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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공과 대만의 정씨정권 - (7)
게시물ID : history_21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유없음
추천 : 7
조회수 : 95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1/07/23 00:27:56
동생 정습을 죽여 반대파를 숙청한 정경은 정씨왕국의 제 2대 왕으로 등극한다. 이때 청에서는 정성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수하자 다시한번 침공을 감행하는 한편 덩달아 항복권유를 하지만 이 모두 정경에 의해 격퇴당하고 거절당했다. 정성공이 죽어서도 청의 입장에 있어선 여전히 뜻대로 되지 않는 대만이었을 것이다. 허나 청은 이로 좌절치 않고 어떻게든 견제하고자 애썼다. 앞서 말했듯, 청은 네덜란드와 연합하여 정씨정권을 쳤다고 했다. 바로 이때가 그 시기다. 결국엔 정경의 수군에 격파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소득은 있었다. 본래 정성공의 본거지이자 정씨정권에 있어선 중국본토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영토인 하문을 빼앗은 것이었다. 이로써 정씨정권은 완전히 대만 섬 하나만 남아 고립되게 된다.

이때가 1664년으로 당시 밖의 사정으로 기준을 잡아보자면 남명정권 최후의 황제였던 영력제 주유랑이 죽은 지 2년 되던 해이고 청에 있어선 강희제 치세 3년에 들어서던 때이다. 또한 정성공이 죽은지 2년이 흐른 시점이기도 하다. 이때는 잠시 청과 정씨정권이 전쟁의 소강기를 보이던 때로 '이후 큰 사건' 이 터지기 전까지는 이렇다할 사건이 없었다. 이때 정경은 아버지처럼 대만의 내치에 힘썼다. 그리고 대만 원주민들과 정씨조정의 큰 지지를 얻어내는데에 성공했다. 아버지 못지않게 내정에 재능을 보인 셈이다. 그리고 정경은 아버지의 작위였던 연평군왕에 더하여 동녕왕을 자칭하는데 그 이유는 중국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영토인 하문을 잃은 후 전체적으로 사기가 저하되자 새로이 시작하자는 취지에서 벌인 일이었다. 이렇게 약 10년이 흐른 후, 1673년에 큰 사건이 하나 터지게 된다. 그 사건이란 위에서 쓴 '이후 큰 사건'으로 일명 '삼번의 난' 이라고도 불리우기도 한다.

삼번의 난(三藩之亂)이란, 청나라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삼번, 즉 세 개의 번(藩 : 분봉지로 보면된다)이 난을 일으켰다는 말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이 세 개의 번을 통치하던 왕들이 터뜨린 전쟁이겠지만. 어쨌든 이 세명의 왕은 각자가 오삼계, 경정충, 상지신이란 이들로,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오삼계의 경우처럼 이들 모두는 본래 명나라의 장수들이었으나 청에 투항하여 그때에 이르기까지 왕으로 봉해져 있던 것이고 황제 강희제에게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불만이란 강희제의 권력강화시도에 대한 것으로, 그때 강희제는 번왕의 세력, 특이 이들 셋의 힘이 막강해지는 것을 꺼려했다고 한다. 그랬기에 그 힘을 약화시키고자 여러모로 견제를 했던 것인데 이것이 곧 부작용을 낳은 것이다. 그들의 반란이유는 안봐도 훤하다. 명색이 청조의 공신인데 대대손손 보답을 해주기는 커녕 땅 뺏고 군사 뺏아가니 펄펄 뛸 수밖에. 반란사유는 사사로웠지만 정작 그들이 내건 명분은 엉뚱하게도 명나라의 부흥이었다. 한때 명을 멸망시키는데에 동참하여 그 멸망속도를 가속화 시켰던 이들이 이젠 30여년만에 지금와서 복명을 외치고 나선 것이다. 특히나 이 오삼계 같은 경우는 투항하여 청군을 인솔하여 북경함락에 큰 공(?)을 세운 적도 있는 인물이다. 시대의 매국노에서 이젠 다시 패트리어트가 되겠다고 자청한 것인데 남들이 보기에 어떠했을런지는 뻔할 것이다.

이건 여담이지만 이들이 내건 명조부흥의 명분은 사실 민심을 얻기 위한 술책이었다. 자고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반란도 혁명이 될 수 있는 법이다. 허나 이 명분은 그다지 효과가 없었으니, 위에서도 말했지만 뭣보다 이 난 주모자들의 출신에서부터가 에러였다. 명을 멸망시킨 장본인들이 명조를 부흥시키겠다니, 무지렁이 백성들 눈에도 그저 민심을 얻으려는 수작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만큼 속 보이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강희제의 치세 하에 점차 안정되어가던 청나라였다. 민심도 이미 명나라보단 청나라에 쏠려있었고 그들로선 왜 자꾸 굳이 자신들의 수탈집단에 지나지 않던 그놈의 명나라를 부흥시키려 들까 하는 의문을 가졌음직하다. 그만큼 민심은 이미 청으로 돌아서있었고 결과적으로 삼번의 난은 실패하게 된다.

굳이 삼번의 난을 얘기한 이유는 이 난리 역시 대만의 정씨정권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 청에서 난이 벌어지자 정경은 이때를 기회로 보아 청을 칠 궁리를 했다. 그때 때마침 반란의 주모자들 중 하나인 경정충에게서 연락이 온다. 자기들의 거병에 편승하여 함께 군을 일으켜 청을 쳐준다면 그 대가로 복건성과 절강성성 일부를 떼주겠다는 통큰 제안이었다. 하문의 상실이후로 늘상 중국본토 재진출에 대한 꿈을 품어오던 정경이었다. 중국진출의 차기대안으로 필리핀에 진출하려던 계획도 바로 접고 그 정벌군을 곧장 그 난에 투입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경은 흐뭇했을 것이다. 그도 삼번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힘이라면 청과 대적할 수 있다 여겨 내린 결정이자 체결한 동맹이었을 것이다. 허나 그는 곧 뒤통수를 당하게 된다. 참으로 예상치 못했던 경정충의 일방적 배신이 그것이었다. 

그때 오삼계, 경정충, 상지신의 초반기세는 대단했다고 한다. 토벌나오는 청군을 잇달아 격파하고 수도 북경을 향해 북상하던 중 어느 순간부터 패전의 조짐이 보이더니 1674년을 시작으로 삼번 연합군은 패배를 거듭하게 된다. 결국엔 1676년, 상지신이 투항하고 경정충마저 항복할 낌새를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이때 정경의 병력이 경정충과 함께 있었던 것인데 아무래도 승산이 없다여긴 경정충은 청에 사로잡혀 목이 달아나는 걸 방지하고자 정경의 군대를 공격하는 것을 항복선물로 가져가고자 했던 것이다. 정경에겐 실로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었을 것이도 그저 경정충이 죽일 놈으로 보였겠지만 경정충은 너무나도 다급했던 모양이다. 청과 대립하는 정경을 침으로서 자신의 죄를 덜어 보고자 했을 것이다. 

허나 정경이라고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병력 내주고 영토도 잃게 되면 그야말로 국제적 호구가 되는 것이었기에 그는 경정충의 본거지, 복건성을 쳐 남부지역을 점령하는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청군과 경정충이 연합하여 공격해오니 정경은 애써 획득했던 복건을 다 잃고 후퇴하는 꼴이 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병력만 잔뜩 잃은 셈이었다. 이 패배를 계기로 정경은 홧병을 얻게 되어 병상에 눕게 된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난, 즉 삼번의 난도 오삼계의 죽음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니 그때가 1678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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