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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헌 | 오승환의 아름다운 양보? 이건 아니다
게시물ID : baseball_145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옳은말만한다
추천 : 2
조회수 : 40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11/04 12:17:00

http://sports.news.nate.com/view/20111104n06101?mid=s1001

3일 오전까지만 해도, 삼성 마무리 오승환(29)은 가장 유력한 최우수선수(MVP) 후보 중 하나였다. 야구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투수 4관왕 윤석민(25)과 세이브 1위 오승환의 치열한 2파전을 예상했다. 두 선수 모두 충분히 MVP를 수상할 만한 성적을 남겼고, 자신이 최우수선수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있었다. 투표 당일인 7일 어떤 결과가 나올지 미리 예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매치업이었다.

하지만 이날 오전 삼성 구단이 돌린 보도자료 하나로 이 모든 것은 없던 일이 됐다. 발표에 따르면 "오승환이 MVP 경쟁에서 물러나고 팀 동료인 최형우를 지지하기로 했다". 보도에 따르면 오승환은 "나는 한국시리즈 MVP를 받았으니 후배를 위해 정규시즌 MVP 경쟁을 양보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사상 초유의 MVP '후보 단일화'가 전격 성사된 것이다.

서울시장 선거 결과에 깊은 감명이라도 받은 것일까. 그렇지만 오승환은 안철수가 아니며, 최형우는 박원순이 아니다(윤석민이 나경원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무엇보다 MVP 투표는 선거가 아니다. Most Valuable Player, 말 그대로 가장 '가치있는' 선수를 객관적인 근거에 의거해서 선정하는 게 MVP 투표다. 정치적인 안배나 분위기 등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일단 표면적으로는 선수가 보여준 실력과 기록이 MVP의 주요 선정 기준이 된다.

오승환이 최형우를 민다고 오승환의 세이브 갯수가 최형우의 홈런 갯수로 바뀌는 게 아니다. 오승환을 찍기로 작정했던 기자가, 아름다운 양보에 마음이 '밀어서 잠금해제'되어 최형우를 찍게 되는 것도 아니다. 시상식 전날 오승환이 최형우에 편지 한 통을 보낸다고 최형우의 표가 늘어날 것도 아니다. 만에 하나 그처럼 드러난 가치(Value) 외의 요소가 투표에 영향을 끼쳐 결과가 달라진다면, 그건 MVP 투표의 본래 의의를 훼손하는 것이고 MVP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일 것이다.

돌부처 아니랄까봐 '무소유'를 선언한 오승환으로 인해 다른 경쟁자들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윤석민의 경우 MVP 무혈 입성이 거의 확실해졌다. 하지만 받아도 찝찝한 MVP 수상이다. 분명 일각에서는 '오승환 사퇴 덕분에 받은 MVP'라며 폄하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윤석민 본인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말이다.

최형우도 마찬가지. 만에 하나 '단일후보' 최형우가 서울시장... 아니, MVP에 뽑히더라도 '만들어낸 MVP'라는 평가가 따라다니게 될 것이다. 뽑히지 못했을 경우에는 선배가 양보까지 했는데도 떨어진 격이 되어 몹시 초라해지게 된다. 특히 윤석민과의 표 차이가 크면 클수록 입장이 더 난처해질 것이다. 최형우 역시 한 시즌 동안 최선을 다해서 타자 중에 가장 뛰어난 기록을 내고서도, 자신의 가치(Value)를 당당하게 평가받을 기회를 잃어버리게 됐다.

그리고 오승환이 시즌 중에 했던 말이 있다. 그는 "48세이브 신기록을 달성하면 정규시즌 MVP에 진심으로 도전하고 싶다"면서 "내가 만약 MVP가 되면 어린 선수들이 처음부터 불펜투수로 뛰는 것에 거부감이 줄어들 것 같다"고 포부를 밝혔다. 비록 48세이브 달성에 실패하긴 했지만, 만약 MVP에 도전해서 수상했다면 최초의 전업 마무리 MVP로 야구사에 남았을 것이다. 불펜에서 고생하는 다른 투수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되는 것은 물론, 현재 프로야구에서 불펜이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는 좋은 잣대가 되었을지 모른다.

"선발 17승과 마무리 47세이브 중에 어느 쪽이 더 가치있는 선수인가?"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 아닌가? 투표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야구팬들과 언론에서 다양한 근거를 갖고 풍성한 논쟁이 벌어졌을 거다. 하지만 단일화로 그럴 가능성은 사라졌다. 사상 최초의 '정규시즌-한국시리즈 MVP 동시 수상'의 가능성도 없어졌다. 활발하게 쏟아지던 야구 담론도 멈췄다. 7일 열릴 시상식까지 기다리는 나흘간이 참 재미가 없게 됐다. 오승환 때문에 결과가 뻔해지는 일은, 삼성이 이기는 경기 9회만으로 족한데 말이다. 무엇보다 이번 해프닝으로 인해, 앞으로 각종 시상식 때마다 온갖 사퇴와 단일화로 상의 본래 의미가 퇴색하지 말라는 법이 없게 됐다.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이참에 확실히 교통정리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후배를 아끼고 사랑하는 오승환의 '선의'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MVP-신인왕-한국시리즈 MVP를 모두 가져가려는 삼성의 욕심이 아니냐"는 세간의 얘기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장안의 화제라는 나꼼수 식으로 말하자면 '그 눈을 봐라.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미담처럼 보이는 오승환의 양보로 인해 올해 MVP 투표가 매우 우스꽝스럽게 된 것은 분명하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너무도 완벽했던 오승환의 2011 시즌에 유일한 오점이 생겼다.

부연. 만일 한국에도 사이영상처럼 최고 투수를 뽑는 상이 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오승환이 한결 편한 마음으로 윤석민과의 최고 투수 대결에 나설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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