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이란 용어는 1980년 12월에 있었고, 서울대 운동권 사건인 이른바 ‘무림 사건’, 1981년 5월의 ‘학림 사건’ 등 ‘림’자 돌림에 맞춰 부산지역의 ‘림’자 사건, 이른바 ‘부림 사건’이 된 것이다. 앞서 발생한 공안 조작 사건 ‘무림’과 ‘학림’의 ‘림’자도 사실상 1960년대 ‘동백림’ 사건에서 빌려온 말이다. 조작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부림’은 노무현이 6월 항쟁 등 민주화 운동과 인연을 맺게 한 최초의 사건이다.
‘부림 사건’은 군사반란과 내란으로 집권한 5공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집권 초기 통치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 탄압에 들어간 시기에 발생한 부산지역 사상 최대의 용공조작 사건이다.
당시 부산지역 대학생 및 대학 출신 활동가 등 모두 22명의 청년이 불온서적을 읽고 계엄령 하에서 불법 모임을 가졌다며,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계엄법과 집시법, 법인 은닉과 도피 등의 혐의로 구속 처벌한 사건이다.
‘부림 사건’이 일어나기 전 부산지역의 민주화 운동은 1970년대 말 당시 지역의 양심적 인사들의 좋은 책을 구매해 읽고, 토론하는 모임인 양서(良書)판매이용협동조합(회장 이흥록 변호사)이 모태가 된다.
이어서 각 부문별로 YMCA(기독교청년회), 중부교회(최성묵 목사), 남부교회, 국제사면위원회 부산지부(이하 엠네스티, 지부장 김광일 변호사), 가톨릭정의구현사제단(송기인 신부) 등이 민주화의 요새로 자라나 1979년 10월 부마 항쟁을 일으킨다.
항쟁이 끝난 뒤 부산시경찰국은 항쟁의 배후세력으로 김광일 변호사를 비롯한 양서조합 인맥과 부산대생을 조사하던 도중 10·26 박정희 암살 사건이 일어나 관련자들을 ‘울며 겨자 먹기’로 석방한다.
당시 일주일 동안 고문을 당했던 엠네스티 부산지부장 김광일 변호사는 “살아있는 박정희 때문에 들어갔지만 죽은 박정희 덕분에 살아 나왔다”며 “죽다 살아났다”고 고백했다. 김 변호사는 훗날 김영삼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거물이 된다.
부림은 예비검속 사건
부마 항쟁의 다음해인 1981년 9월 유신의 적자, 어쩌면 유신보다 더 한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예비 검속의 필요성에 의해 부산지역에서 ‘운동가의 싹이 보이던’ 청년운동가를 구속시킨 것이 바로 ‘부림 사건’이다.
이렇게 구속된 청년들은 1983년 12월 전원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고, 이들은 부산지역 민주화 운동세력의 ‘권위 있는 선배’로 성장해 1987년 6월 항쟁의 주역이 된다. 5공 시절 부산지역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었던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이하 부민협) 등 1984년부터 시작된 재야, 인권 노동운동 단체들의 설립과 활동,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6월 항쟁의 혁혁한 성과는 ‘부림 사건’ 인물들의 ‘대 활약’이란 것이 문재인 변호사의 지적이다.
노무현 변호사와 당시 ‘부림 사건’에서 변호사와 피의자로 인연을 맺은 뒤 지금까지 계속된 인맥은 지난 4월 말까지 민주시민공원 관장을 맡았던 김재규 관장, 부림 3차 구속자 부산대 76학번 이호철씨, 서울농대 75학번 설동일씨, 당시 피비린내 나는 고문으로 노 변호사를 만났던 송병곤씨, 아우성 구성애씨의 남편 송세경씨 등이다. 또 마지막으로 잡혔던 탈영 군인 김영은 소설 『완전한 만남』의 작가 김하기씨다.
당시 ‘학생 운동의 실제 자금줄’ 김광일 변호사는 “부림 사건의 변호사를 맡진 않았지만 아우성의 구성애씨 등은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며 당시 어린 자식을 데리고 시국사건 구속자 가족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개척해 놓았다”며 “이듬해 벌어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 구속자 가족들에게 투쟁 방법(?)을 전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노변’ 민사소송 승률 90%
노무현 변호사의 ‘최초의 동업자’인 문재인 변호사는 당시 노무현과의 만남을 이렇게 설명했다. 문 변호사는 노무현 변호사가 잠시 서울 종로에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낼 때를 빼곤 동고동락한 사람이다. 문 변호사는 노무현 변호사를 ‘노변’이라고 부른다. 문 변호사뿐 아니라 부산지역 재야 인사들의 공통된 호칭이 ‘노변’이다. 다음은 문 변호사의 이야기다.
“1980년대 초반은 변호사 업계에 동업자제도 자체가 거의 없었다. ‘노변’과 나는 실제 변호사 업무가 많아서, 필요에 의해 동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와 나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나는 서울에서 학생운동을 한 경희대 출신이다. 판사 임관이 될 줄 알았던 나는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임용이 거부됐고, ‘노변’의 경우 동업하기로 했던 사람이 판사로 임용돼 우연히 동업자 관계로 만난 것이다.
당시 ‘노변’은 부산상고 출신 때문인지 세무 회계 쪽으로 ‘잘 나갔다.’ 실제로 ‘노변’은 부산일보 사장을 지낸 김지태씨가 대표로 있던 (주)삼화나, 조선 견직 등 부산의 대표 향토기업의 상속세 등 1백억 원대 이상의 사건을 맡아 승승장구했다. 승률 90% 이상이었다. 이런 높은 승소율은 당시 사무장이 소송서류의 대부분을 작성하는 관례를 깨고, 자기 이름으로 제출되는 소장은 자신이 직접 작성하는 성실성과 일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참고로 문 변호사는 지금도 ‘노변’과 법무법인 ‘부산’을 같이 운영 중이고,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추천으로 부산시장 출마 권유를 받기도 했다.
자칭 ‘돈 잘 벌던 변호사’ 노무현 변호사가 ‘부림 사건’의 변론를 맡게 된 과정과 일화를 ‘부림 사건’으로 구속됐던 소설가 김하기씨의 『6월 항쟁』과 문재인 변호사와 김광일 변호사 인터뷰, 관련 자료 등을 통해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노무현은 부산지역 민주화 운동사에 많은 일화를 남겼지만 적어도 그가 ‘부림 사건’을 수임하기 전, 30대 후반까지는 평온하게 살아온 ‘성공한 변호사’였다.
주로 민사사건 중 대규모 세금상속 사건 등을 수임해 재산을 형성한 그는 부산상고 동창회 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기득권층에 속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우연히 부산에서의 최대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 사건’을 맡게 되었다.
유신시대부터 부산지역의 ‘원조 인권변호사’로 활약했던 김광일 변호사가 이 사건을 맡는 게 당연했으나, 그가 이 사건과 음·양으로 직접 연결돼 있다며 공안당국이 협박하면서 기소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와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
“당신이 변론을 맡을 경우 지금까지 ‘부림 사건’의 자금원이나 사실상 두목으로 드러난 이상 형사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공안당국의 협박을 들은 김광일 변호사는 다른 사람을 물색했다. 결국 김 변호사는 평소에 친분이 있고, 공안당국이 전혀 흠잡을 데 없는 노무현 변호사를 추천했다.
노무현은 얼떨결에 이 사건을 맡았다. 노무현은 구속자들을 만난 뒤 충격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배운 법으로는 48시간 안에 구속영장이 안 떨어지면 피의자를 석방하게 되어 있으나, 송병곤은 구속영장 없이 60일을 대공분실에 감금당해 있었다. 가족들은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된 자식을 찾으려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다 두 달만에 간신히 소재를 알아냈으나 면회조차 안 되었다.
“집에서 연락조차 못했던 그 학생을 내가 처음 접견했을 때 그는 경찰의 치료를 받아 고문으로 인한 상처의 흔적을 거의 지운 후라고 했다. 한창 피어나야 할 젊은이의 그 처참한 모습이란…. 눈앞이 캄캄해졌다. 세상에 이런 일이….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는 그 모습에 기가 막혔다. 분노로 인해 머리 속이 헝클어지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노무현이 『여보, 나 좀 도와줘』에 쓴 자기 고백이다. 피의자 접견 과정에서 충격을 받은 노무현은 법정에서 또 한 차례 놀라운 경험을 한다. 워낙 사건 관련자가 많아 공판은 새벽 1시가 넘도록 진행됐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법정에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었다.
‘부림 사건’은 아직도 진행중
‘부림 사건’은 노무현을 ‘돈 잘 버는 변호사’에서 ‘운동하는 변호사’로 변화시켰다. 어쩌면 ‘부림 사건’이 노무현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만드는 데 가장 공헌을 했는지 모른다.
“나는 그때 그들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읽다 붙잡혀온 그 책들을 읽길 권했다. 바쁜데다 경황이 없어 책이 잘 읽히질 않았다. 나 또한 짧은 식견으로 토론을 하며 오히려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그땐 잘 이해도 못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들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사에 대해서도 차츰 눈을 뜨게 되었다. 훗날 그들이 석방되어 나올 때쯤에는 나도 꽤 많은 책을 읽고 있었다.” (노무현의 『여보, 나 좀 도와줘』 중에서)
1990년 월간 『말』 3월호에 실린 의식화된 노무현의 변론 모습이 실려 있다. 그가 재판정에서 변론을 하던 중 “알리하고 포먼하고 권투시합을 하는데 김일성이 알리 편을 들었을 때 피고인도 알리 편을 들었다면 그것도 이적행위냐”고 따져 묻자 당시 최병국 검사(현 한나라당 국회의원)는 “북괴를 찬양하는 발언을 자제해 주십시요”라고 소리쳐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노무현은 박찬종 대타
‘부림 사건’이 아물지도 않은 1982년 3월 18일 부산 도심 한가운데서 ‘봉홧불’이 솟아오른다. 다름 아닌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른바 ‘부미방 사건’. 이 사건은 1980년대 반미자주화 투쟁에 획을 긋는 사건이 된다.
‘부미방 사건’의 변론인 선정 과정에서 노무현은 ‘부산 민주화 운동의 대부’ 송기인 신부를 만난다. 부산지역의 1970년대 유신반대 투쟁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민주화 운동의 버팀목은 송기인 신부, 김광일 변호사, 최성묵 목사로 대표된다. 송 신부는 노무현과의 처음 인연을 이렇게 설명한다.
“부미방 사건을 변론하기 위해 이돈명 변호사를 비롯해 모두 8명이 서울에서 내려와야 하지만 당시 부산의 이흥록 변호사가 찾아와 박찬종 변호사가 유신헌법에 관여하는 등 별로 (색깔이) 선명하지 않다며 신부님이 이야기해 빼달라고 했지. (동업자인) 자기들끼리는 이야기하기가 좀 그렇다면서. 그렇게 뺀 자리에 노무현이 들어간 거지. 한마디로 박찬종 대타였지, 뭐.”
현실에 ‘눈을 뜬’ 노무현 변호사는 1984년 공해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1985년 5월 3일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이하 부민협, 회장 송기인 신부)에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등 부산지역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당시 부민협 창립 기념 강사는 다름 아닌 현 『월간 조선』 조갑제 편집장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월간 조선』 기자였다. 부산 YMCA 강당에서 열기로 한 이날 기념 강연은 3백여 명의 경찰과 기관원의 제지로 사실상 무산됐고, 경찰은 강사인 조씨를 근처 식당에 주최 측도 모르게 연금했다.
경찰에 강제 연금된 조갑제
조갑제 편집장과 부산 민주화 진영의 인연은 『국제신문』 기자였을 당시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거목 김광일 변호사의 소개로 엠네스티 부산지부 회원으로 가입한 것이 계기가 된다.
그가 김광일 변호사의 평전 『참 멋진 놈 하나 만났더라』에 기고한 글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속했던 사회단체가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부산지부였다”며 “『국제신문』 기자로 재직중에 회사의 지시를 받지 않고, 병가를 낸 뒤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하러 갔다가 회사 취재진과 합류하는 바람에 해임됐다”고 밝혀 눈길을 끈다.
하여간 회사 몰래 광주항쟁을 취재하다가 해직되고, 민주화 운동 진영 초청으로 부산에 갔다가 경찰에 강제 연금당한 『월간 조선』 보수논객 조갑제의 색다른 모습이다.
1986년 9월 12일 노무현 변호사는 부산 남부경찰서 김종관 수사과장과 김기성 수사계장을 권리행사 방해 혐의로 부산시경찰국에 고소한다. 혐의는 경찰이 당시 강도 상해 혐의로 수감중인 양아무씨를 수사하면서 주먹과 몽둥이로 때리는 등 피의자를 구타하고, 물 고문을 자행했다는 사실을 알아보기 위한 노 변호사의 접견권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당시 노무현과 문재인 변호사는 9월 4일부터 8일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고문 피해자가 피의자의 접견을 위해 경찰서를 찾지만 ‘법을 지켜야 하는 경찰’에 가로막힌다. 어렵사리 얻은 접견 결과 피의자 양씨는 모진 구타로 고막이 터진 것 같고, 물 고문도 당한 것으로 진술했다.
노무현, 경찰을 고소하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부산지방변호사회와 회원들에게 “내가 당한 수모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벅차고, 개인적인 문제로 그칠 일이 아니다”며 모두 3쪽 분량의 건의서를 보낸다. 당시 노무현은 접견 과정에서 당한 수모를 하나하나 자세하게 나열한 뒤, “경찰 간부의 태도는 본인 개인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변호사 제도에 대한 도전이자 부인이라고 생각한다”며 “변호사회가 나서서 문제를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문제는 1986년 10월 부산지방변호사회(회장 정윤조 변호사)가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앞으로 서신을 보내자 검찰은 “사법 경찰관리를 지휘 감독하는 검찰의 입장에서 그런 물의가 빚어진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사과 의사와 함께 “검사실에서 접견하는 방법을 적극 활용해달라”고 제안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렇게 문제가 해결되자 노무현은 같은 해 11월 29일 두 경찰관의 고소를 취하한다. 노무현 변호사의 ‘한 성깔’과 조직 장악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경찰, 노무현 구속영장 청구
충격적인 ‘부림 사건’을 통해 ‘새롭게 변화’한 노무현은 1987년 6월 항쟁 당시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이하 부산국본)의 집행 책임자의 ‘수장’ 상임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부산 민주화 운동의 큰 기둥’으로 성장한다. 당시 상임집행위원회의 상임집행위원장은 실무 책임을 지며 회의를 주관하는 등 발로 뛰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였다.
학생운동권 출신 활동가도 아닌 현직 변호사가 실무 부서의 집행책임자가 되는 일은 지금이나 당시 상황이나 특이한 경우이다. 당시 부산국본에서 상임집행위원으로 참가한 문재인 변호사는 ‘노변’과 자신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노변’을 따라가지 못하는 점은 흔히 말하는 먹물, 지식인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행동의 한계를 설정하고, 선을 긋는 점이다. 변호사니까 단체에 참여하더라도 재정적인 지원 등 2선이나 바람막이를 하다가 일 터지면 변론을 하는 것으로 자기 역할을 규정한다. 몸으로 부대끼는 것은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스스로 규정하는데, ‘노변’은 그런 것이 없다.
이것을 단점이라고 평가한다면 아주 속물적인 견해다. 부산국본 당시 나도 상임집행위원이었지만 가두연설을 한다든지, 경찰과 직접 몸을 맞대고 투쟁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변’은 흔쾌하게 집행위원장을 맡고, 연설하고, 거리를 돌며 행동하고 투쟁했다.”
이러한 노무현 후보에게 처음 구속영장이 청구된다. 계기는 1987년 2월 7일 부산시 서구 아미동에서 태어난 박종철 열사의 추도집회 때문이었다. 부산이 고향인 박종철 열사의 추도집회는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시발점이었다. 부산의 2·7 시위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무너져가는 전두환 정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김하기씨는 『6월 항쟁』에서 “부산과 광주에서 2·7 집회의 열기가 서울을 압도한 것은, 김영삼과 김대중, 양 김의 지역연고가 부산과 광주이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오지만,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며 ‘부산과 광주는 그리 멀지 않은 기간 전에 군사독재 정권과 전면전을 벌인 광주 항쟁과 부마 항쟁의 경험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문재인 변호사가 김광일 변호사의 평전 『참 멋진 놈 만났더라』에 2·7 집회를 자세히 그렸다. 당시 상황을 그대로 옮긴다.
2월 7일 엄청난 경찰 병력이 대회장소인 대각사를 원천 봉쇄했다. 그러나 주최 측은 굴하지 않고 여러 차례나 대각사 진입을 시도하는 척하며 경찰의 경계를 따돌린 후에 장소를 옮겨 부영극장 앞에서 기습적으로 대회를 연다. 말 그대로 성동격서의 전술이었으며 실로 군부독재 정권의 폭압을 뚫고 도심지 한복판에서 독재타도를 외친 첫 가두시위였다.
첫번째 영장은 기각돼다
여러 사람의 연설과 노래가 이어진 후에야 뒤늦게 그 사실을 안 경찰이 주변을 포위하면서 남포동 방향에서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가두시위란 것이 무서울 때여서 수백 명의 시민, 학생들은 동요했다. 주최 측에서 ‘질서’ ‘앉자’를 외치며 동요를 막으려 했지만, 경찰 병력이 점점 다가와 드디어 덮칠 수 있는 거리에 이르자 금방이라도 대오가 무너져 뿔뿔이 흩어질 태세였다.
나(문재인 변호사)는 그때 부민협 상임위원으로 주최 측의 일원이어서 시위대를 보호할 일이 걱정이었으나 다함께 앉아서 버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고작 생각한다는 것이 여차할 경우 시위대와 함께 어디로 튀는 것이 좋을지 사방을 살피며 머리를 굴릴 뿐이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김광일 변호사가 나섰다.
“시민,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가 앞으로 나가서 도로에 앉아 몸으로 경찰을 막읍시다.”
여기까지가 문 변호사가 전한 1987년 6월 항쟁의 시발점 2·7 추모 집회 당시의 모습이다. 시민들을 경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대표자들이 경찰과 집회군중 사이에 연좌하던 중 최루탄을 뒤집어 쓴 노무현 변호사는 경찰에 연행돼 바로 구속영장이 청구된다.
이날 집회의 성공은 그날 밤까지 1만여 명 이상의 부산 시민들의 거리시위로 이어져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당시 구속영장에 적힌 범죄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86년 8월 10일 오후 7시 문재인, 이흥록 변호사와 함께 부산 중부교회에서 성고문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 주최로 열린 집회를 여는 것은 경찰에서 불법으로 인정해 행사장 출입을 차단하자 인근 농협 부평동지점 앞 길거리에서 문제 학생 50여 명을 선동해 폭력경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가두시위를 기도했다. 또 1987년 2월 7일 중구 남포동 부산극장 앞에서 고문추방이라고 쓴 어깨띠를 두르고, 집회에 나와 “박종철 군의 죽음은 대공요원 한두 사람의 죄가 아니라 불의를 허용한 우리 모두의 죄”라며 “민주정치 쟁취하자, 고문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불법 시위를 적극 주도한 혐의이다.
당시 2월 7일 부산 북부경찰서 수사과 형사계 사무실에서 경찰이 작성한 조서를 통해 ‘갇힌 노무현’을 투영해보자. 당시 모두 진술에서 노무현은 “나는 오늘 오후 2시 30분께 전투경찰 복장의 경찰관으로부터 연행돼 강제로 끌려온 사실이 있어서 인적 사항을 사실대로 진술하고, 그 이후 오늘 행동한 사실에 대해서는 일체 진술할 수 없다”며 묵비권을 행사한다.
‘묵비권 투쟁의 대가’ 노무현
부산시경찰국으로 자리를 옮겨 2차 조서를 받을 때도 묵비권을 행사하자, 당시 경찰관은 피의자 노무현이 모르게 ‘몰래 녹음’을 시도해 성공한다. 당시 진술조서를 보면 노 고문은 모든 질문에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사적인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눴는데 본인도 모르게 녹음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버럭 화를 내며 항의한다.
또 “녹음 내용을 들어보겠느냐”는 경찰의 제안에 ‘화난’ 노무현은 “당신들 마음대로 녹음했으면, 마음대로 증거로 사용하면 될 것이지 들을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당시 경찰은 조서 말미에 피의자 노무현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 놓았다.
“묵묵부답으로 있어 서명 날인을 요구하였으나 거부하다가, 본인(경찰)이 진술조서를 읽어줄 때도 듣지 않겠다는 모습으로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고 있다.”
계속해서 소설가 김하기가 『6월 항쟁』에서 ‘노변 구속 영장 기각 사건’을 다룬 부분이다. 장소와 시간은 1987년 2월 9일, 부산이다.
노무현 변호사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해프닝의 연속이었다. 경찰에 잡혀 와서도 책상을 뒤집어 엎는 등 행패(?)를 부리는 노무현씨를 괘씸하게 생각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당직을 맡은 한기춘 판사로부터 기각당했다. 도주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검찰은 다른 판사의 집에까지 돌아다니며 4회나 더 영장발부를 구걸했으나 번번이 기각당했다.
일반적으로 구속영장은 한 번 청구했다 기각되면 다시 청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인데, 이 날은 납득할 수 없을 만큼 이례적이었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대한변호사협회와 부산지방변호사회도 이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였다. 부산의 민주인사 노무현 변호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에 알려졌다.
노무현, 검찰도 고소하다
월간 『말』 취재진은 최근 노무현 변호사의 당시 상황이나 심정이 담긴 자필 고소장을 입수했다. 당시 주소는 부산 남구 남천동 삼익비치맨션 203동이고, 1987년 9월 3일 해운대경찰서 유치장에서 작성한 고소장이다.
피고소인은 1987년 2월 7일 당시 부산지검 공안부장과 차장검사 등이고, 고소죄명은 불법 감금 및 직무유기다. 파란색 대학 노트에 흘려 쓴 4장의 자필 고소장을 작성했다. 결국 이 고소장은 곱게 타이핑을 한 다음에 1988년 2월 23일 부산지검에 접수시킨다. ‘끈질긴 노무현’의 단면이다.
결국 검찰의 ‘밤을 새운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풀려났다. 밤새워 구속영장을 들고, 판사들의 집을 전전하며 구걸하러 다닌 부산지검의 위신은 땅에 떨어진다. 노무현은 석방돼 불구속 상태로 수사를 받는다.
1987년 2월 19일 부산지검 정현태 검사가 작성한 문답의 일부를 보면 당시 노무현 변호사의 여유와 당당함, 그리고 당장은 공무원이지만 인간으로서 검사 개인에 대한 애정이나 예의를 엿볼 수 있다(검사를 ‘검’으로, 노무현 변호사는 ‘노’로 표시한다).
검 : 묻는 대로 답하겠는가. 노 : 인적사항만 말하고, 사실 관계는 말하지 않겠다.
검 : 피의자는 1986년 8월 10일 오후 7시 부산 중부교회 인근에서 학생 50명을 선동해 ‘폭력경찰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선창하는 등 가두시위를 전개한 사실이 있는가. 노 : 알 필요가 없다.
검 : 1985년 김광일, 문재인 변호사와 함께 3백만 원을 갹출해 당감성당 안의 부민협 사무실을 부산진구 범천1동 845 송호진씨 소유의 건물로 이전토록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있는가. 노 : 그런 것도 문제가 되는가.
검 : 부민협은 민통련 산하단체로서 민통련과 운동이념을 같이하고 있다는 데 사실인가. 노 : 부민협의 운동이념을 알 뿐, 민통련의 이념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산하단체라고 하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검 : 1987년 2·7 박종철 추모집회를 위해, 1월 10일과 2월 3일 부민협 사무실에서 2회에 걸쳐 부민협 등 재야단체와 신민당이 회합을 가져 박종철 추도행사를 2월 7일 오후 2시 대각사에서 열기로 하고, 행사가 저지될 경우 집회와 시위도 불사한다는 등의 결의를 했는가. 노 : 질문도 정확하지 않고, 대답 또한 하고 싶지 않다.
검 : 박종철 추모 행사에 쓰이는 유인물과 플래카드, 어깨띠 등을 제작하는 등 필요한 경비로 피의자가 50만 원을 제공했는가. 노 : 알 필요없다. 하지만 뭐라고 할까, 귀신같네.
검 : 추도회의 사회는 부산 EYC 총무 최명철이 맡고, 개회선언은 부민협 사무국장 김재규가 했고, 피의자의 추도사를 소개한 것도 김재규인가. 노 : 한 가지가 틀렸다. 하지만 말하지 않겠다.
검 : 당일 행사의 추도사를 위해 미리 추도사를 준비했는가. 노 : 미리 준비했다면 좀더 잘했을 것이다.
(중략)
검 : 박종철 군 사건의 성격, 부산이 박 군의 고향이라는 사정, 부산 시민의 기질 및 부산시민이 갖고 있는 정치적 경험을 비춰볼 때 박종철 추도회를 제지하지 않으면 인천 사태 등과 같이 극도의 혼란 사태가 생기지 않고, 피의자가 말하는 평화적인 추도회 만으로 끝났을 것으로 자신하는가. 노 : 자신할 수 있다. 그런 불안은 이런 추도회를 평화적인 추도회로 끝날 수 없도록 원인을 제공한 자들의 불안일 뿐이다. 민주적인 제 권리가 보장된 곳에서는 추도회가 폭력 사태로 발전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검 : 법조인의 견지에서 볼 때 피의자의 행동이 너무 정치적이거나 지나치다고 느껴지진 않았나. 노 : 나는 개인적으로 정치적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시민으로서 정치적 권리는 보장돼야 하고, 그 행사는 시민의 의무이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법조인이라면 법률적 방법으로 대응해서는 스스로의 권리는 물론 시민의 권리조차 옹호할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검 : 현재의 심경은. 노 : 이번 일은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다음은 진술서 마지막 부분이다.
법질서 유지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모습에 경의를 표함과 아울러 한편으로는 송구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자리는 결과적으로 독재권력에 대한 저항과 그에 대한 탄압에 맞서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법을 집행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 법의 집행은 엄격한 법 원리에 의해서 집행되어야지 누구의 명령이나 정치적 분위기를 위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지난 2월 9일 오후 3시 30분, 대공분실에서 김수민 검사로부터 조사를 받은 일이 있는데 합법적 구금 시간인 48시간을 약 1시간 정도 경과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본인은 조사가 끝날 무렵 검사에게 즉시 석방을 요구함과 동시에 구속 시간이 경과한 사실, 전투경찰에 의하여 대공분실의 현관이 봉쇄된 사실, 석방을 요구한 사실 등을 조서에 기재에 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하지만 검사는 석방을 지휘하지도 않았고, 본인의 진술을 조서에 기재하는 것도 거절하고 돌아갔다.
검사의 직무 집행이 이와 같은 상황이어서 성실히 조사에 응할 마음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간 대부분의 진술이 불성실하게 된 것이다. 검사님 개인에게는 대단히 미안하지만 이런 시국에 대해 무언가 항의의 의사 표시를 하는 것이 변호사로서의 당연한 사명이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한 것이니 이해해주기 바란다.
당시 전국이 그렇듯이 1987년 6월 항쟁이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 뒤, 지난 1987년 7월 이후에는 노동자의 바람이 다시 거대정국을 주도한다.
‘이석규 열사 사건’으로 불리는 1987년 8월 대우조선 노동조합의 투쟁은 아마 당시 민주화 운동 진영이나 언론사보다 당시 경찰이 더 자세하고, 세밀한 자료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비디오 카메 라같은 쓸 만한 기록도구가 없는 시절이었기에 더더욱 그렇게 추정된다.
대우조선 민주노조 결성
월간 『말』 취재진은 당시 부산시경찰국 정보과가 작성한 「대우조선 노사분규 상황일지」를 입수했다. 이 일지는 8월 8일부터 ‘열사 이석규’씨의 장례식이 끝난 30일까지 대우조선 민주노조 설립 과정과 투쟁 상황을 세밀하고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23일 동안의 생생한 노동조합 건설과 당시 대우조선 노동조합의 등장과 파업, 장례식 진행 과정 등 역사를 기록한 이 일지는 모두 137쪽 분량이다. 특히 사건이 급박하게 돌아갈 경우 5∼10분별로 상황을 세밀하게 정리해나갔다. 8월 10일 새벽 5시에는 대우조선 내 전화가 끊겨 경찰 맹원(프락치)과의 연락이 두절됐다고 적을 정도로 대우조선 안에 많은 정보원들을 두고 있었던 흔적도 적혀 있다.
경남 거제도 옥포 대우조선 노동조합이 수면 위로 드러난 계기는 1987년 8월 8일 대우조선 기능공 식당 앞에서 공무중기관리부 소속의 이상용씨가 ‘어용노사협의회 물러가라’는 현수막을 들고 노동자 5백여 명과 함께 본관으로 행진하면서 시작된다. 이어 정문 봉쇄, 모두 3천여 명이 집결했다는 것이 경찰기록이다.
그러나 월간 『말』 1987년 9월호(13호) 「옥포조선조, 굴욕적 푸대접 속에서 몸부림, 온갖 탄압 불구 민주노조 결성」이라는 기사에는 ‘삽시간에 노동자는 1만여 명으로 불어났다’고 보도해 경찰일지와 ‘집회 인원을 보는 시각 차이’를 여실히 드러냈다.
당시 노조 초대위원장으로 뽑힌 이상용씨는 회사 쪽 사람들과 만난 뒤 지금 외부 불순분자가 침투해 도로가 차단되고, 통행이 불편해 회사 쪽에서 노조설립 서류를 대신 접수시켜 주겠다고 말했다는 말을 노동자들에게 그대로 전했다.
당시 상황에서 위원장이 이런 말을 하면 위원장 어용시비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결국 노조원들은 위원장과 노조를 세운 지 이틀 만인 11일 ‘어용’위원장 이상용씨를 몰아내고 양동생씨를 노조위원장으로 선출한다. 실제로 현재 대우조선 노동조합 홈페이지(http://www.dswu.or.kr)에 나와 있는 노조연혁을 봐도 이상용 위원장이란 이름을 찾을 수 없다.
‘현장을 점령’한 노조와 회사는 계속 협상을 벌이지만 부결되고, 회사는 바로 휴업을 선언한다. 이에 흥분한 시위대는 옥포관광호텔에 묵고 있는 김우중 회장과 대우 조선 관리자들을 향해 달려갔다.
8월 22일 ‘양동생 집행부’는 기본급과 현장수당 각각 2만 원 인상, 가족 수당 1만 원 신설을 최종안으로 제출하자, 회사 측은 48시간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노조는 바로 교섭 결렬을 선언했다. 같은 날 오후 2시 40분 소조립부에서 근무하던 이석규씨가 옥포사거리 시위에서 경찰이 쏜 SY44 직격 최루탄을 가슴에 맞고, 쓰러져 생을 달리한다.
당시 사건에 대한 진상은 부산지방변호사회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형규 변호사 외 7인)가 작성 발표한 「노무현 변호사 구속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보고서」 12쪽부터 자세히 적혀 있다.
수백 명의 근로자들이 옥포관광호텔에 있는 회사 간부들의 면담을 요구하기 위하여 행진 중, 위 호텔에서 2백 미터 거리에 있는 옥포사거리에서 경찰병력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행진을 막는 경찰과 수차례 몸싸움을 한 후 근로자 대표가 나서 경찰 지휘자에게 “호텔까지만 평화적으로 행진할 것이며, 호텔에 가서도 회사 간부들과 면담이 이뤄질 때까지 평화적으로 연좌농성 외에 과격행동을 하지 않을 테니 길을 열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경찰 지휘자는 “가지고 있거나 주변에 있는 돌멩이를 모두 치우고 오리걸음으로 행진한다면 길을 열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근로자들은 길가에 있는 돌멩이들을 모두 치운 다음 열을 짓고 스크럼을 짠 상태로 앉아서 오리걸음으로 수 미터를 전진하였는데 경찰병력이 다시 길을 막았다.
그래서 근로자들은 스크럼을 풀지 않고 앉은 그 상태에서 경찰 병력과 대치해 약속 위반을 항의하고 있는데 갑자기 최루탄이 발사되었다. 그때 경찰병력은 근로자들을 삼 면에서 포위하고 있었고, 위 망인(이석규 열사)은 선두 세 번째 열에 앉아 있었다.
최루탄이 발사되자 근로자들은 처음 얼마 동안은 물러서지 말자고 말하며 스크럼을 짠 그대로 무저항 상태로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으나 곧 더 많은 최루탄이 터지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극도의 혼란상태에 빠지면서 뒤쪽으로 앞을 다투어 도망하였고, 경찰은 뒤쫓아 오면서 계속 최루탄을 쏘는 한편 뒤처진 근로자를 붙잡아 폭행을 가하였다. 그러한 상황이 끝난 후 망인이 발견되었다.
당시 부산지방변호사회 진상조사위원회는 “경찰의 진압에 따른 이번 사고는 우발적인 것이 아닌 경찰의 고의적인 살인행위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사고가 난 뒤 노 변호사는 사망 당일 밤에 육로로 거제도에 가려다가 발을 돌려 다음날인 23일 오전 8시 부산항에서 배편으로 거제 옥포항에 내린다. 노 변호사는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대우조선에 간 사연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그 사건에 개입하게 된 것은 노동자들이 사체 부검에 입회해달라고 요청을 해왔기 때문이다. 내가 노동자들로부터 요청을 받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전 6월 18일의 부산 시위 때 이태춘이란 청년이 경찰의 최루탄을 피하다 떨어져 죽었는데 그 청년의 사체 부검 때 내가 참여했었기 때문이다. 도착해보니 서울에서 이상수 변호사와 민통련 관계자, 노동운동단체 등에서 지원차 내려가 이상수 변호사나 나는 우선 유족들에 대한 보상 합의 문제를 도왔다.
장식방해죄를 아시나요?
그리고 검찰이 조속하게 부검을 할 수 있도록 시신을 장악하고 있는 노동자를 설득하여 사태 수습에 매달렸다. 다만 유족에 대한 보상 합의 문제가 임금협상과 맞물려 있어서 노동자들이 혼선을 빚고 있었다. 당시 나는 임금협상이 원만하게 타결되지 않고서는 장례식도 원만하게 치러지기 어렵다고 보고 장례식에 앞서 임금협상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갈팡질팡하는 노동자들에게 그런 뜻을 가지고 가닥을 잡아주었는데, 검찰에서 나를 제3자 개입, 장(례)식 방해 등으로 물고 늘어진 것이다. 당시 이상수 변호사와 내가 유족들에게 받게 해준 보상금은 1억 원이었다. 당시 상황으론 꽤 많은 액수였고, 우리가 나서지 않았다면 쉽게 타낼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8월 30일 거제 대우조선을 관할하는 경남 충무경찰서에 이상수 변호사(현 국회의원)가 구속된다. 부산시경찰국 대공분실 소속 경찰들은 8월 30일부터 9월 1일까지 3일 동안 노무현 변호사에게 집과 부산국본 사무실 앞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임의동행을 요구한다.
그때마다 노무현 변호사는 경찰에게 영장 제시를 요구하거나 사실상 임의동행을 거부하다, 결국 9월 2일 밤 11시께 구속영장이 발부돼 해운대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다. 아마 주소지 관할 경찰서에 잡혀간 것으로 미뤄볼 때 집에서 연행된 것으로 보인다. 혐의는 정상적인 장례식을 방해했고, 지금은 폐지돼 기억 속에서 사라진 ‘악법’인 쟁의조정법 중 제3자 개입 금지 위반, 무수한 시위 집회 등 6월 항쟁에 대한 집시법 위반 등이다.
노무현은 감옥에서도 쉬지 않는다
미결수로 부산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노무현은 1987년 9월 18일 부산일보가 자신이 13대 총선에 출마한다는 기사를 내보내자 편집국장 앞으로 항의서한을 보낸다(물론 공천을 앞두고, 초반에는 거부하다가 주변의 권유로 출마해 부산 동구에서 ‘5공 시절 3허로 불리며 잘 나가던 허삼수’를 누르고 당선된다).
이틀 뒤에는 또 대우조선 사건으로 충무경찰서에 수감중인 이상수 변호사에게 ‘수사기관의 불공정한 수사와 민중에 대한 탄압을 이유로 검찰 조사에 불응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려 했지만 부산구치소장은 이를 불허한다.
그대로 가만있을 노무현 변호사가 아니었다. 바로 피청구인을 부산구치소장으로 하는 서신발송 불허처분 취소 심판 청구 소송(행정심판)을 제기한다. 결국 이 편지는 국가와 언론 기관에 대한 불만 및 불신을 표시한 것으로, 청구인에게 특히 필요한 용무가 있는 것으로 보기 어렵고 교도상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기각당한다. 노무현 변호사는 감옥에서도 쉬지 않았다.
거제 대우조선 사건과 관련해 노무현 변호사의 구속영장을 직접 작성한 사람은 당시 부산시경찰국 대공분실 유병은 경위이다. 그는 현재 경정으로 두 계급 진급해 금정경찰서 형사과장으로 재직중이다. 유병은 과장은 월간 『말』 취재진과 전화 통화에서 “1985년부터 1990년까지 부산시 경찰국 대공분실에 근무했다”면서 “6월 항쟁과 대우조선 사건, 동의대 사건 등 격동기를 지내면서 노무현 변호사를 수사하는 등 격동기를 지켜봤다”고 말했다.
그는 또 월간 『말』 취재진의 계속된 인터뷰 요청에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가 된 사람의 과거에 대해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정중하게 취재를 거절했다.
변호사 99명이 일궈낸 석방
노 변호사는 9월 2일 구속돼 1987년 9월 23일 구속적부심 재판을 통해 석방된다. 구속적부심 재판은 대개 변호사, 피의자, 판사 등이 참가하는 ‘소형 재판’이라서 판사 방이나 소형 법정에서 진행한다.
하지만 당시 부산지법은 심리 시간을 오후 2시에서 오후 4시 30분으로 변경하면서까지 대형 법정에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변론에 참가할 변호사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변호사는 변호사 김광일 평전 『참 멋진 놈 만났더라』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당시 노무현의 무료 변론에는 부산지역에 개업한 변호사 대부분이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부산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 99명이 무료 변론을 자청하여 선임계를 제출했는데 이 분들이 고맙게도 대부분 법정에 출석했다. 그래서 변호인석의 자리가 턱없이 모자라 방청석의 대부분을 변호사들이 차지했다. 대규모 변호인단이 구성되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실제로 그토록 많은 변호사가 출석한 기록은 아마 전국적으로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재판이 열리면 출석한 변호인을 확인하여 조서에 기재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부산의 변호사 수효가 많지 않아 법원 사무관이 변호사들의 이름을 다 알기 때문에, 재판장이 변호인을 호명하지 않고 사무관이 알아서 조서에 기재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날도 재판장은 평소대로 변호인의 출석은 확인하지 않고 바로 인정신문을 시작하였다. 그 순간 김광일 변호사가 일어나 이렇게 요구했다.
“출석한 변호인의 수가 많고, 방청석에도 다수가 앉아 있어 변호인의 출석 여부를 확인하기여 재판장께서 직접 변호인을 호명하여 출석 여부를 확인해 주십시오.”
결국 재판장은 장시간에 걸쳐 변호인을 일일이 호명하여 출석 여부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많은 변호사가 선임되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법정에 출석해 노무현 변호사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판부가 직접 확인하도록 함으로써 재판의 분위기를 유리하게 이끌고, 재판부에도 압박을 가하는 일종의 시위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김광일 변호사는 “구속적부심 재판을 대법정에서 개정한 것도 우리나라 사법 사상 초유의 일이지만 모두 99명의 변호사가 법정에 나와 사실상 시위를 벌인 것도 처음이었다”며 “석방 결정이 났을 땐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신났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구속적부심이 받아들여져 석방된 노무현은 이후 검찰에서 1차 진술조서를 작성하지만 묵비권을 행사한다. 그런 그가 10월 15일 검찰 조사에 처음으로 성실하게 임한다. 사실상 1987년 6월 항쟁 이후부터 지금까지 경찰이나 검찰의 조사에 이렇게 응한 경우는 처음이다.
“처음 구속됐을 때는 그 구속이 정치적 이유를 앞세운 것이라 보았기 때문에 진술을 거부했다. 하지만 구속적부심 석방 후 수사단계에서 본인에게 유리한 사실을 밝혀 혐의를 벗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기대해 수사에 응했다.”
하지만 조사 후 며칠이 지난 뒤 노무현의 마음이 또다시 바뀐다. 조사에 불응하는 것이다. 당시 같은 혐의로 구속된 이상수 변호사가 이번 사건으로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은 것 때문이었다.
“법무부가 이상수 변호사에게 업무정지 처분을 내리는 것을 보고 아직도 처음 구속된 당시와 상황이 변함이 없다고 생각돼 본인의 성실한 변명 또한 부질없는 짓으로 생각됐다. 내가 진술을 거부하겠다는 뜻은 앞으로 이 사건에 관해 유리와 불리를 떠나 진술을 거부하겠다. 내가 과거와 같은 정치적 활동을 하고 안하고는 상황의 변화 여부에 따르는 것이지 결코 어떤 사법적 소추나 업무정지 처분이라는 결과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검사의 출석 요구에 앞으로 응하지 않겠다.”
결국 노무현도 1987년 11월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고, 이듬해인 1988년 2월 22일 벌금 1백만 원을 선고받는다. 검찰과 노무현 변호사 쌍방이 모두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지만 기각 당한다. 불혹의 나이 노무현 변호사의 구속 사건은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변호사인 노무현’과 현대 계열사 노조의 인연은 그리 깊지 않다. 하지만 ‘15년의 오랜 정치 역정에 비하면 짧은 국회의원 경력 노무현’과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에서 노동자를 만나는 공식적 인연은 1988년 대우중공업 파업 현장 방문을 시작으로, 1990년 대우중공업 골리앗 투쟁, 다시 1998년 현대자동차 파업 중재 등 질기게 이어진다. ‘짧은 국회의원’ 신분으로 노사분규의 한가운데를 세번이나 다녀간 것이다.
1988년 1월과 다음해 5월 현대중공업 노사분규 현장을 방문할 때는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당선된 국회의원 신분으로, 현대자동차 노사분규를 중재할 때는 1998년 7월 종로구 보궐선거에 당선된 다음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국회의원) 자격으로 ‘투쟁의 현장 울산’에 내려갔다.
당시 투쟁의 중심에 섰던 사람은 이번 6·13 지방선거에서 울산 동구청장으로 도전하는 이갑용 민주노동당 울산동구지구당 위원장과 김광식 현대자동차노조 전 위원장이다. 이 두 사람을 5월 8일 울산 현지에서 만났다.
현대중공업과의 인연
현대중공업은 1987년 처음 노조를 만들었고, 다음해 1988년 시작된 첫 단체협약 싸움은 해를 넘겨 1989년까지 계속된다. 물론 파업을 동반한다. 1백28일 파업 기간중인 1988년 12월 26일 국회의원 배지를 단 노무현이 현장을 방문한다. 사실상 그때의 파업은 불법이었다.
울산참여연대 이수원 대표는 『현대그룹 노동운동 그 역동의 역사』라는 저서에서 1만8천 명의 현대중공업 노조원이 모인 가운데 노무현 국회의원의 초청 강연이 열렸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당시 1988년 4월 허삼수를 누르고 부산 동구에서 당선돼 여의도에 입성한 통일민주당의 노무현 의원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이 단협 승리를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노동자의 목을 죄는 모든 악법을 깨부수기 위한 한국 노동운동을 이끄는 중요한 사업(투쟁)”이라고 말했다. 당시 연설 내용 전문이다.
“여러분! 이번 여러분의 파업은 법률상 위법입니다. 그런데 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 산동네의 철거민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도 하루 종일 일하고 퇴근해서 따뜻하게 등 눕힐 수 있는 구들장이 필요하고 그 사람 자식들도 밥 먹던 상이나마 행주로 닦아 책 놓고 공부할 수 있는 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법에 위반되었다고 무허가라고 집을 뜯어버립니다.
노점상들도 그렇습니다. 입에 풀칠을 하려고 나와 있는 노점상들을 도로교통법을 걸어 목판을 차버립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집에 불이 나 다섯 가구가 몽땅 타버렸는데 피해액이 백만 원도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목판 하나는 전 재산입니다. 밥 못 먹게 하는 법, 그것은 법이 아닙니다.
여러분! 헌법에는 노동3권을 명시해놓고 방위산업체는 안 된다고 합니다. 입만 열면 안보, 전쟁 위협을 하면서 비행기로 3분 거리에 있는 서울에 왜 63빌딩을 짓습니까? 방위산업체 쟁의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은 대한민국 노동운동을 콱 밟아버려라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는 지키지 않아야 합니다. 또 말로만 하지 말고 악법은 국민의 손으로 철폐시켜야 합니다.
노동자가 놀면 온 세상이 멈춥니다. 그 잘났다는 대학교수, 국회의원, 사장님 전부가 뱃놀이 갔다가 물에 풍덩 빠져 죽으면 남은 노동자들이 어떻게든 세상을 꾸려 나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노동자가 모두 염병을 얻어 자빠져 버리면 우리 사회는 그날로 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 경제, 사회관계 등 모든 것을 만들 때 여러분이 만듭니까? 그게 바로 오늘 한국의 노동자가 말하는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입니다. 그런 사회를 위해 우리 다함께 노력합시다.”
다음날 현대중공업 회사쪽은 「현중뉴스」라는 정기 홍보물을 통해 노무현의 강연을 ‘선동’ ‘선거 운동’이라고 매도하면서 제3자 개입 위반으로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지만 후속 조치는 없었다. 훗날 이 발언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이인제 후보가 제기하는 색깔 논쟁의 단골 메뉴가 된다.
골리앗과 노무현
1990년 당시 대우중공업 이영현 노조위원장이 구속되자마자 단협을 앞당겨 3월 임금협상, 4월부터 파업을 강행한다. 4월 말까지 계속된 싸움에서 대다수 노조 부위원장들이 경찰(정부)과 회사에 사실상 투항하면서 노조 간부는 사무국장 이갑용씨만 일부 조합원들과 함께 외롭고 처절한 투쟁을 계획한다.
구약시절 ‘약소민족 노동자’를 무력으로 짓밟은 흉폭한 거인 골리앗(독재정권)과 맞서는 ‘다윗 이갑용’의 골리앗 점거투쟁이었다. 스스로 ‘외로운 늑대’라는 암호명을 사용한 고공 82미터, 건물로 치면 23층 높이의 골리앗 투쟁은 1990년 노동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파업 4일만인 4월 28일 새벽 5시, 경찰은 육해공 삼 면 입체작전을 전개해 3시간만에 공장 내 주요시설을 점거했다. 그러나 73개 중대 1만3천여 명의 병력과 헬리콥터, 해군 경비정까지 동원한 물리력도 골리앗 앞에서는 불가항력이었다. 2백여 명의 ‘외로운 늑대’가 시작한 골리앗 종성은 5일째인 5월 3일 50명으로 줄어든다. 그날 오후 4시 50분께 박찬종과 노무현 의원이 올라와 엘리베이터실에서 이갑용 당시 비대위 의장과 면담을 가졌다. 민자당 창당 기념일인 5월 9일 이후까지 투쟁을 끌어가야 했던 이갑용 위원장의 당시 노무현에 관한 기억이다.
“노무현은 1988년 12월에는 법을 초월해 투쟁해야 한다는 강성 발언을 했지만 골리앗에 올라왔을 때는 조금 유연해진 것 같았다. 다치지 말아라, 합리적으로 해결하도록 중재하겠다고 말했다. 노무현은 선동가에서 중재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정리하면 1989년 1월 노무현 의원은 1년 전 투쟁의 선동가에서, 골리앗 앞에선 중재자로 변한 것이다. 당시 이갑용 위원장은 “1989년에 싸우고 있는 사람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하고 간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도 노무현 의원이 오면 힘을 주고 갈 것으로 생각했다”며 “중재하러 왔다는 말을 들 때는 힘이 쭉 빠졌고, 오히려 같이 온 이상수 의원이 노동자들에게 힘을 주는 ‘센’ 발언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결국 1990년 5월 노무현 의원은 투쟁하는 골리앗 농성자들에게 ‘힘과 투쟁의 의지보다는 식수를 건네주고 돌아오게’ 된다.
간이 침대의 노무현
1998년 7월 21일 ‘정치 1번지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정인봉 변호사를 큰 차이로 누른 노무현 변호사는 현대자동차 노사 협상 중재단으로 울산에 내려간다. 그날은 이기호 당시 노동부장관의 중재가 무산된 다음날인 8월 18일이었다. 중재에 걸린 시간은 모두 6일이다.
현대자동차의 ‘뜨거운 노사 공방’은 회사 측이 정리해고가 법제화된 것을 계기로 4월 19일 노동자 8천1백89명을 해고하겠다는 통보와 함께 시작됐다. 이 통보는 8월까지 계속되는 기나긴 투쟁으로 이어져 모두 여섯 차례의 파업에, 회사는 세 차례의 휴업으로 맞섰다.
현대자동차의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사분규는 최초로 노동자와 총자본이 격돌하는 본보기가 되었다. 당시 노동조합은 근무시간 단축을 비롯한 순환 휴가제 등 정리해고가 아닌 다른 대안을 내놓았지만 회사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대자동차는 30년 동안 흑자를 기록했다. 김광식 전 위원장은 “불과 몇 개월의 단기간 적자를 이유로 정리해고 카드를 뽑아 든 것은 ‘구조조정을 통한 생산효율성 향상이기보다는 정리해고를 통한 노조의 무력화’가 가장 큰 목적으로 보였다”고 설명했다.
그런 과정에서 노무현이 국민회의 중재단을 꾸려 울산으로 내려갔다. 이에 대해 김광식 위원장은 “공권력 투입을 앞두고, 회사 입장에서 보면 합법적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또 “당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별 단위 사업장이 정권과 총자본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개별 단위 사업장이 투쟁을 벌여 정리해고 규모를 줄이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기업별 노조보다는 구조와 시스템을 바꿔 산별노조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잠정합의(안)에 대해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1, 2차 투표를 통해 부결시키지만 문안이 약간 수정돼 통과된다. 사실상 “노조를 유지할 힘조차 없어 합의하는 상황으로 흘러갔다”는 것이 김 위원장이 바라보는 당시 정세다.
하지만 노사가 합의하고, 정부가 중재한 합의 사항도 잘 지켜지지는 않는다. 파업에 참가한 노조 간부들을 사법처리하지 않고 선처하기로 했지만 40여 명이 구속됐고, 정리해고자의 경우 생계비는 상당 기간 지급되지 않았다.
김광식 위원장은 협상이 타결된 뒤 노조 간부들의 구속을 앞두고, 정부 중재단 이기호 노동부장관과 노무현 부총재를 만나러 갔다가 ‘사람됨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사법처리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라고 찾아갔지만 이 장관은 만나지도 못했다. 아주 의리가 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노무현 부총재는 현대자동차 노사분규 중재 문제로 언론과 재벌에게 치이고 마음 고생을 많이 하는 과정인데도 불구하고 권양숙 여사와 함께 구치소로 특별접견을 왔다.”
“민주당 노무현은 신뢰하지 않지만 인간 노무현은 존경한다. 개인적으로 민주노동당에 입당하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는 김광식 위원장은 중재 당시의 노무현을 이렇게 기억한다.
“정치인 노무현의 분명한 한계는 집권 여당 정치인이란 사실이었다. 하지만 협상 당시에는 우려하고, 고민하고, 노력했던 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중재단 대표인 노무현은 울산에 있는 동안 내내 본관 회의실에서 간이 침대를 펴놓고 잠을 잤다. 여당 부총재에게 제공되는 편안한 잠자리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