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전쟁, 63개국이 참전하여 당시 독립국의 90% 이상이 전쟁에 휩쓸렸으며 5000 만명의 목숨을 빼앗아갔던 제 2차 세계대전.
이제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도 6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전쟁의 결과로 생겨난 동서진영의 구도는 어느 정도 와해되었지만 아직도 우리 근처에는 전쟁의 후유증이 남아있다.
이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비극의 극치를 달리는 전쟁 속에서도 휴머니즘이 살아있었던 그 세계로 들어가보자.
1.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의 히틀러(하단 좌측, X표) : 히틀러는 독일을 극단적으로 사랑한 민족주의자로 오스트리아인이면서도 어릴때부터 자신을 오스트리아인이 아닌 독일인으로 믿고 있었으며 독일이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독일군에 자원 입대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싸웠으며 훈장을 두번이나 받았다. 교전 중 당한 부상으로 병원에 있으면서 독일의 패전소식이 실린 신문을 보고 며칠을 울었다고 한다.
2. 군기 빠진 프랑스군 : 독일 총통 히틀러의 야심은 이미 천하에 드러났지만, 정말 최악의 상태가 오지 않는 한 다시 한번 독일과 정면으로 맞붙는 전면전만큼은 피하고 싶다는 것이 프랑스의 솔직한 심정이었 다. 프랑스인들은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그 악몽같은 참호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프 랑스 병사들은 비록 독일과 전쟁은 시작되었지만 그 전쟁을 확대시키지 않으려고 독일의 비위만 맞추었 고 설마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나약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독일이 프랑 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된지 6주만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
3. 스탈린그라드의 치열한 상호 공방전 : 독일,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의 추축국 4개국과 소련 간에 벌어진 제 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다. 사진에서는 폐허로 변해버린 스탈린그라드 시내를 소련군이 진격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추축군은 독일 제 4군과 제 6군의 전부와 제 4기갑군 대부분, 루마 니아군 7개 사단 중 5개 사단, 이탈리아 제 8군이 괴멸당하며 22만 명이 전사했으며 살아남은 독일군 9만 1000여명은 소련군에 항복함으로써 추축국은 전투에서 패하고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된다. 소련도 비록 승 리는 하였지만 군인과 민간인을 합하여 100만 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4.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인해 폐허로 변해버린 한 공장을 독일병사들이 둘러보고 있다.
5. 독일 심장부인 독일 국회 의사당에 게양되고 있는 소련국기 : 독일의 패망이 초읽기에 들어간 1945년 5월 1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이 소련국기를 게양하고 있다. 이 날 독일 통통 히틀러는 자 살하였고 다음날 독일의 방송들은 일제히 총통 히틀러의 죽음과 후임 총통은 되니츠 제독임을 방송하였다 . 독일의 종말이 왔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되니츠는 총통이 된 지 6일만인 5월 7일 무조건 항복을 결정하고 전군은 모든 저항을 중지하고 항복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로써 유럽-아프리카 방면에서의 제 2 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끝이 나게 되었다.
6. 스탈린의 오르간 : 독일군이 스탈린의 오르간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소련군의 다연장 로켓포. 독일군은 소련을 침략한 뒤 소련군 포로와 소련의 민간인들에게 무자비한 학살을 했지만 소련군이 패해서 도망가는 독일군을 쫓기 시작면서 소련군 역시 독일병사와 독일 민간인에 대한 처절한 복수극을 했다. 사진에서 보 이는 소련군의 다연장 로켓포는 독일 전역을 초토화 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7. 히로시마 원폭 투하 전의 사진
8.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후의 사진
9. 진주만의 해군기지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침몰하는 미국 함정 :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일본의 세계정복을 위해 꺾어야 할 궁극적인 적은 미국이라고 판단하여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의 미 해군 기지 를 기습 공격하였다. 이로써 태평양 전쟁이 막이 올랐으며 미국을 비롯하여 북남미 지역의 많은 국가들이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10. 제 2차 세계대전 유럽-북아프리카 전선 전황도
11. 600만 유대인의 한이 서려있는 가스실 : 유대인을 철저히 탄압하고 말살하려던 독일은 유대인을 한놈 씩 죽이려면 한도 끝도 없으므로 한꺼번에 죽일수 있는 가스실을 이용하였다. 다음은 전쟁 후 헤스라는 가스실 담당자의 증언 "가스실에 들어간 유대인은 보통 5분이면 다 죽었다. 그리고 아무리 길어야 7분을 넘지 못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느냐고? 그건 간단하다. 그들의 비명소리가 다 그치면 다 죽은 거니까."
12. 이집트의 토브룩에서의 전투 후 시가지가 온통 검은 연기로 뒤덥힌 가운데 노획한 이탈리아 전차에 캥거루를 그려넣고 있는 호주군 병사들 : 영국과 호주군은 이 전차들의 포탑을 뜯어내고 사막용 수송차로 활용했다
13. 제 2차 세계대전 참전국 명단
14.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영국 런던에서 집을 잃은 아이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다.
15. 일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중국의 한 도시에서 집과 부모를 잃은 한 어린이가 울고 있다. 전쟁의 비인간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16. 필리핀에 상륙하는 미군. 미군이 필리핀에서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미국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위 한 공군 비행장을 일본 본토 근방에서 얻게 되었다.
17. 유대인 강제 수용소의 모습. 독일은 이런 강제 수용소를 점령한 유럽 전역에 지어놓고 전쟁 기간 내 내 무고한 유대인과 집시족, 소련군 포로들을 잔인하게 학살해왔다. 이렇게 살해된 사람들의 숫자는 600 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18. 독일군에 의해 학살당한 유대인들의 시체
19. 처첨하게 살해한 유대인들을 불도저를 이용해서 치우고 있다.
20. 미국과 영국군에 의해 해방된 직후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어린이들의 모습.
21. 유대인의 처형실 모습 1 : 독일군은 보통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처형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유대인들 을 사진에서 보이는 처형실과 같은 곳에서 교수형에 처하거나 총을 난사해서 죽이기도 하였다.
22. 유대인 처형실의 모습 2 : 교수대와 단두대가 보인다.
23. 유대인 처형 장면 : 독일군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을 잡아들여 강제 수용소로 보내기도 하였지만 사진 에서와 같이 그 자리에서 즉각 사살하기도 하였다.
24.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끌고가는 독일군의 모습. 즐기는 듯한 표정이다.
25. 가미카제 특공대원들 : 이들은 일본군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자 비행기에 폭탄을 가득히 싣고 천황 폐하만세를 외치며 그대로 적의 함정에 뛰어들어 자폭하였다. 이런 자살 돌격작전에는 2000면 이상의 조 종사와 2000대 이상의 비행기가 투입되었다.
26. 1945년 5월 11일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일본의 오키나와전투에서 일본의 가미카제 자살돌격으로 미국의 항공모함이 불타고 있다.
27. 말레이시아의 일본군, 영국,인도군과 교전을 벌인다.
28. 1941년 일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중국의 민간인들
29. 남경 대학살 당시 일본군은 중국인들을 산채로 총검술 훈련의 대상으로 이용하였다.
30. 나뒹구는 중국인들의 시체더미들 : 남경 대학살 당시 중국의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은 30만명이 넘는 중국인들을 잔혹하게 살해하였다.
31. 중국인의 잘린 머리를 잘라서 그 귀를 잡고 들고 있는 일본군. 웃는 표정으로 봐서 양심의 가책은 전 혀 없어보인다.
32. 남경대학살 당시 생매장 당하는 중국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