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리의 낙랑을 정복하다 ( 32년 04월(음) )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로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출행하였다가 그를 보고서 묻기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사람이 아니구나. 어찌 북국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이 나라로 돌아와 몰래 사람을 보내 최씨 딸에게 알려서 말하기를 “만일 그대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뿔피리를 찢고 부수면 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낙랑에는 북과 뿔피리가 있어서 적의 병력이 침입하면 저절로 울었다. 그런 까닭에 이를 부수게 한 것이다. 이에 최씨 딸이 예리한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에 들어가 북의 면(面)과 뿔피리의 주둥이를 쪼개고 호동에게 알렸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삼국사기에 이 기사때문에 낙랑군이 한반도 밖에 있고, 현재 평양 인근엔 최씨낙랑군이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 이게 북한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
여기에서 멈추면 삼국사기 기록에 근거해 최씨낙랑국이 별개로 있다는 생각을 할수 있습니다만
조금 더 들어가보면 그럴수 없다는걸 알게 됩니다.
쿠투넷 기록을 신뢰하기 쉽지는 않지만, 최씨 낙랑국은 그쪽에서 지지받는 학설가운데 하나고 벽돌에 찍혀있는 성씨기록을 바꾸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므로 그쪽 기록을 인용해봅니다 ( 출처가 있을듯 한데 출처는 적어놓지 않으셨더군요 )
평양에서 발굴된 유물기록입니다.
그 밖에 동인(銅印)들이 모두 19개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 왕씨의 동인은 6개, 한씨의 동인은 2개, 황씨의 동인은 1개, 신(臣)씨의 양면 동인은 3개가 발견되었다. 여기서 왕씨의 동인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고 한씨와 황씨 또한 왕씨와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면 모두 9개로 전체의 절반 정도가 된다.
다음은 사인 봉니를 살펴보자. 사인 봉니에 나오는 성씨들을 살펴보면 왕씨는 5명으로 가장 많고 한씨, 고씨, 공손씨는 각각 2명씩이다. 왕씨와 한씨를 합하면 모두 7명으로 전체 15명 가운데 절반 가량을 차지한다.
다음은 기년이 새겨진 벽돌에 나타난 사람들을 살펴보자. 왕씨는 6명, 한씨는 5명, 손씨(孫氏)는 2명이고 장씨(張氏), 오씨(吳氏), 전씨(田氏)는 각각 1명씩이다. 왕씨와 한씨가 가장 많은데 이 둘을 합하면 모두 11명이나 된다. 기년이 새겨지지 않는 벽돌에 나타난 사람들까지 합해서 살펴보면 왕씨는 22명, 한씨는 11명, 손씨는 3명, 장씨는 6명, 오씨와 전씨는 각각 3명씩이다. 여기서도 왕씨와 한씨가 모두 33명으로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시면 알겠지만 최씨낙랑국에 최씨에 대한 유물이 전혀 없습니다.
왕씨와 한씨 유물만 잔뜩 있죠.
낙랑관련 문헌에도 왕씨와 장씨, 한씨가 주도적 세력이라는 것이 있다고 모 블로그에서 언급했으나
제가 교차검증을 못한관계로 그건 그냥 참조사항으로 남겨두겠습니다.
그럼 삼국사기 기록이 거짓말 이란 예기냐라고 물으신다면 다음으로 대답을 갈음하겠습니다
최근의 연구경향은 [삼국사기]에 낙랑, 낙랑인 혹은 낙랑국으로 표현된 존재가 곧 낙랑군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낙랑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낙랑군 속현의 단위가 되었을 소국들이 저마다 스스로를 낙랑국 또는 낙랑군국으로 칭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김기섭,1991),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보이는 낙랑의 실체가 진한 세력일것 이라는 견해 (강종훈,1995),
백제와 대립한 낙랑은 평양의 낙랑군이고 신라와 대립한 낙랑은 군현과 연결되었던 옥저지역 토착세력의 낙랑국이라고 본 견해(문안식,1997)등이 있다.
최씨낙랑국이 한반도에 있던 낙랑군이라고 믿으시는 분들은 최씨가 박혀있는 낙랑유물이 나오는 기사를 열심히 찾아보세요 얘기는 그 다음에 나눕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