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시당초 흥선대원군은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맡겨진 역사의 책무는 왕이 되어야 감당할 수 있는 책무였죠.
여기서부터 비극의 단초가 놓여져 있었던 겁니다.
집권 후 10년간의 개혁정치는 실로 눈부신 것이었죠.
세도정치기에 무너져가던 조선왕조의 국가기구는 얼추 그 기능을 회복한 듯 보였으니까요. 특히 국방 분야에 관한 한 두차례의 양요를 무사히 치룰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공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권력은 왕의 신임에 의한 위임에 근거한 것이라는 겁니다. 조대비의 섭정기에는 조대비의 위임으로 그의 권력이 가능했던 것이고 이제 섭정기가 끝나가게 되면서는 왕의 위임이 있어야 비로소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거였던 거죠.
장성한 왕은 더 이상 그러기를 거부했고, 위임을 철회했고 왕비와 연합하여 대원군이 조정 곳곳에 부식시켜둔 세력을 모조리 축출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권좌에서 밀려난 이후 그는 더 이상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도 없고, 영향력을 행사해서도 안되는 입장이 된 셈이죠.
친정체제로 돌입한 왕은 그동안 아버지가 구축해 놨던 여러 조치를 무위로 돌려 놓는 처사로 일관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군대조차도 잠재적인 쿠데타 세력으로 보고 악화시키는 정책으로 일관하죠. 운요호사건때 전투를 벌였던 군인들이 대부분 몇달씩 임금이 밀려 있었고, 무기조차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상태라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죠.
아버지가 한 것이라면 무조건 반대로 돌려버리는 처사만 벌이지 않았더라도 고종 친정체제는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을 겁니다.
PS) 고종이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한 건 딱 두가지입니다. 경복궁 중건을 완성해서 새 집으로 이사간 것과 당백전을 모방하여 당오전을 발행한 겁니다. 당백전 발행 가지고 대원군을 엄청 까대지만 당오전이 더욱 극악한 후유증을 가져왔다는 점은 대부분 모르더군요. 민씨 척족정권이 강행했던 당오전은 사실상 조선 유통경제의 등뼈를 완전히 부러뜨렸던 악정 중에 악정이죠. 반면 당백전은 폐단이 발견되자 곧 철회됩니다.
PS) 아이러니한 건 그가 극복하고자 하는 세도정치체제가 바로 자신의 권력체제였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