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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
게시물ID : humorstory_26248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일제히자살
추천 : 1
조회수 : 1026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1/11/15 23:37:28
만약 당신이 스무 살에 서울을 떠나 어딘가 미국같은 곳으로 갔다고 치자. 왜 갔냐면 글쎄, 그냥 공부같은 걸 하러 갔다고 해보자. 그리고 8년쯤 시간이 지나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인천공항 입국장에서부터 드는 감회가 어떠했을 지 이제 대략적으로 나에게 한번 말해보라. 아마 당신은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되지 않을까. 

<공항에 내리자마자 일단 그 냄새가 너무 반가웠어요. 첫 숨을 들이키는 순간 내가 한국에 돌아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죠. 공항버스에서 바라본 창 밖의 풍경은 정겹기 그지 없었고 제가 살던 8년 전의 집도 변한 게 하나도 없었죠. 다음 날 저는 약속이 있어 외출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옷장을 뒤지다가 예전에 쓰던 교통카드 한 장을 발견했죠. 저는 그것을 가지고 나가 시험삼아 지하철개찰구에 올려보았는데 삑 소리와 함께 마법처럼 문이 열리더군요. 맞아요, 서울은 변한 게 없었죠. 모든 게 그대로였어요.>



*      *      *



인천에서 출발해 엘에이에 머물다가 다시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꼬박 8년이 걸렸다. 많은 일이 있었을 수도, 혹은 아무 일도 없었을 수도 있는 시간이다. 몇 개의 학위가 이력서에 추가됐고, 이태원에서 흑인을 만나 길안내를 할 수 있게 됐으며, 그레이스아나토미를 자막없이 볼 수도 있게 됐다. 그러나 이력서를 넣을 만한 회사는 아직 없었으며, 이태원의 흑인들은 좀처럼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미드를 자막없이 볼 수 있다는게 어디냐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그레이스아나토미를 보고 있던 중 난데없이 뉴스앵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소식입니다.'

그것은 내 문자메시지 수신음이었다.

ㅡ 소개팅 할래?

머야, 누군데. 몇 살이야. 직업은. 잘생겼니. 

ㅡ !! 하나씩 물어봐, 좀.

몇 살이야.

ㅡ 두 살 많아.

'다음 소식입니다.'

ㅡ 토요일 2시 명동이야. 늦으면 알지?



소개팅을 하기로 한 날은 비가 왔다. 그냥 비가 온 게 아니라 하늘이 뚫린 것 같은 폭우였다. 우산을 쓰고 있다고는 하지만 비는 여기저기로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그렇게 명동 길바닥에서 몇 분인가를 서 있었는데 어렴풋이 주선자가 어떤 남자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남자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무슨 논바닥에 수문을 정비하러 오는 걸음걸이로 이 쪽에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첫인상에 대해서는.. 말을 말자.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논바닥이라고 합니다. 정말이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남자는 비가 바가지로 쏟아지고 있는 거리에서 뭐라뭐라 장황한 첫인사를 건넸다. 주선자와는 어떤 사이이며, 오는 길에 차가 막혀 늦었다느니 그런 소리를 하다가는 또 갑자기 스테이크 좋아하시느냐고 묻기도 했다. 어떤 완고한 채식주의자라도 그 상황에서 음식의 기호를 논하기는 어려웠을 터, 나는 좋아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정말 샐러드만 먹을 작정으로 찾아들어간 곳은 그러니까 빕스였다. 

"비가 많이 오니까 일단 들어가시죠."

놀랍게도 남자는 그렇게 말을 했었던 것 같다.



촉촉해진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이 주선자는 들어오자마자 잠깐 화장실 좀 갔다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나는 어떤 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음 소식입니다.' 

황급히 전화기의 수신모드를 진동으로 바꾸며, 나는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ㅡ 언니, 나 먼저 갈게. 이따 전화해~

전화기를 가방에 넣고, 나는 남자를 바라봤다. 뭐랄까, 그 표정에 대해선.. 말을 말자.



"나이가 두 살 많으시다고 들었어요." 힘겹게 나는 첫마디를 뗐다.

"네, J(주선자)보다 제가 두 살 오빠죠. 헤헤. N씨(나)는 저보다 한 살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허허."

'네, 그렇죠. 제가 그 년보다 세 살 언니니깐요. '

남자의 나이는 나보다 두 살이 많은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J보다 두 살이 많은 것이었고, 그래서 내 나이보다는 한 살이 어렸다. 나보다 어린 줄 알았으면 소개팅을 나온다고 하지도 않았을 텐데 나는 갑자기 빕스의 모든 것이 증오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연하남은 질색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게 내 불찰이거니 단념하며 샐러드를 씹는데, 입 안에 드레싱이 겉도는 게 자꾸만 욕지기가 솟구쳤다. 남자는 그래도 혼자서 이런저런 말들을 열심히 해댔는데, 누가 듣든말든 자기주장을 펼치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뭔가 식물인간을 상대로 책을 읽어주는 느낌의 비교적 온화한 독백이었다. 그것은 대충 이랬다. 



<제가 원래 경찰이 꿈이었거든요. 성격이 제가 또 무던한 성격이라 그런지 엉덩이 붙이고 열 몇 시간씩 공부하는 게 체질에 맞는 것도 같더라구요. 두 번 떨어지긴 했지만, 경찰시험에 합격을 했더랬죠. 그런데 경찰 일이라는 게 사실 환경미화원하고 다를 게 없더라구요. 그 사람들이야 쓰레기를 치우지만 우리는 인간쓰레기를 치워야 됐었거든요. 그래도 그건 어느정도 예상했던 일이라 견딜만 했는데, 제가 일하던 첫 해에 광화문이다 강남역이다 어디다어디다 해서 집단시위가 또 엄청 많았거든요. 몇 만 명씩 그렇게 떼로 모여있으면, 관할이고 뭐고 다 소용없는거 아시죠? 모르시나. 아무튼, 그냥 밤낮없이 나가서 돌이나 맞다가 돌아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루는 취객한테 맞고, 하루는 시위대한테 맞고 그러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사표를 쓴 겁니다. 저 공직에서 사표쓰고 나온 놈입니다. 허허>



건조한 리액션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이야기의 결말까지 밀고 나가는 남자의 이야기가 듣다보니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해서, 나는 건성이긴 했지만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남자의 형제는 무려 5남매였는데, 자기가 그 중 셋째고 집도 그럭저럭 잘 사는 편인 것 같았다. 지금은 YBM에서 영어강사를 하고 있는데, 그 전에 잠깐 현대홈쇼핑에서 일했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성실한 것 같기도 했고, 끈기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집이 잘 살아서인지 본인이 성실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소유의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심지어 자전거도 있다고 했다.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입이 텁텁한지 물로 입안을 헹구고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온다며 일어서는데 남자의 주머니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저기, 이거 떨어졌는데요. 이거 그런데...

그것은 비오는 날 50%가 할인되는 빕스의 할인쿠폰이었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남자는 갑자기 말수가 줄어들어, 마시지도 않는 물컵만 계속해서 만져대고 있었다. 장황했던 청춘스토리에 비해 꽤나 길었던 침묵이었는데, 남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술 한잔 하러 가실래요?"

지금이요? 나는 되물었다. 시간은 고작 네 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다. 커피는 어떠세요?

그래서 찾아간 커피숍은 카페베네나 스타벅스가 아닌 카페벅스나 스타베네 쯤 되는 엄청 구질구질한 이상한 다방같은 곳이었다. 

'커피 참 드럽게 맛있네요. 분위기는 여기가 서울인가 싶을 정도구요.'

티타임이라기엔, 뭔가 국밥 한 그릇을 강요로 먹어치우고 있는 듯한 남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희한한 웃음이 터져나올 뻔 했다. 저런 걸 매력이라 느끼는 여자도 어딘가에 있긴 있을 것이다. 찾기는 힘들겠지만. 



어이구 이제 좀 집에 갑시다. 오늘따라 드럽게 피곤하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국밥 한 그릇을 다 해치운 것 같은 표정을 한 남자가 입을 스윽 닦더니 이렇게 말했다.

ㅡ 우리 다음주에도 만날까요.

그리고는 마치 통신사 대리점 직원과 신규회원이 뭔가를 테스트하는 것처럼 각자 전화기에 뜬 서로의 번호를 확인했다. 남자의 전화번호 저장 목적이야 내 알 바가 아니고, 나는 단지 이 번호만큼은 안 받아야겠다는 생각에서 번호를 저장했다. 그리고 헤어지려는데 남자는 주머니에서 또 뭔가를 꺼냈다. 선물이라며 건넨 것은 문구점에서나 팔 법한 촌스러운 머리끈이었다. 



*



1주일 후.



'다음 소식입니다.'

ㅡ 오빠가 언니 좋대. 한번만 더 만나봐. 

J에게서 온 문자메시지였다. 나는 그것을 가볍게 무시하며 전화기를 침대 위로 던졌다. 그러자 이번엔 전화벨이 울려댔다. 그 남자였다. 한참을 울리다가 끊어진 전화기를 들어 나는 J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도대체 그 남자 정체가 뭐냐.' 

답장은 바로 왔다. 

ㅡ 언니, 오빠 전화 왜 안받아?

'정체가 뭐냐고.'

ㅡ 전화는 받아, 그러지 말고.

'나 이따 4시에 진짜 약속 있단 말이야.'

ㅡ 그럼 같이 점심만 먹고, 시간 맞춰 나오면 되겠네. 



대체 정체가 뭘까. 그런 마음으로 나는 한번 더 약속장소에 나가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남자가 뭔가 베일에 싸인 매력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다만 정말 순수하게 궁금했다. 정체가 뭘까. 그러니까 학문적인 그런 호기심. 기회가 되면 한번 물어보자는 심산으로 나는 홍대에 도착했다. 남자는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KFC앞에서도 단번에 눈에 띄었다. 논바닥이다, 논바닥이 나타났다. 이상하게 뭔가 반가운 것 같기도 했다. 남자는 예의 그 걸음걸이로 다가와 반가운 듯 인사했다. 그리고는 시끄러운 길바닥에서 뭔가 시시콜콜 젊음의 거리가 어쩌고 저쩌고 쓰잘데기없는 말만을 한참이나 늘어놓았다. 

'어휴, 그냥 햄버거나 하나씩 먹고 헤어집시다. 근데 당신 정체가 뭐요?'

그 말이 턱 밑까지 올라왔다.



"배고프시죠?" 남자가 물었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하면서 남자는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대체 또 어디로 가는 건가 싶은 마음으로 따라간 곳의 간판은 '박가부대찌개'였다.

홍대의 그 무수한 레스토랑들을 모두 다 탈락시키며 제2차 데이트장소로 선정된 곳은 다름아닌 박씨가 운영하는 부대찌개 집이었다. 이 남자 설마 어디서 이상한 연애매뉴얼 따위를 구해서 읽는 건가. 첫만남은 레스토랑 두번째 만남은 부대찌개 세번째는 나도몰라잉 그런 패턴의 20세기 찌라시 말이다. 만약 그런 걸 참고하는 중이라면, 다음 대사는 이런 건가.

'이모, 여기 부대찌개 좀 주세요. 라면사리 하나랑 소주 하나도 같이요.'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대형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남자는 그저 부대찌개가 먹고 싶었던 모양이었는지 별 말 없이 공기밥 한 그릇과 깍두기 두 접시를 삽시간에 해치웠다. 

"이제 커피 마시러 가죠. N씨 커피 좋아하시죠? 헤헤."

'따라오시죠'가 묵음으로 처리된 의기양양한 남자의 발걸음은 어느새 와플가게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잠깐만 여기 계세요." 라고 말한 후, 혼자 가게에 들어갔다. 

혹시나 내가 아까 부대찌개를 잘 안 먹는 것을 보고 와플을 사주려나 보다 생각했는데,

역시나 남자는 커피 두 잔만을 양손에 든 채 가게에서 나왔다. 

왜 혼자 들어간 것일까.



"실은 제가 오늘 선약이 있었는데요. 시간을 좀 늦췄거든요.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애요."

커피를 좀 마시는 척 하다가, 내가 말했다.

남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그럼 내일 같이 영화를 보자고 했다. 

'그래요. 근데 당신 정체가 뭐요?'

정말 그런 말을 해볼까 하다가, 나는 그냥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고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본 후, 주변의 쓰레기통에 커피를 그대로 쳐 넣었다.



*



그 날 저녁 나는 오랜만에 연락이 재개된 아는 오빠를 만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도 대화가 잘 통했고, 무엇보다 편안함이 느껴졌다. 이 오빠는 지금 사귀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 때였다. 

'다음 소식입니다.'

깜짝이야 뭐야, 이거. 

"아 오빠 이거 내 문자 오는 소리야. 놀랐어?"

야, 좀 바꿔. 뭐야, 이게. 깜짝 놀랐네.



ㅡ 내일 저녁 8시에 영화 괜찮죠?

남자에게서 온 문자메시지였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핸드폰의 배터리같은 걸 빼버리고 싶었는데, 요즘 전화는 일체형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답장을 보낼까 하다가 그냥 수신음을 진동으로만 바꿔놓고 전화기를 가방에 넣으려는데, 한 통의 문자메시지가 타이밍좋게 또 도착했다.

ㅡ 오늘 고백하면, 크리스마스에는 50일이 된대요.

'아, 그렇군요. 그건 그렇고 당신 정체가 뭐요.' 실제로 그런 답장을 보내려는 찰나에 남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N씨가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갑자기 너무 보고 싶어졌습니다."

남자는 그런 90년대 애니콜 광고같은 말만을 남긴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 대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온다는 것일까. 조금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고 나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30분 뒤, 전화를 받고 가게 앞을 나가보니 합석한다고 했던 친구들이 도착해 있었다. 우리는 세 시인가 네 시인가 까지 술을 마셨고 각자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남자에게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열두 시가 넘어 잠에서 깨 일어나보니, 남자로부터 한 통의 부재중전화와 한 통의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ㅡ 지금 N씨 집 앞입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집주소는 J에게 물어봤더니 알려주더군요. 죄송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보고싶네요.

집 앞을 나가보니, 2001년식 검은색 그랜져XG가 방금 막 세차를 끝낸 듯한 모습으로 눈부시게 서 있었다. 남자는 등 뒤에 꽃다발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은 남자의 왜소한 등에 비해 민망할 정도로 큰 꽃다발이었다. 

"뭐하는 거에요?" 내가 물었다.

"잠깐만 타세요." 남자가 말했다.

"됐어요, 돌아가세요."

"N씨, 혹시 제 정체가 궁금하시지 않나요?"

"네?"

"제가 누군지 궁금하시지 않냐구요."

"별루요."

"기억이 나지 않으세요?"

"네?"

"이걸 한번 보실래요?"

그리고 남자는 등 뒤에서 예의 그 꽃다발을 꺼내 보이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은 꽃다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꿈이었다. 



*      *      *



만약 당신이 스무 살에 서울을 떠나 어딘가 미국같은 곳으로 갔다고 치자. 왜 갔냐면 글쎄, 그냥 공부같은 걸 하러 갔다고 해보자. 그리고 8년쯤 시간이 지나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인천공항 입국장에서부터 드는 감회가 어떠했을 지 이제 대략적으로 나에게 한번 말해보라. 아마 당신은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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