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후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식은땀은 온몸을 타고 흘렀다. 도대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 앞에서 자신을 험악하게 노려보고 있는 오하사가 도대체 어떤 대답을 원하고 있는지 그저 답답하고 불안할 뿐이었다.
"야, 김종후! 니 이름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꼬박꼬박 나불대고 지랄이야?"
"……"
"야, 니 이름이 그렇게 대단해? 어?"
"아, 아닙니다."
"근데 임마!"
그 때 뒤에서 구원자가 나타났다.
"야, 오정운! 그만해라, 응?"
그러자 정운의 험악했던 표정이 급격하게 풀리며 비굴한 웃음까지 띤다.
"예? 아니 이 새끼가 자꾸 띨방하게 굴어서 말입니다."
"넌 옛날에 더 했잖아!"
"예? 에이~ 또 왜 그러십니까 이하사님."
오정운 하사의 표정이 훨씬 더 누그러지며 이하사의 눈치를 슬슬 본다. 언뜻 봐도 쩔쩔 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하사는 런닝 차림으로 침상에 반쯤 누워 영화 잡지를 보고 있었다. 아주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바로 BNQ 최고참의 모습, 그것이다. 이하사가 흥미로운 눈초리로 종후를 슬쩍 본다.
"넌 나이가 어떻게 되냐?"
"예! 스물 두 살입니다."
"그래? 근데 여긴 연병장이 아니거든? 좀 만 목소리를 낮춰라. 응?"
"예! 알겠습니다."
"야, 새꺄, 이하사님이 목소리 낮추라고 하시잖아!"
옆에서 또다시 오하사가 눈을 부릅뜨며 끼여든다. 그러자 이하사가 정말 성난 표정으로 오하사를 쳐다본다. 그러자 단번에 기가 죽어 버리는 오하사. 슬슬 눈치를 살피며 실없이 웃고만 있는데……
"야, 정운이. 너 좀 나가라. 응?"
"예?"
조금 놀라는 오하사. 그러나 여전히 굳은 표정의 이하사.
"내 말을 못 알아듣겠냐? 내가 금방 나이지리아어로 얘기하더냐?"
"예? 아, 아닙니다."
오하사는 얼굴 가득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즉시 밖으로 나간다. 그러자 이하사가 다시 종후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야, 김종후. 지금부턴 편히 쉬어라. 응? 과자 먹을래?"
이하사가 자신의 관물함을 열자 그곳엔 갖가지 종류의 과자들이 즐비했다. 그 중 하나를 꺼내어서 종후의 앞으로 건네는 이하사.
"자 먹어. 편히 앉아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종후는 단호히 거절했다. 조금 황당해지는 이하사.
"야, 정말 괜찮다니까. 내가 이래놓고 나중에 너 뒤통수 칠까봐 그러냐? 안 그럴 테니 걱정 마. 너 보니까 옛날 내 생각나서 그래."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싸늘한 냉기가 돌만큼 흐트러짐이 없는 종후.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이하사. 그만 포기를 해버리곤 과자 봉지를 뜯는다.
"그래, 그럼 계속 서 있거라. 어쩜 그렇게 나 옛날이랑 똑같냐 그래. 그때 박중사님 심정이 이랬구나." 이하사는 과자하나를 입에 넣으며 다시 영화 잡지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종후를 바라본다.
"근데, 너 내가 누군 지는 아니?"
"예!"
"그래? 누군데?"
"이, 영, 민 하사님 이십니다!"
훗,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경직된 종후의 얼굴을 바라보는 영민.
이영민.
새벽.
BNQ 2호실. 문득 잠이 깬 영민은 슬그머니 일어났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다. 모두들 지친 얼굴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영민은 이내 담배와 라이터를 챙기곤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찰칵…… 담배에 불이 붙는다. 영민은 깊이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더니 잠시 후 길게 내뿜었다. 편안했다. 주위는 캄캄했으나 아늑했다. 영민은 오늘 전입신고를 마치고 BNQ 의 새 일원이 된 김종후 하사를 잠깐 떠 올려 본다. 그리고는 이내 머리를 젓는다. 담뱃불이 어둠 속에서 반짝 반짝거린다. 영민은 어느 순간 눈을 지그시 감고는 정신을 집중시킨다. 그의 모든 감각이 열린다. 그리고는 사방의 모든 기운을 감지한다. 잠시후 눈을 뜨는 영민. 꽁초를 발로 밟아 끄고는 새로운 담배를 꺼내 문다. 그리곤 나직히 중얼댄다.
"거의 없어졌군."
불을 붙이곤 주위를 둘러본다.
"귀기(鬼氣)……"
연기가 어둠 속을 부유하다가 결국 사라져 간다. 영민은 아예 옆에 있던 매트리스 위에 들어 눕는다.
´음...... 정말 편안하다 BNQ 4호실. 전하사님이 이래서 이곳을 자주 찾았었구나´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온다.
삐이이이익……
문이 조금씩 열리는 소리다. 영민은 기겁을 하며 담배를 껐다.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대로 엎드린 채 입구를 주시한다. 문이 살며시 열리고 있다. 식은땀이 영민의 등줄기를 훑고 내려간다.
´뭐, 뭐야……´
예전에 김대명 하사의 미영과 사투를 벌인 이 후, 영민이 이처럼 놀랬던 적은 없었다.
삐이이이익……
이윽고 4호실의 문이 반쯤 열린다. 그리고는 그 틈새로 검은 그림자가 불쑥 머리를 내민다. 슬쩍 쌓인 매트리스 뒤로 몸을 숨기는 영민. 침입자는 잠시 우물쭈물 하다가 급기야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곤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연다.
"누…… 누구…… 계…… 십니까?"
영민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채고는 그만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침입자는 김종후 하사였다. 영민은 살며시 매트리스 뒤에서 나온다. 그리고는 최대한 부드럽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김종후."
그러나 기절할 듯 놀라며 주위를 두리번대는 김종후 하사. 다행히 비명은 지르지 않는다.
"누…… 누구십니까?"
"나야, 이하사. 이영민."
BNQ 건물 옆 사이드 외부 계단. 3월 말 이었지만 밤 공기는 찼다. 영민이 김종후 하사에게 담배를 건넨다. 황급히 손을 내젓는 김종후 하사. 그러나 영민은 어서 집으라고 무언의 재촉을 한다. 마침내 김종후 하사는 담배를 받아 물고 영민은 불까지 붙여준다. 김종후 하사는 어쩔 줄 몰라하며 진땀을 흘린다. 영민도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연기를 길게 내 뿜으면서 영민이 입을 연다.
"영외거주 2개월 남겨두고 너한테 들켰구나. 멍청하게 문을 안 잠그다니……"
김종후 하사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는 들이마신 연기를 내뱉지도 못하고, 곁눈질로 영민의 반응만 살피고 있었다. 그러고 있다가는 연기에 얹혀서 병이라도 날 것만 같다. 영민은 가볍게 미소를 띄우며 김종후 하사를 바라보았다.
"모른 척 해 줄 거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종후 하사는 제발 믿어 달라는 듯 경직된 표정으로 눈을 치켜 뜬다. 영민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한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담배연기가 바람결에 길게 늘어지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잠시 후 뭔가를 생각해 낸 듯 영민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야, 김종후. 너 무서운 얘기 좋아하냐?"
"……"
영민은 손을 올려 BNQ 4호실을 가리킨다.
"너, 저기에 얽힌 이야기 아니?"
"모…… 모르겠습니다."
"그래?"
김종후 하사의 표정이 워낙에 굳어 있어,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인지 예전의 자신처럼 알면서도 모른 척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영민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저곳엔 귀신들이 살고 있었지. 불과 1년 7개월 전만 해도 말야……"
김종후 하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하지만 눈빛에는 호기심이 담겨 있다.
"믿을 수 없지? 하지만 정말이야."
영민은 신참의 어깨를 툭 치며, 이 곳에서 일어났던 무시무시한 귀신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제 작년 여름에 일어났던 일이야. 그러니까 내가 이 부대로 막 전입을 왔을 무렵이었지. 음……"
영민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미세하게 밤 공기를 진동시켰고, 김종후 하사는 잔뜩 긴장한 채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 찬바람이 다시 한번 그들이 서 있는 사이드 계단 쪽으로 분다. BNQ 3층 건물 전체가 잠이든 듯 어둡고 조용하다. 부대전체가 그러하다. 밤의 어둠에 흠뻑 취해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공군부대. 부대 곳곳에 파수꾼처럼 드문드문 서 있는 외등만이 창백하게 깨어있다. 그 위로 펼쳐진 밤하늘엔 씻은 듯 깨끗한 별들이 말갛게 빛나는 얼굴로 총총히 늘어서서 신기한 듯 부대를 내려다보고 있다.
- E N D - ============================================================================================= 모두들 재밌게 읽으셨나요 ?
한때 이 소설을 처음접하고 한큐에 모조리 읽어버렸던 기억이 나네요 -, 근 4년전에 나온 소설인데 , 몇년이 지난 지금 다시봐도 정말 명작이네요 . 수정하면서도 다시 읽었는데 . 역시나 재밌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