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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셔널 인터넷
게시물ID : humorstory_2610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일제히자살
추천 : 0
조회수 : 66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11/09 21:31:20
인터넷 개통기사는 오전 9시 52분에 찾아왔다. 10시까지 오겠다고 했는데, 그는 과연 적절한 시간대에 도착한 것이다. 10시 20분이나 30분을 예상했던 나로서는 조금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방문시간 그 자체로, 나는 업계간 경쟁이 얼마나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물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지만.



컴퓨터의 사망 소식은 갑작스러웠다. 어느 날 갑자기 모니터가 블루스크린으로 바뀌고, 스스로 재부팅이 된다. 그러니까 내가 쉴드아이템을 쥔 채, 2위와는 단 몇 발치 차이로 선두를 지키며 트랙을 질주하던 중이었다. 곧 다가올 우승의 희열과 혹시라도 바뀔 지 모르는 순위변동 가능성 그 혼돈의 스타디움에서 컴퓨터는 거짓말처럼 제3의 결말을 펼쳐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바보처럼 쉴드아이템을 쓰기 위해 컨트롤 버튼을 눌러보았던 것이다. 

아, 씨발.

피씨방에서 자주 들어봄직한 혹은 아홉시 뉴스에서 한번 들어본 듯한 그런 말이 내 입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아, 씨발'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담배 한 개비를 물고는 불을 붙였다. 그러면서도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길을 걷다 갑자기 욕지기가 솟구쳐 오르는 느낌이었는데, 그 느낌이 불길했다. 이건 암이었다. 아마도 컴퓨터를 새로 사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컴퓨터가 말썽을 일으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본체의 전원장치에 문제가 생겨 한동안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또 바쁘게 지내던 때라 인터넷 따위 하고 있을 시간도 없어서 통신사에 전화를 걸어 해지를 요청했던 것이다. 해지사유가 컴퓨터 고장이라고 하자, 통신사는 부랴부랴 직원을 급파했고 몇 만원 씩이나 하는 부품을 무상으로 교체해주었다. 인터넷 개통하면 현금을 몇 십만원 씩이나 준다고 하더니 과연 거짓말이 아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컴퓨터가 또 한번 고장이 난 것이다.



컴퓨터가 고장이 났는데, 나는 자연스럽게 통신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태연히 컴퓨터 좀 고쳐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자, 부랴부랴까지는 아니었지만 양치기소년의 두번째 거짓말에 반응하는 정도로 수리기사가 집을 찾아왔다. 그는 본체를 열어보고 램을 하나 뺐다가 부팅을 해보고, 다시 끼우고 부팅을 해보더니 이윽고 내게 눈길을 건넸다. 손가락으로는 본체를 가리키며, 지금 이 소리 들리시죠? 라고 했다. 삑 삐삐삐비 - 빅.

아이고, 저런. 그 소리는 누가 들었어도 심박수체크기가 멎는 바로 그 소리였다. 

메인보드를 교체하셔야겠네요. 십만 원이 넘을 겁니다. 하지만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군요. 컴퓨터의 수명을 보통 5년 정도라 보는데 혹시 사신 지가 얼마나 되셨죠?

ㅡ 5년 됐습니다.

컴퓨터를 새 것으로 교체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출장비는 다음 달 인터넷 요금에 합산돼서 나올 겁니다. 



수리기사가 가고 난 뒤, 나는 시험삼아 컴퓨터를 다시 켜보았다. 그리고 예의 그 소리가 들려왔다. 티비를 보다가도 끄고 방으로 돌아와 몇 번인가 컴퓨터를 켜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삑 삐삐삐비 - 빅 외의 다른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던가, 나는 장롱 속 고히 잠들어 있던 8년 된 노트북을 꺼내들었다. 컴퓨터의 수명이 고작 5년이라니, 그렇다면 이 노트북은 평균수명의 60%를 더 살았단 셈인데 어디 보자. 인간으로 치면, 80살을 평균수명이라 하고 그러니까 128살이구나. 말하자면, 나는 이 분이 백살 이후에 드신 나이에도 못 미치는 애송이에 불과했고, 그래서일까 나는 두 손으로 조심조심히 노트북을 열어 영정에 청주를 한 잔 따라 올리는 마음으로 전원을 켰다. 아니 켜드렸다.



어르신이 깨어나시는 속도에 대해선 뭐라고 해야 할까. 이제 막 잠에서 깼으면서 야, 다왔어 다왔어 바로 앞이야. 너 보인다 임마. 친구의 이런 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있어야 하는 그런 착잡함이랄까. 어찌됐든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야 화를 내든 뭐를 할텐데, 어르신은 그보다도 훨씬 늦게 도착하셨다.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르신은 거기까지였다. 익스플로러를 켜자 화를 내시며, 올스톱을 선언하신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전원버튼을 5초 간 누르고 있는 일 밖에는 없었다. 그것은 안락사였다.



멀쩡히까지는 아니어도 어쨌든 쓰고 있던 컴퓨터가 갑자기 고장이 나버렸고, 혹시나 해서 꺼내본 노트북은 역시나였다. 그러니까 이런 때를 대비해서 사람은 항상 얼마 정도의 돈을 갖고 있어야 했지만 나는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컴퓨터나 돈이 필요한 상황. 그 때 문자메시지 수신음이 울렸다. '인터넷 신규가입시 현금 30만원 또는 최신컴퓨터 지급' 그것은 때마침 주인을 옳게 찾아온 광고문자였고, 나는 당장에 전화를 걸었다. 때때로 문제의 해결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쉽게 풀려버리곤 한다. 결과론적으로, 고민이란 것들은 얼마나 시시한 것들인가.



전화를 받은 직원은 내일 당장 오전 10시까지 직원을 급파하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자, 기사는 정확히 9시 52분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가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기존의 인터넷선을 가위로 자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 방의 침대를 한 쪽으로 돌려놓고, 벽면의 전화선이 나오는 곳을 살펴보고는,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요."라고 했다. 이어서 "잠시만 아래 좀 내려갔다 올게요." 하더니, 몇 가지 장비를 들고왔다. 그리고 곧장 거실로 가서 티비가 얹혀진 장식장을 옆으로 젖히더니 벽면의 콘센트를 드러냈다. 거기서 선을 몇 미터 가량 뽑아내더니, 다시 내 방으로 와 똑같이 케이블을 뽑아냈고, 이번엔 건넌방으로 가서 다시 또 케이블을 뽑아냈다. 나도 몰랐던 우리집의 전화기 콘센트를 마치 이잡듯이 속속들이 다 차고 앉아서 톰크루즈처럼 정교하게 일을 해나갔다. 내 방에서 선을 잡아당기면 건넌방의 선이 들어가고, 다시 건넌방의 선을 잡아당기면 거실의 선이 들어가는 모양새가 과연 헐리우드 영화를 떠올리게 했다. 



한 시간 가량의 공사를 끝마친 기사는 내일 '최신형'컴퓨터를 들고 다시 오겠노라고 말하며, 유유히 사라져갔다. 나는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는 과연 3사가 치열히 경쟁하는 통신업계의 역군이었으며, 누구보다도 경쟁사회를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한 주인의식마저 깃들여 있었다. 경쟁이 치열하면 품질이나 서비스가 향상되는 시장의 원리. 순간 나는 시장경제의 부작용 등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과거에 저들에게 큰 도움을 준 적이 있었던가. 역시 그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기사가 돌아가고, 두어 시간 가량의 시간이 흐르자 전에 가입됐었던 통신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해지확인인 줄 알았던 그 전화는 실상 어떤 종류의 딜을 제시하는 그런 것이었다. 30만원 받으셨다구요? 오케이, 30받고 5만원 더. 게다가 요금은 천원 할인. 왜냐하면 당신은 3년간 약정요금제를 우수히 이행했던 브이아이피 고객이니까. 나는 왜 그런 것을 조금 더 일찍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었지만, 전화기 속 여자는 대답 대신 어서 그 경쟁사에 전화를 걸어 당장에 해지하라는 식으로만 말해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이 먼저 전화를 끊어야 한다고 말한 후, 나는 힘겹게 전화를 끊었다. 



"전에 가입했던 데서 35만원 주겠다더라.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다시 와서 이 선을 다 뽑아가든지 잘라가든지 알아서 하시고 아무튼 나는 기존의 통신사로 돌아가겠다. 아까 일하는 모습을 보고, 당신이 프로라는 것을 나는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러니 내 입장을 잘 이해할 것으로 믿는다.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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