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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엔 너무 예쁜 나이 서른넷
게시물ID : lovestory_216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ED-VIRUS
추천 : 10
조회수 : 58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06/09/22 16:34:59
하늘이 노랗게 보였습니다.
땅이 마구 흔들려 발을 자꾸 헛딛었습니다.

마늘쪽같이 매끈하게 생긴 의사가 감정에 흔들림없이 말하더군요.

갑상선 암이라구요,
갑상성암중 가장 지독하고 승질 더러운 미분화암이라구요. 

갑상선암중 여포암, 유두암은 완치율이 높은데 이건 어렵다는군요.

슬픔보다 분노가 앞서더군요.
살면서 뭘 그렇게 잘못했나? 

인생에 복병이 숨어 있는 건 알겠는데 이건 너무 하다구요.

아버지 일찍 돌아 가시고 가난한 딸많은 집 맏딸로 태어나 
일하러 나가신 어머니 대신 동생들 업어 키우느라고 
한 여름 허리가 짓무르고 또래의 친구들은 절 왕따 시켰지요.
제 몸에서 드런 냄새난다구요. 

그렇겠지요. 허구헌날 똥기저귀 달고 사는 
어린 동생들 때로 쩔어 있는 포대기로 업고 살았으니까요. 

친구들이 재미나게 고무줄놀이 하는 거 손가락 빨면서 
지켜 볼 수 밖에요. 참 부러웠어요. 
나도 끼워주면 고무줄 놀이 아주 잘 할 것 같았는데..

생활이 너무 힘들고 몸이 고단한 어머니는 
늦은 밤 소주를 마셨지요. 맏딸인 제 앞에서 푸념하시면서..

.. 사는 게 왜 이렇게 모질고 힘드냐? 
새끼들때문에 살긴 살아야 하는디...

그때마다 저는 동생들 봐주기 싫다는 말을 꿀걱꿀걱 삼켰지요.

그래도 여자도 배워야 산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어머니 덕분에 
가까스로 여고를 졸업하고 서울 휘경동에 있는 작은 출판사에서 
교정일을 봤지요. 

골목이 너무 많은 동네라 미로같아서 
길을 잃어 버린 적도 있었어요. 그때마다 전 생각했지요. 
인생의 길은 잃어 버려선 안된다고.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길이 보일 거라고..

그런데 쉽지가 않았어요.

처음으로 설렘을 느끼고 마음을 연 남자친구가 
제가 직장을 그만 두니까 떠나더군요. 

그때 그친구는 휘경동 근처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었는데 
제가 번 돈을 나눠썼어요, 적은 월급으로 시골집에 보내고 
그 친구 책 사주고 그러면 남는 게 별로 없어 전 출판사에 딸린 
작은 방에서 먹고 잤지요. 라면도 참 맛있었어요.

젊고 꿈이 있었거든요. 전 시인이 되고 싶었지요.

근데 실연 당하니까 서울이 너무 춥고 무서웠어요. 
그래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갔지요. 

다행히 읍네 사진관에서 일하게 됐고 결혼도 했지요. 중매로요. 
다시 서울 로 왔어요 

남편은 별 말이 없었어요. 그냥 덤덤하게 살았지요.
그런데 예쁜 딸을 나으니까 세상이 달라 보였어요. 
너무 행복했어요.

전 부업으로 무청을 말려서 음식점에 배달햇지요. 
딸은 잘 키우고 싶었어요. 

그런데 남편이 이혼하자고 하는 거예요. 
전 너무 열심히 살고 있는데.. 

남편한테 여자가 있었는데 남편은 그 여자를 보며 
박꽃같이 환하게 웃더라구요. 
저한텐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웃음..

그래서 이혼하고 열심히 딸 키우는데...
이런 날벼락이 떨어졌어요. 게다가 남편이 딸 을 달라는 거예요. 
사는 형편이 좋아졌다고.. 친권은 아버지한데 있다나요.

전 갑자기 맥이 탁 풀렸어요. 
삶이 저한테만 너무 가혹하고 엄격한 것 같아 싫었어요. 
한번 싫다고 느끼니까 증말 진저리치게 싫더라구요. 
그래서 죽기로 맘 먹었지요. 

딸, 내 생명같이 소중한 딸은 
다행히 즈이아빠가 키운다니까.

암 치료하는 길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과정도 생략해버리고 
참 편할 것 같아서요. 어떻게 죽을까 생각했어요... 
수면제를 먹고 잠자듯이 죽는 게 젤루 나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약국을 돌며 약을 모으기로 했지요. 
근데 날씨가 너무 화사한 봄이더라구요. 
예쁜 빛깔의 봄옷 한벌 사입고 싶었어요. 아주 비싼 걸루요.

버스를 두번 갈아타고 명동 롯데로 갔지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너무 비싸서요.
그래도 옷사기를 포기할 수 없었어요,

열심히 살았지만 늘 너무 춥고 배고프고 외로웠던 제게
봄날같이 따뜻한 옷 한벌 마지막으로 선물하고 싶어서요.

눈 딱 감고 사려고 했는데 그래도 너무 비싸더군요.
결국은 남대문 시장에 가서 투피스 한벌 샀어요. 

구두도 샀구요. 잠안온다고 약도 샀구요. 
소량이라 더 많은 곳을 다녀야 할 것 같구요. 

그런데 전 약을 버렸어요.

암치료하느라 알게 된 친구 순영이가(그 친구도 갑상선암이예요)
책 한권을 선물했어요. 제목이 아주 긴..

엄마는 물방울 무늬 커튼을 만든다. 

딸의 유쾌한 인생을 위해서 
엄마는 물방울 무늬 커튼을 만든다 였는데 
표지에 써 있는 문구가 제 맘을 당겨서 읽어 봤어요.

제 나이와 비슷한 여주인공도 말기암이고 투병하면서
이제 겨우 일곱살인 딸한테 남기는 편지글이더군요.

저는 그 책에서 희망을 봤어요.

암[cancer]은 할 수 있다. [can sir]라는 군요.
그리고 어린 딸을 둔 엄마는 뭐든 함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그렇지요.
내 딸이 살면서 엄마가 얼마나 많이 필요하겠어요.

전 살기로 했어요.
암과도 싸우고 남편과도 싸워서 제 딸을 지키고 
그리고 제게 가혹한 제 운명과도 싸워보기로요...

딸이 혼자 긴 머리를 빗을 줄 알 때까지만 살았으면....
 
 

                    출처 : [다음 아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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