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내게는 꽤나 시원했으므로 이 게시판을 찾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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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재였습니다.
나이가 어느덧 서른이니 문득 이런 말을 꺼낸들 비웃음만 살 일 입니다.
그러나 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초등학교에서는 등수를 헤아리는 데 어떤 의미도 없었습니다.
3학년부터 어떤 시험에서든 단 한 문제도 틀리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1등은 나 였습니다.
내 부모님은 평범한 분들입니다. 그 세대의 표준 인간상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아들이 평균치를 월등히 상회하는 결과를 내고 있다는건 굉장한 자부심이었습니다.
부모님은 행복했고, 어린 아이에게 부모의 기분은 절대적 영향이었고, 따라서 나도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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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 때부터 교육지청에서 주관하는 영재원에 다녔습니다.
"여기 있는 학생들은 어차피 스카이는 무난하잖아요? 서울대냐 아니냐가 문제겠지만. 그래서 영재원이.."
영재원의 학부모 오리엔테이션에서 방정맞은 교사가 지껄인 몇 마디는, 부모님의 단순한 자부심을 욕망으로 바꿔놓았습니다.
동그라미만 가득한 시험지에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어머니. 늘어가는 문제지. 학교, 종합학원, 분과학원.
밤 9시에 하교하는 초등학생. 아들 하나 믿고 일한다는 아버지.
3년 사이 책더미가 날 짓누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들이 날 따돌리고 괴롭히기 시작한 그 쓰라림.
그런데도 내 손으로는 절대 그들을 놓을 수 없는 강박. 두통이 무척 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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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성적은 최상위권이었지만, 누군가와 다투기 시작했다는 점이 달라졌습니다.
1등을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불안했습니다. 부모님도 불안하셨겠죠.
그 불안이 어디에서 왔는지, 당시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 2등, 3등을 한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안절부절인 부모님은 언제나 내 시야에 있었습니다.
이쯤부터 내 세상은 이상한 쪽으로 더욱 확장되었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 큰아버지, 삼촌..
기여 없는 큰 기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작은 내 면전에서 실망하는 표정들.
큰어머니, 숙모, 형들, 누나들.. 시기 가득한 중의적 문장들, 비아냥 어린 시선들.
그리고 그들에게 이상하리만큼 휘둘리는 아버지, 어머니.
더러운 학부모 커뮤니티와 쓰레기 같은 교사 일당도 있었지만,
그 표정을 직접 마주한 적은 없으니 내 기억엔 어머니의 전언 정도로 남았을 뿐입니다.
16살. 학원에서 돌아오던 밤 11시. 노점에서 튀김과 떡볶이, 어묵을 잔뜩 먹고 집에 돌아와 소리죽여 전부 게워냈습니다.
그 역설적 해방감. 나는 이후로 거의 매일 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 다행히 종합 1등으로 추정되는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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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날 괴롭히던 친구들을 애써 붙잡던 손을 놓고, 조금 다른 친구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조지 오웰, 스티븐 킹, 톨킨, 패트릭 오브라이언.. 서로 별 연관없는 이들이 내 새로운 친구들이었습니다.
소설에 탐닉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둔 세상에서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 어머니가 전부 내다 팔아버리기 전까지는, 담임교사가 사서선생님께 내 도서관 이용을 자제시키도록 강제하기 전까지도.
다시 내게 교과서와 문제지만 잔뜩 안겨놓았을 때, 그제야 반항심이 제법 생겼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책상에 앉혀둬도, 나는 금세 노트를 붙들고 글을 쓰고 조악한 만화를 그려댔습니다.
딱히 밖으로 돌거나, 컴퓨터를 하지도 않으니 나를 감시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학원도 빠짐없이 다니고, 책상 앞에도 잘 앉아 있었으니까요.
발각되어 혼이 나고 드물게 체벌이 가해져도 다만 그 뿐이었습니다.
자연스레 성적이 떨어졌고, 우려를 가장한 비웃음이 내 귀에도 들려왔습니다. 어머니는 꽤 크게 들렸겠죠. 직접 들었겠죠.
어린 나는 그제야, 우는 어머니가 가엾어 모의고사 문제지나마 뒤적이기 시작했습니다.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건 오답노트만드는 정도니까요.
그렇게 임시방편으로 꾸역꾸역 고3까지 버텼습니다. 따라서 이 때는 '나'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고3 여름에 역류성 식도염이 가장 악화되었었다는 것만 기억납니다. -매일 게워냈거든요.
아, 그리고 다리가 자꾸 저리고 아파 병원에 갔더니 허리디스크라고 했던 것도 고3 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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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능에서 상위 2%를 기록했습니다. 언어, 외국어 만점. 실점은 다른 부문에서 고루 나눠가졌었습니다.
어머니의 평은 "그렇게 말 안듣더니 결국 어릴 때 벌어둔 걸로만 간신히 시험 봤구나. 속 시원하니?" 였고,
아버지의 평은 "대학가서 열심히 공부하면 되니 어디든 법대로 가라. 고시로 만회하면 된다." 였습니다.
서울대는 커녕 연고대도 어렵게 됐다는 어머니 말에 할머니는 한숨 쉬다 결국 우셨고, 큰아버지는 왜 그랬느냐며 재수를 권했습니다.
나머지는 기억도 잘 안납니다. 그냥 어느 상황에서나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 뿐이었으니까요.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으니 아버지 뜻대로 성적맞는 법대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허리디스크는 더욱 심해져 결국 한 학기가 끝나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후에는 눈가리기 용으로 사법시험에 꾸준히 응시만 했을 뿐, 응당 어떤 성과도 없었습니다. 그저 시간만 버려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즈음 깨달았는데.. 속독이 강제되어 왔던 내게는 큰 결함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읽든 신속히 독파하는 버릇이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습니다.
무작정 소설을 읽어대던 17살까지는 그래도 남아있던 감성적 이해력은 완전히 사라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척 우울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우울은 다른 기억들과 더해져 매일 나를 힘들게 했습니다.
-'강제속독'은 지금도 큰 곤란 중 하나입니다. 글을 기계적으로 읽어내 지루한 활자로 만들어놓는 버릇이 마치 강압의 잔재처럼 느껴져 무척 슬픕니다.
그렇게 나이가 들었고 이제는 어떤 경쟁에도 뜻이 없었던 나는, 대기업 공채정보 사이에 껴있던 어느 중견기업의 작은 채용정보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 선택엔 경제적 독립 외엔 다른 무엇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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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서야 자유가 됐습니다. 모든 굴레에서 벗어났습니다.
마지막까지 혹시나-(고시라도 붙는다면-) 하던 이들의 복합적 시선은 평범한 회사원이 된 내게서 떠나 모두 다른 곳으로 돌려졌습니다.
대학에 진학한 뒤에는 자유일 수 있지 않았느냐, 반문하실 수 있겠지만
어릴 적부터 어떤 세상에 속박되어 있던 이가 그 '어떤'에서 벗어나려면, 생각보다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제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덕에, 새로운 내 세상을 만들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정황없이 평범하게 출근해 직책상 위에서부터 아래로 차근차근 내려오며 퇴사를 알렸습니다.
당황하는 반응에도, 무던한 반응에도, 유난스런 반응에도 미소 띈 얼굴로 조용히 답했습니다. 송별회는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 모든 업무를 끝마쳤습니다. 평소처럼 일어섰지만, 모두의 시선을 받은 탓에 사라지듯 퇴근했습니다.
그동안 숙식 외엔 전혀 쓰지 않고 모아둔 알량한 자본으로.. 구상해온 작은 사업을 준비할겁니다. 위태위태하겠죠?
(취미로는 계속 해왔지만) 글을 본격적으로 써볼 생각입니다. 그림도 그릴거예요. 꾸준히 하면 언젠가는 성과도 낼 수 있을겁니다. 무척 어렵겠죠? ㅋㅋ
그래도 괜찮습니다. 만만히 봐서가 아닙니다. 정말 어려운 일들이겠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 그동안 참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오롯한 내 세상에 앉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