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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노콘] 무구의 익스피에이터 - 발단
게시물ID : animation_2143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18
추천 : 5
조회수 : 41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3/29 00: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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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

어슴푸레 동이 터오는 새벽 하늘로 붉은 빛의 조각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퍼져나가는 것은 비명, 그것도 갑작스러운 폭력 앞에 목숨을 잃게 된 자만이 낼 수 있는 통한의 단말마였다.

탐욕스러운 화마의 아가리로 빨려들어가는 가옥들을 보며 젊은 기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변의 열기에 달아오른 체인 메일이 그의 체내에 있는 수분을 모두 증발시켜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두려운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그의 등에는 얼굴에 온통 피칠갑을 한 예닐곱살 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업혀 있었다.

젊은 기사는 아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한 손으로 받치고 나머지 손으로는 장검을 지팡이삼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무언가를 찾는 듯 끊임없이 주변을 살폈지만,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온통 불에 타 스러져 가는 집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 잔해 사이사이로 젊은 검사와 같은 복장을 한 장정들이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들의 칼 끝이 향하는 곳은 마물도, 들짐승도 아니었다. 그들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지옥의 가마와 같은 불구덩이 속에 남아 있는 죄인들을 찾고 있었다. 기사들의 발걸음이 한 차례 멈출 때마다 여기저기서 끔직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거기에는 초로의 남자의 목소리도, 찢어지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도, 쉴대로 쉬어버린 아이의 목소리도 섞여있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젊은 기사와 그 동료들은 왕자가 납치되었다는 전갈을 받고 먼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왔다. 비록 그의 등에 업힌 사내아이가 국왕과 젊은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 할지라도 왕가의 혈통을 잇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고, 왕과 그 가족, 또한 권위까지 지키는 것이 기사의 의무였다.

따라서 왕족의 생명을 위협한 불경한 자들에게 철퇴를 내리는 것은 오롯이 기사의 몫이었다. 그리고 지금 마을이 불타오르고, 역적들을 숨기고 보호한 자들이 죽어 나가는 것은 기사들이 왕의 검으로서 충분히 제 몫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공권력, 즉 기사들에 의한 처벌이란 공명정대할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야음을 틈타 마을 곳곳에 불을 지른 뒤 혼비백산하여 뛰쳐 나오는 사람들을 학살하는 것보다는 더 고상한 방식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젊은 기사 역시 왕자를 구하기 위해 위협이 되는 자들 서넛의 목숨을 끊기는 했지만, 그의 눈 앞에 펼쳐지는 일방적인 살육은 역적의 토벌이라는 불가항력으로 설명하기에 너무도 끔찍했다.

죄인들의 단말마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던 젊은 기사는 익숙한 그림자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상관, 기사단장은 막 죄인 하나를 처단한 참이었다. 기사단장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은 죄인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빗장뼈 사이에 깊숙이 박혀 있던 장검이 스르륵 빠져나왔다. 기사단장의 칼 끝은 죽은 자의 붉은 피로 번들거렸다.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듯한 죽은 자의 두 눈과 마주친 젊은 기사는 두려움에 뒷걸음질쳤다.

기사단장은 숨이 끊어진 죄인을 잠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분노나 죽은 자에 대한 연민, 혹은 사람의 목숨을 끊은 뒤 밀려오는 복잡한 감정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사무적인 시선으로 발치에 드러누운 시신의 목숨이 제대로 끊어졌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기사단장은 칼을 휘둘러 피를 털어낸 후 젊은 기사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죽은 자들의 것으로 보이는 피가 군데군데 튀어 있었다. 기사단장은 젊은 기사를 발견하고 가볍게 미소지었다. 짧게 깎은 은빛 머리칼이 불꽃의 색을 흡수하여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젊은 기사는 두려운 눈길로 자신의 상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사에 흐트러짐이 없던 상관의 모습이 오늘만큼 두려워 보인 적은 없었다. 젊은 기사가 평소와는 다른 공포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기사단장은 젊은 기사의 등에 엎힌 사내아이를 발견하고는 입을 열었다.

"훌륭하네 조슈아. 왕자님을 구출한 모양이군. 이제 여기도 슬슬 정리를 해야겠어..."

기사단장은 젊은 기사의 이름을 부르며 칭찬했다. 기사단장으로부터 왕자 구출의 특명을 받은 젊은 기사, 조슈아 캠벨은 여전히 두려움과 불신이 가득한 눈길로 상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은 잘 해결된 것 같은데 표정이 왜 그런가?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건가?"

부하를 걱정하면서도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조슈아가 상처를 입었든, 입지 않았든 그에게는 별로 중요치 않은 문제인 듯 했다. 그가 조슈아를 바라보는 시선은 방금 전 찔러 죽인 자의 시신을 바라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슈아에게는 작전 성공에 대한 보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단 하나, 마음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르는 의문에 대한 해명을 상관으로부터 듣는 것이었다.

"엘렌 경... 주동자들은 이미 모두 도망친 게 아닙니까?"

왕자를 구출하는 것은 매우 수월했다. 납치된 왕자가 갇힌 곳을 지키는 사람도 서넛에 지나지 않은 데다 그들의 무장도 매우 단촐했다. 조슈아의 칼날에 의해 쓰러진 적들은 자신들이 왜 죽는지조차 잘 모르는 것만 같았다. 왕가에 대한 반역을 꿈꾸는 자들이라고 하기에 그들의 저항은 허무하리만치 초라했다.

마치 생전 무기를 다루어 보지 않은 사람들처럼.

왕자와 함께 상관인 엘렌 경이 있는 곳까지 오면서 조슈아의 의심은 한층 깊어졌다.
부하의 불경한 의심에도 엘렌 경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우리는 왕자 전하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고, 그들은 우리에게 칼을 겨누었네. 주동자냐 아니냐가 그렇게 중대한 문제인가?"

"하지만..."

엘렌 경의 말은 정론에 가까웠다. 왕자를 구출하러 온 자들에게 칼을 겨누었다면 그것은 필시 적임에 틀림없으리라.

조슈아는 말문이 막혔다. 엘렌 경의 논리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실제로 왕자는 조슈아의 손에 의해 감금에서 벗어났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얼마간의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왕족의 몸에 위해를 가한데다 구출하러 온 기사들에게까지 검을 들이대는 자들이라면 역적의 무리 이외에 달리 부를 말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허나, 역적의 무리라면 일벌백계를 위해 온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처단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야음을 틈탄 기습과 역적의 마을을 전소시키라는 명령은, 마치 그들을 벌하는 행위가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인 듯한 인상을 품게 만들었다.

"방식이 마음에 안 드는가? 역적을 벌하는 데에는 효수만큼 좋은 것이 없지. 하지만 왕자 전하가 납치되었다는 것이 세간에 알려져서 좋을리 없잖은가? 기사의 임무는 왕가의 권위를 보호하여 백성들이 안심하도록 하는 것일세. 그 점을 잊지 말게나."

엘렌 경은 조슈아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했다. 조슈아는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생각을 읽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엘렌 경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왕자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왕국의 정세는 혼란스러워질 것이 뻔했다. 제 2, 3의 모방자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왕정 국가에서 왕권의 흔들림이란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과도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은밀한 침투 작전도, 마치 씨를 말리는 듯한 소탕전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슈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위치한 인간의 본성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 작전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숱한 적을 베어 넘기면서도 조슈아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스러지는 생명에 대한 연민은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악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검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감금된 왕자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기사가 된 후 처음으로 검을 휘두르는 데에 주저함을 느꼈다. 그것은 신선한 동시에 불쾌한 감정이었다.

왕을 대신하여 검을 휘두르는 기사가 그것에 의문을 품고 만 것이다.

과연 이 자는 베어 마땅한 자인가?

그 판단은 조슈아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허나 조슈아의 안에 있는 인간이 그것을 격렬하게 부정했다.

이제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을 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기사의 의무와 불경한 인간성 사이에 놓인 조슈아는 망설이는 빛이 역력한 눈으로 엘렌 경을 바라보았다.

"이제 거의 다 끝났네. 프레데릭을 찾아 왕자 전하를 모시고 먼저 수도로 향하라 이르게. 그 후에 잔당 소탕작전을 속행하게나."

그렇게 명령한 엘렌 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뻘건 화염 사이로 사라졌다. 뒤돌아서 가는 그의 등에 비친 불꽃의 그림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악의를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슈아는 망연히 상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마을 어딘가에 있을 프레데릭을 찾아 등에 업힌 왕자를 인계하기만 하면 구출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터였다. 그러나 그에게 왕자의 신병을 넘기는 것이 정말로 왕자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본인이 직접 왕자를 데리고 수도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허나 자의적 판단을 근거로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게다가 판단의 근거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막연한 위협이라면.

독단적으로 왕자를 데리고 갈 경우 불타고 있는 마을의 주인들과 같은 역적으로 몰릴 가능성마저 있었다.

불현듯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두살배기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약 조슈아가 항명죄를 진 죄인이 되거나 역적으로 몰린다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했다.

항명죄라면 평생 비겁자의 일가라는 불명예스런 꼬리표를 달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역적으로 몰리게 된다면 더 이상의 미래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이제 조슈아의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이성과 본성의 대결이 아니었다.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와 처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비로서의 위기감이 격돌하고 있었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처자식을 위기에 빠트리는 일도, 처자식을 위해 기사도와 왕족의 생명을 내버리는 일도 그에게 있어서는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조슈아는 검을 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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