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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진 (서울대명예교수,현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논문 안중근...1
게시물ID : history_30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나래하
추천 : 2
조회수 : 83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1/11/13 02:01:16
이태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대한 재증명.
- 칸트철학 의 평화사상 과의 조우

 발췌(抄録)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대한 지금까지의 연구상황을 자료의 발굴과의 관계에서 정리하였다.
특히,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1970년대에 일본에서 [안응7역사安應七歷史] 와 [동양평화론] 이 발견됨으로써 드디어 윤곽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일본의 외교 사료관(外交史料館) 에 소장 되어온 안중근에 대한 취조 자료가 영인본의 형태로 한국내에 소개된것으로 인하여 동양평화론의 연구는 활발히 행해지고 있다.
이 자료집에는, 안중근이 1910년 2월 17일에 여순(旅順)의 고등법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조사한 동양의 평화에 대한 실행방책에 관한 진술의 내용이 청취서(조서)란 명칭으로 그대로 남아있었기에,
그가 구상한 동양평화의 회의체(의결을 통해서 의사를 결정하는 기관이나 단체.)의 내용이 밝혀졌다.
그는, 한중일 3국의 공동군대를 여순에 배치하는 반면, 동양평화회의체의 산하에 3국 공통통화를 발행하기위한 은행의 설치함과 향후 태국, 인도 등의 가맹국을 가입시키는것 을 구상하고있었다.
그리고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칸트의 [영구평화론永久平和論]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양계초(
梁啓超,린친차오
) 의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 에 소개된 칸트의 학설과 그의 동양평화론의 내용을 비교하여 검증했다. 
마지막으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10년후의 기미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 정강(政綱, 정부 또는 정당이나 정치 집단에서 국민에게 공약하여 이루고자 하는 정책의 큰 줄기.) 과의 사상적상통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키워드.

이토히로부미, 칸트, 동양평화론, 영구평화론, 금융공동체

1. 처음으로 ; 자료의 간행과 연구의 현상
2. 동양평화론에 대한 문헌적 검토
3. [동양평화론] 연구에 관한 2개의 새 시각
4. 칸트의 영구평화론의 영향설의 검증
5. 결론 ;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의 관계

1. 처음으로 ; 자료의 간행과 연구의 현상


  안중근에 의한 하얼빈의거는 한국근대의 독립운동사에 두어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는 대 사건이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학계가 지금까지 그것에 걸맞은 연구성과를 올려왔냐하면 의문이다. 의거100 주년을 맞아, 
이것에대한 반성적 성찰이 절실히 요구된다.
안중근에 대해 국가적레벨의 추장(推奬)은 1959년 3월에 한국의 남산에 동상의 건립이 처음이었다.
해방후, 10여년이 지난후였다. 
계속해서 1962년 3.1절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이  수여되었고, 1970년에는 안중근의사숭모회가 발족하고,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세워졌다.
(안중근의사숭모회, 1979년)
 하지만, 당시 학계에선 자료의 부재에 의해 연구가 별로 진행되지 않는 상태였다. 
옥중자서전[안응칠역사], 그리고 동아시아 3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 [동양평화론]등이 발견된 것 도 이 무렵 이다.
 1970년에 최서면(崔書勉)교수 에 의해 일본 동경의 칸다神田의 고서점에서[안응칠역사]의 일본어역판이 발견되어, 
1979년에는 김정명 박사에 의해 일본의 국회도서관의 헌정자료실에 소장 되어있던 7조청미관계문서(7条清美関係文書)에서 한문본의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복사합본이 발견되어있다.
 (김연갑, 1984) 
안중근에대한 연구는 이걸로 드디어 단서를 잡은것이다.
 1976년,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는 통감부의 지시에 의해 실행되어온 조사, 공판관련의 기록을 수집해,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제6권, 제7권을 간행했다.
이것을 계기로 마침내 깊이 파고든 실증적인 연구가 진행되게 되었다. 
이 위원회가 , 1988~1994년 동안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의 영인본이 간행된 것도 연구에 크게 공헌했다.
 게다가, 1995년에 한국의 국가보훈청이 일본의 외교사료관이 소장하고 있던 자료 
(이토공작의 만주시찰 1건 , 이토공작조난에 관한 각국에서의 조시(조의) 신청건)를 입수하고,
[아시아제1의협안중근]이라는 자료집을 간행한것도 연구에 탄력을 주었다.
 [안중근사건]에 대한 일본 측의 수사는 크게 4단계로 되어있다. 
1. 여순지방법원 의 검찰관.미조부치타카오(溝淵孝雄)에 의한 수십번의 심문
2. 외무성이 관련지역에 영사관의 네트워크를 이용한 정보의 수집.
3. 통감부가 경시청의 경시(경찰관) 사카이(境喜明)를 여순에 파견하고 관련자의 조사한것.
4. 육군 참모부의 지휘하에 한국주차군의 헌병사령부가 2명의 헌병을 승려로 위장하고, 블라디보스토크 관계지역에 투입해, 현지상황을 탐문한 것이다.
이 중 1. 은 법원이 사건에 대한 공판을 노리고 사건을 실질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던 취조이며.
나머지 2,3,4 는 배후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김현영 金玄栄 , 2009)
이중, 1은 통감부에 의한 謄写本(복사본)으로 소장되어, 
국사편찬편찬위원회가 출판한 [한국독립운동사자료]에 수록되었다.
즉, 이 간행자료에 의해 조사와 공판에 관한 기록은 거의 갖추어진 것이다.
 당시, 일본정부는 러시아정부와의 교섭을 통해 [범인] 안중근의 신병을 하얼빈에서 인계 하는것에 성공해, 사건의 처리가 관동도독부 에서 진행하도록
외무대신 (고무라 쥬타로 小村寿太郎)을 사건처리의 총책임자로 임명한다. 외무성만이 관동도독부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이러한 조치는 사법부가 공판에 대해 독립권을 주장하는 여지를 배재하는 목적이 있었다.
이 사건은 정치적 , 군사적 성격이 강해 사법부가 개입하는 경우, 국제법을 적용해 [범인]의 사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 일본정부는 일본정부는 이사건을 외무성이 관할하도록 하고, 정치적 처리 방침을 택했다.
그리고, 관동도독부를 총괄하는 외무성의 주관으로, 10월 28일에는 외무성의 정무국장을 여순 현지에 보내 전두지휘를  취하했다.
 [안중근사건]에 대한 일본측의 기록은 이렇게 법원의 조사와 공판, 
외무성의 네트워크에 의한 정보의 수집, 
경시청의 조사,
육군측에 의한 별도의 정보의 수집과  의견 교환 등의 관한 문서에 크게 나뉜다.
주관 부처의 외무성이 소장하고 있는 관련 기록  즉, 외교사료관 소장의 [아주제1의협안중근(아주:아시아)] (1995) 는 연구자료 로서 매우 중요하다.
이와같은 자료의 간행에 힘입어, 2000년에 들어와 안중근에 관한 연구는 양적으로 증가하고있다.
이렇게 지금까지의 관련기관이 자료를 간행해온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결과를 본다면, 만족 할 수 있는 상태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육군 참모나 한국주답군사령부(韓国駐剳軍司令部) 가 작성한 자료는 확보 되지 않은것이 현실이다.
 또한 [아주제일의협안중근] (1995)의 경우, 외교사료관의 소장 상태와 일치하지않는 편집상의 실수 그리고 교란이 많고,
이것에 대한 시정작업이 필요하다.
또한  연구를 활성화 하기 위해선, 각 자료의 관계에 대한 설명과 이용 가이드등을 작성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연구에 뺄 수 없는 내용의 색인작업이 전혀 진행되어있지 않은 점도 처리해야 할 것 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정부는 안중근을 단독범으로 단정해 사형에 처했고, 상세히 배후관계를 수사함 으로서
발견된 항일독립운동조직에 대해 별도의 엄격한 보복, 탄압 (105인 사건, 안명근 安明根 사건) 을 했음으로 , 배후관계의 
수사문서는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 , 이사건에 대한 일본측의 조사자료는 1910년대의 항일 독립운동전선에 대한 연구와 이해에 빼놓을수없는 것이며, 
이것에 대한 획기적인 정리작업이 요구된다.
 자료의 발굴 그리고 간행에 힘입어 1980년이후, 선구적인 연구가 많이 행해진 것 은 매우 칭찬해야 할 것인 한편,
넘치는 자료 중, 쉽게 처리 할 수 있는 것만 몰두 한 경향이 있었단 점은 반성 해야 할 점이다.
냉정히 되돌아보면, 하얼빈 의거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한국의 근.현대사의 도도한 흐름에 차지하는 위치는 
아직 충분히 밝혀져 있지 않다.
이 한계를 타개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지적했듯이 관련자료에 대한 총합적 재정리 작업이 진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논문은 그의 동양평화론을 중심으로 연구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가지고 싶다.







일어 논문이라 해석 해서 올리고있습니다 하루에 한파트씩 업로드하겠습니다.
오역확율 조금 있을겁니다^^.


그런데 이런거 올려도 되나???

이태진 교수님허락받아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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