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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들의 영웅" 살라딘(6)
게시물ID : history_213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10
조회수 : 1023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1/07/19 14:24:15
1.아말릭 1세의 4차 이집트 원정과 시르쿠와 살라딘의 3차 이집트 원정을 묘사한 지도입니다. 이 전쟁의 결

과 이집트는 장기 왕조의 손에 넘어갔고, 훗날 살라딘이 독립하여 새 왕조를 창건하는 기반이 됩니다.

2.당시 구호 기사단의 모습을 그린 그림. 아말릭 1세는 잦은 원정으로 나라 사정이 어려워지자 이들의 도움

으로 4차 이집트 원정을 준비했습니다.

3.예루살렘의 왕 아말릭 1세와 동로마 황제 마누엘 1세의 조카 마리아 콤네나와의 결혼을 묘사한 그림. 아말

릭 1세는 이때의 결혼덕택에 4차 이집트 원정에서 동로마 함대의 도움까지 얻을수 있었습니다.

1167년의 이집트를 둘러싼 공방전 역시 무승부로 끝이 났습니다. 이것은 아말릭 1세에게는 너무나 뼈아픈 것

이었습니다. 무려 세번이나 이집트로 출병했으나 땅 한뼘 얻지 못하고 아까운 병사들의 목숨만 희생한 상황

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하림에서의 대패 이후 십자군 왕국들은 점점 거세지는 누레딘의 공세 앞에 바람앞의 

촛불 신세로 전락한 상태였죠.. 한명의 병사도 아쉬운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의 해외 원정은 무리한 일처럼 

여겨졌지만 아말릭 1세가 이집트 정복을 포기하지 못하는 두가지 큰 이유가 존재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왕국과 다른 십자군 국가들의 존속을 위해서는 이집트가 누레딘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군 국가들이 60 여년의 세월동안 적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슬림들이 수

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어 끊임없이 다투어 온 덕분이었습니다. 당시의 상황도 시리아는 수니파 누레딘의 지배

를 받고 있는 반면 이집트는 시아파 왕조인 파티마조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죠. 이 둘간의 갈등관계를 잘 이

용하여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 십자군 국가들의 생존 전략이었는데 파티마조가 쇠퇴하여 허수아비 왕조가 되

고 누레딘이 이집트 영토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서 십자군 국가가 기대온 두 세력간의 팽팽한 균형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바로 십자군 국가들의 맹주 격인 예루살렘 왕국이 이집트 정복을 꿈꾸게 한 큰 

이유중 하나였죠.누레딘이 이집트를 집어삼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십자군 국가들에겐 미래란 없는 것과 같았

으니까요. 두번째 이유는 가신들의 끝없는 탐욕을 채워줄 화수분 같은 지역이 바로 이집트였기 때문입니다.

1167년의 전쟁이 끝나고 철수할 때 사와르는 아말릭 1세에게 10만 디나르라는 엄청난 액수의 연공금을 바쳤

는데, 이것을 본 아말릭의 가신들이 눈이 뒤집힌 것이죠. 사실 아말릭은 3차 원정에서 돌아왔을때 앞으로 해

외 원정을 자제하고 국내에서 무슬림 군대의 침입을 막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이집트

의 풍요로움을 직접 두 눈으로 본 주위의 가신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말릭 1세는 주변의

끊임없는 압력에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당장 원정에 동원할 병사들의 수가 크게 부족한 상황이었

기에 아말릭 1세는 당시 각지에서 형성되어 위세를 떨치던 기사단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수 밖에 없었는데 

이때 아말릭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 바로 구호 기사단이었습니다.아말릭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당

시 지중해 세계의 강국이었던 동로마 제국의 힘마저 빌리기로 했습니다. 사실 이전 원정에서도 동로마에게 

약간의 지원을 받기도 했었지만 이번 원정은 예루살렘 왕국의 사활을 걸고 벌이는 것이니만큼 전폭적인 지원

을 얻어낼 필요가 있었죠. 그래서 아말릭은 자신이 아예 동로마 황실의 사위가 되기로 했습니다. 당시 아말

릭은 애 둘 딸린 홀아비 신세였거든요.(첫 아내인 아네스와는 즉위 당시에 헤어졌습니다.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쫓아내 버렸죠.)그래서 당시 동로마 황제였던 마누엘 1세의 조카였던 마리아 콤네나가 아말

릭에게 시집을 오게 되었고, 이후 동로마는 아말릭이 원정을 시작하자 함대를 파견하여 이집트 해안의 항구

들을 공격하기도 했죠. 어쨌든 원정을 위한 지원군들이 갖추어지고 누레딘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힘을 집중

하느라 미처 다른 곳에 관심들 두지 못하는 틈을 타서 아말릭의 4차 이집트 원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원정 초

반부에서는 확실히 아말릭 쪽이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1차 원정에서 참패했던 빌베이스를 함락시켰고, 그

때의 분풀이로 무슬림, 기독교도 가리지 않는 무자비한 학살이 벌어졌습니다.(이때 학살당한 기독교도들은 

콥트 기독교인들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집트 주민들은 음험한 성품의 사와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때의 빌베이스 학살로 인해 아말릭에게도 큰 증오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후 이집트의 주인이 될 

살라딘에게는 매우 좋은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이집트의 상황을 전해들은 누레딘은 다시금 시르쿠와 살라딘

을 불러들여 이집트 원정군을 지휘할 대권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이때 살라딘은 의외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신은 군사적으로 재능이 없어 짐이 될 뿐이니 원정군의 부사령관은 다른 사람이 맡는 것이 좋겠다며 그 특

유의 정중한 태도로 사양한 것입니다. 하지만 누레딘과 시르쿠는 단호한 태도로 살라딘이야 말로 적임자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원정군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력한 어조로 명령했습니다. 결국 살라딘은 억지로(!)이집트

로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살라딘이 이집트와 시리아의 군주가 되는 첫걸음이 되리라는 것을 예상했

던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글이 너무 짧네요. 다음에는 좀 길게 쓰기위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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