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려는 내용 자체는 몇 년 전 얘기지만 몇 일 전에 추억을 떠오르게 만들어준 사건이 생겨서 글을 써봅니다
대학생 때 일입니다
1학년 새내기로 지내는 동안에 제 자취방을 빈 소주병으로 잠 잘 자리도 없이 가득 채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거의 매일을 취하거나 숙취에 쩔거나 하는 상태로 몽롱하게 있다보니 어느새 2학년이 되어있었어요
그때 저는 동아리를 하나 하고 있었는데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에 그 누나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그때 누나가 쓰고온 촌스러운 안경이... 원색의 뿔테안경이었어요(소름)
다른 공대를 다니다가 수능을 다시 쳐서 저희 대학교로 온 그 누나는 저보다 나이가 한 살 많았지만
저희 동아리는 기수제를 강조하는지라 저에게 선배라 부르며 존댓말을 써야했습니다
다른 학교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나이가 우선인 저희 학교에서는 흔치 않은 관계였어요ㅋㅋ
오빠였으면 오빠지 선배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사람은 몇몇 경우 제외하고 거의 없었던것 같네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학점따위 내던진 저와는 다르게 공부도 잘했구요
주변 사람들을 잘 챙겨줘서 동기들과도 사이가 좋았어요
동아리 생활을 하며 조금씩 친해졌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 다른 감정은 없었어요
당시에 전 여자친구도 있었고
누나가 딱히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니라서인지 만났을때도 꼭 필요한 얘기 아니면 할 말도 없었어요
그리고 그 해 여름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졌습니다...(울먹)
생애 첫 연애였기에 이별의 타격도 컸었어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혼이 반 쯤 나가있었습니다
걸어다니는 시체였어요 걍
한 1,2주 정도 제대로 씻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하는 와중에 동아리 엠티에 참석했습니다ㅎㅎ
공기좋은곳가서 놀고 사람들 만나서 술도 마시고 하면 마음이 좀 추스려질까 했는데
전혀 아니었어요ㅋㅋ 오히려 사람들이랑 있으니 혼자 더 외롭고 맘이 아팠습니다
저녁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고기 종류도 다양하고 이것 저것 안주도 많았지만
입도 안대고 소주만 냅다 달렸습니다
위에서 부터 술 얘기를 계속 써서 마치 제가 술을 엄청 잘마실것 같이 써놓긴 했는데
사실 그렇게 끝장나게 잘 먹진 않아요 두병정도?
안주도 없이 빈속에 깡소주를 물마시는 속도로 때려넣고 나니 술기운이 확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즐겁긴 커녕 술기운에 감정만 더 벅차올라 점점 서글퍼졌어요
웃고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기가 너무 힘들어서 비틀거리며 펜션 밖으로 나갔습니다
엠티는 계곡으로 갔었는데 산중에 있는 펜션이라 골목 어귀로 나가면 불하나 없이 캄캄해서 꽤 위험했습니다
엠티 출발할때부터 술마시고 밖에 나가면 위험하다고 거듭 강조했었는데 취한 사람에게는 그런 경고따위 의미가 없었죠
동아리 회장형이 야 너 그러다 물에 빠지면 죽어 임마! 하고 소리지르는게 들렸습니다
무시하고 그냥 비틀비틀 휘청휘청 걸어나가는데
딱 마당을 지나 펜션 들어오는 입구 어귀에서 누가 제 팔을 확 잡아 끌더라구요
그 누나였습니다
선배 어디가요 하고 묻길래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얘기했더니 그럼 같이 가요 하고 제 팔을 잡아서 부축해줬습니다
그렇게 둘이 같이 나가서 밤공기 맞으며 걸었습니다
물론 그 순간에도 술기운에 어질어질하고 위액이 바깥 구경하고 싶다며 속을 두드려대고 있었지만
선배의 입장에서 후배에게 험한 꼴 보이기 싫었던 일말의 자존심으로 꾹 참고 버텼습니다
물놀이할 때 신고 들어간 슬리퍼가 마르지않아 축축했고 밤이슬에 젖은 풀들이 슬리퍼 틈 사이로 자꾸 들어와 찝찝한 와중에
서로 뻔한 얘기 하면서 걸었습니다 이별이 참 쉽지가 않다 금방 괜찮아 질꺼다 어떻다
같이 있는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뭔가가 있었어요
농담식으로 '오늘 완전 누나같네?'물었더니
'저도 다 해봤어요. 제가 누나에요 선배.'
하면서 웃었어요
그 뒤로 몇마디 더 했던거 같은데 눈을 떠보니 저는 변기를 잡고 화장실에 쓰려져있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더 속을 게워내고 수면방으로 가서 잠들었죠
엠티 끝나고 돌아와서는 필름이 끊긴 동안에 제가 누나한테 무슨 얘기를 했을지 불안해지더라구요
술기운에 혹시 이상한 말은 안했는지
일단 누나는 그 일에 대해 별 말 안했고 제가 특별히 이상한 얘기는 안한것같았어요
그 이후로도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누나가 저를 '선배'라고 부를 때 그 전과는 다른, 이상하게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