산책을 나온 사람들 사이로 그는 계속해서 달렸다. 길 위를 뛰놀던 동네 개들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쫓아왔다. 스토푸리는 영상을 지켜보며 햄보칼에게 일어나는 저 현상이 우주적 왕따현상임을 깨달았다. 기억속의 그는 이미 그 증후군의 피해자였다. 스토푸리는 그의 과거를 앞으로 한 칸만 더 돌렸다. 갑자기 중단된 화성에서의 기억과 기기가 멋대로 펼친 이 기억 사이에 무언가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었음을 그는 직감했다. 그는 자신의 직감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며 햄보칼의 기억을 이 년 전으로 돌렸다. 재판소였다. 그는 피고석에 앉아 세상에서 다시없을 정도의 불행한 표정을 하고서 자신에게서 내려질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판사는 근엄한 얼굴을 하고 그를 내려다보며 판결문을 읊었다.

피고 햄보칼은 화성인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중죄를 저질렀다. ...그 터무니없는 행위로 우주공화국의 대형 프로젝트 오리발은 프로젝트의 중심인물을 잃고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는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태양계 행성 전체를 비롯하여 나아가서는 우주공화국의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가 없다. 따라서 본 판사는 피고 햄보칼에게 판결 내리니.......”

오리발? 처음 들어보는 프로젝트였다. 그렇게 큰 프로젝트라면 뉴스에 나와야 했는데, 스토푸리는 오리발에 대한 뉴스를 본적도 그런 프로젝트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다. 대체 그게 뭐지? 관중석에서 햄보칼을 향한 증오에 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할 수 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햄보칼을 찢어 죽이고 싶은 듯이 보였다. 판사가 성난 관중들을 진정시키며 판결을 끝냈다. 판결의 내용에 햄보칼이 고개를 쳐들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그의 항의는 기각됐고 햄보칼은 관중들의 야유를 들으며 재판소 밖으로 끌려 나갔다. 다시 화면이 꺼졌다가 다른 화면으로 바뀐다. 햄보칼은 이제 어둠속에 눕혀져 있었다. 수술대를 연상시키는 침대 위에 사지가 묶인 상태로 그는 거대한 검은색의 귀가 장식된 헤드셋을 쓰고 누워있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머리맡에 구식 라디오처럼 보이는 기기가 붉은색의 홀로그램 영상을 토해내며 음산한 빛을 발산했다. 카오스이어였다. 그 기기를 본 스토푸리의 얼굴이 충격으로 차갑게 굳어진다. 그가 가진 기기도 좀 더 컸지만 영상속의 저 기기는 틀림없는 카오스이어였다. 카오스이어가 외부 행성에 그것도 국가기관에 반입되고 있었다니 전혀 몰랐다. 그는 고개를 바짝 숙여 영상 속의 기기를 노려보았다. 스토푸리가 받은 판결의 형벌은 강제 운명 전환 형이었다. 스토푸리는 이제 그 형벌이 어떤 형벌인지 얼추 짐작할 수가 있었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이 기기의 노란색 단추를 눌렀다. 그가 가진 기기에는 없는 단추였다. 햄보칼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그 사이 사이에 끼워진 이 연사에 대한 기억들이 삭제됐다. 스토푸리가 소유한 기기와 달리 그 거대한 기기는 제거 기능까지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연사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우고 장갑 낀 하얀 손은 기억이 지워진 공백 사이에 가짜 기억을 심었다. 그리고는 기기의 빨간 버튼을 눌렀다. 스토푸리 그도 아는 기능이었다. 운명 전환이 실행됐다.

.......햄보칼은 이제 공원 벤치 위에 혼자 앉아있었다. 벤치에 앉아있는 그의 머리 위로 첫눈이 한 송이 떨어져 내렸다. 지구에 와서 처음 보는 첫눈이었다. 그는 감탄한 마음으로 벤치에 앉아있었다. 화성에서 심심풀이로 산 복권이 당첨됐다. 그는 그 믿기지 않는 행운으로 지구거주권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꿈에 그리던 지구에서 살게 되었다. 지구에서 꿈같은 생활을 한지도 어느덧 일 년이 지났다. 눈이 떨어져 내리는 광경은 퍽 아름다웠다. 계절이 존재하지 않는 화성에서는 꿈꿔 본적이 없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가슴 한구석이 왜 이렇게 쓸쓸한 걸까? 햄보칼은 가슴 벅찬 감동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같이 지구의 첫눈을 보러가자.

머리 한구석에 되살아나는 여자의 목소리.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하지만 더 생각해볼 새도 없이 목소리는 그의 머릿속에서 사그라졌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때 길을 가던 고양이 한 마리가 갑자기 달려들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이 최초의 시작이었다....... 더 참지 못하고 스토푸리는 기기의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멈춘다. 스토푸리는 쓰고 있던 헤드셋을 내던지듯 벗어버렸다. 그는 자신이 본 광경이 믿기지 않아 괴로움에 숨을 헐떡였다.

모든 일이 그렇게 시작됐다. 스토푸리는 의자에 쓰러져 앉아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그의 불행은 지워진 기억에 대해 떠올리려 할 때 발생했다. 일종의 부작용이었다. 그가 카오스 이오를 통해 강제로 주입받은 기억을 무의식중에 거부하고 진짜 기억을 되살리려고 하면 그에 상응하는 반작용이 반드시 일어났다. 마치 그가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가로막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었다. 지금까지 본 장면들만으로 유추해 보건데 시간이 흐를수록 반동 역시 점점 커지고 있음이 틀림없어 보였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고양이나 개들에게 쫓길 뿐이었다. 햄보칼은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일에 대해 아무런 의구심도 품지 못했다. 지나가던 고양이가 할퀴고 들개가 문다. 그가 기대어 선 벽은 이유 없이 무너졌다. 가는 곳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가 단편적으로 남은 지워진 기억의 흔적을 되살릴 때마다 반동은 계속해서 커져갔다.

마침내 무생물에게까지 반작용현상이 미치기 시작했다. 사건사고가 그를 따라다니며 끊이지 않았다. 스토푸리는 이제 목성이 위성으로 자신을 공격했다는 햄보칼의 말을 믿을 수가 있었다. 일전의 그 갑작스러웠던 정거장 붕괴사고도 그 때문에 발생했음이 틀림없다. 확실하다. 이 모든 일들이 전부 카오스이어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스토푸리는 문득 자신의 눈앞에 놓인 기계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는 카오스이어와 의식을 잃고 앉아있는 햄보칼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찌할지 고민했다. 이것은 그의 이해수준을 훨씬 넘는 일이었다.

실례합니다.”

그가 잠시 고민 속으로 빨려들어 있을 때였다. 검은 슈트를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들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들 중 일부는 의식을 잃은 햄보칼을 부축하여 밖으로 사라졌고 일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항의하려고 일어서는 스토푸리를 제지하며 그들은 억지로 그를 자리에 도로 앉혔다. 올백의 은발머리에 선글라스를 쓴 그들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뒤늦게 나타나 스토푸리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방금 전까지 햄보칼이 귀에 끼고 있던 검은색 귀모양의 이어폰을 손으로 들며 말했다.

또 시작이군. 이걸로 벌써 세 번째야. 정말이지. 지치지도 않는 새끼라니까......”

그의 회색 눈동자가 선글라스 안에서 차갑게 웃음 짓는다. 남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검은색 이어폰을 스토푸리의 귀에 억지로 꽂아주었다. 곧 벌어질 사태를 예감한 스토푸리는 헛된 저항을 시도했지만 금방 의식을 잃고 말았다. 의식을 잃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재가동을 시작한 카오스이어였다.......

스토푸리는 우주를 가로지르며 날고 있었다. 그의 개인 우주선인 ‘CAN SPACE'에서는 우주공화국의 최신 유행곡인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니 개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토푸리는 흥겹게 그 노래를 따라라 부르며 우주선 조작을 자동으로 돌렸다. 이제 곧 한 시간 후면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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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세월호를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

왜 아직도 인양을 못하고 있는지 참 궁금하고요... 주변에서 세금운운하며 반대하는 뉘앙스 이야기 들으면 그냥 가슴만 아프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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