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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개화기의 풍운아, 승려 이동인
게시물ID : history_217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urelius
추천 : 3
조회수 : 75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6/25 20:43:54
구한말 개화기의 유명인사들이리고 하면 대부분 김옥균, 유길준 또는 김홍집을 떠올리실 겁니다. 그런데 또 한 명의 풍운아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이동인"이었습니다. 아마 그의 이름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할 겁니다. 

어느 학자가 말하길 그는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혜성처럼 사라진 인물인데 그것은 그가 실질적으로 활동한 기간이 8개월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그가 처음 조선 정계에 진출한 것은 1880년이었고, 그때 그는 폭넓은 국제정세 시야 덕분에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고종의 명을 받들어 일본에 밀사로 파견되어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공사들과도 접촉하면서 조선이 다른 나라들과 수교하기 전에 사전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1881년에 다시 돌아왔는데 3월, 외출하는 길에 돌연 종적을 감추게 됩니다. 학자들이 추측하길 암살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그를 위협적인 존재 또는 일본의 스파이라고 판단한 수구파에 의해 참살당했다는 것입니다. 

이동인... 어쩌면 김옥균이나 유길준보다 더 큰 안목과 대담함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역사무대에 아주 짧게 등장했다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오늘은 그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원래 불교 승려로 당시 조선 사회로 치면 가장 미천한 신분에 속했습니다. 그런 그가 개화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군함을 목격한 충격이라고 하는데 이 때부터 그는 새로운 세계에 대해 갈증을 느꼈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조선의 조정에 주목받게 된 것은 김홍집의 천거 덕분입니다. 일본 시찰을 위해 파견된 신사유람단의 일원이었던 김홍집은 일본에서 이동인을 처음 만났는데 그의 국제정세 시야에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일본어 실려과 일본인들과의 친분을 높게 사서 정부에 그를 직접 천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사실 꽤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에 조선인이 있었다는 건 그 조선인이 국법을 어겨서 밀항을 한 자였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범죄자를 조정에 천거하는 꼴이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홍집은 자신이 책임을 지고 이동인을 고종에게 추천했습니다. 

이동인이 일본에 밀항한 것은 1879년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신식문물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일본의 승려들과 재야 지식인들과 교류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영국 외교관과도 교류했는데 그 영국인은 저번에도 소개해드린 어니스트 사토우(ernest satow)였습니다. 사토우는 메이지 유신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면서 이토 히로부미나 이노우에 가오루 등과 같은 유신 주역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인데, 이동인은 바로 그와 직접 교류를 한 것입니다. 

이동인은 자신을 "아사노"라고 소개했습니다. 아침 조에 들 야로 한자를 지어 자신을 조선의 야만인이라고 스스로 소개한 것이죠. 그는 사토우에게 서구세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서구의 발전된 도시 및 물품의 사진을 요청하면서 조선의 개화에 도움을 구했습니다. 

사토우와 이동인은 모두 일본어가 가능했기에 이들은 장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사토우는 하루에 세 시간이 넘도록 대화했던 적이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동인이 사토우에게 자신과 그의 만남을 일본인들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는 점입니다. 사토우는 이동인이 일본인들이 그와의 만남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순진하게 일본을 믿었던 개화파들과는 달리 이동인은 일본을 별로 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동인은 사토우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데에는 오히려 사토우가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한국어와 한국소설등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그와 정치와 국제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토우 페이퍼에 따르면 이동인은 그를 거의 매일 찾아왔다고 합니다. 

이동인은 사토우에게 조선에 금, 구리, 석탄 등이 있으며 포경업고 발달하였고 그리고 인삼이 있다고 말하면서 조선도 매력적인 무역 파트너가 될 수 있음을 어필했습니다. 또한 그는 영국과의 수교 내지는 동맹을 희망한다고 말하면서 조선의 개항에 도움을 달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를 위해 영국이 정부 차원에서 군함을 파견해서 조선이 수교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사토우는 이동인의 이러한 생각을 높게 샀으며 그가 조선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 메모했습니다.

사토우 페이퍼를 보면 이동인은 사토우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그와 지속적으로 접촉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국제정세로 볼 때 이동인의 판단은 다른 개화파들의 그것보다 몇 보 앞서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다른 외세와 손을 잡아야 한다면 그 대상은 반드시 영국이어야만 했기 때문이죠. 당시 영국은 세계 최강국이었고 역사를 좌지우할 수 있었던 힘을 지닌 초강대국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위상은 지금 미국의 위상에 버금가는 위치였고 메이지 유신도 영국의 간접적 지원 하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동인은 재야시절에 사토우에게 정부를 전복해야만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에 돌아가서 고종에게 등용된 후 일본에 돌아왔을 때 그는 군주가 계몽되었다고 말하면서 이제 조선은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협력의사를 내비쳤습니다. 그는 조선에 돌아가서 일을 본 후 다시 일본에 와서 앞으로의 일을 기약했지만....

그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1881년 3월, 행방불명이 되었기 때문이죠. 

사토우는 그가 돌아오지 않자 상실감이 꽤 컸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동인은 암살당할 위협이 꽤 컸다고 합니다. 불교 승려가 조정에 관여하는 것 자체가 승려 신돈을 역적으로 삼던 조선 사대부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가 역설한 개화는 반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정부는 그를 일본에 파견했을 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부산이 아니라 원산에서 출발하라고 명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임무를 끝낸 후 조선에 돌아왔을 때 그는 배신당했습니다. 그는 바로 감옥에 갇혔기 때문이죠. 그는 어명을 받들어 일본에 다녀온 것이라고 역설했지만 관리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가까스로 석방되고 나서 다시 고종을 알현하러 외출한 게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승려 이동인,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 수 있었을까요?

참 아쉬운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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