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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급적 꾸준히 쓰려고 노력하는 짧은 글쓰기(10)
게시물ID : readers_217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18
추천 : 5
조회수 : 41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9/18 01: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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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 그들은 부엌 바닥에서 잤다.


집주인은 그들에게 당신들이 잘만한 곳이 없다고 했다.
거기서 레슬리가 물러섰다면, 그와 타냐는 밝은 거라곤 밤하늘에 뜬 달과 별 뿐인 허허벌판에서 노숙을 해야 할 판이었다.
자동차에서 자는 방법도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들은 집을 뛰쳐나올 때 이불이나 담요같은 걸 챙겨서 나오지 않았다.
낮의 태양이 뜨거운 곳일수록 밤공기는 차가운 법.
집주인에게 간청을 하는 그 순간에도 싸늘한 밤공기가 둘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집주인인 노부인은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결국에는 문을 열어줬다.
비쩍 마른 남자와 약간은 멍해보이는 작달막한 소녀가 그다지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은 듯 했다.
집 안은 단정하거나 아늑하다는 단어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지옥같은 고향집에 비하면 다정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집주인은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레슬리와 타냐를 주시하며 부엌의 방향을 일러주었다.
두 사람이 부엌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쯤, 연신 코를 훌쩍거리는 타냐가 불쌍했는지 집주인은 전기로 작동하는 티포트와 커피의 위치를 일러주었다.

레슬리는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면서, 자물쇠가 바깥쪽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노부인 혼자서 사는 듯 보이는 이 집에는 빈 방 하나 정도는 있을 것이다.
격리가 가능한 공간에 이방인을 재우겠다는 생각이었을 테고, 그 점이 레슬리를 화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노부인의 그런 경계심에 딱히 불쾌해하지 않았다.
만약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혼자 사는 집에 찾아와 재워달라고 하면, 레슬리 역시 노부인과 비슷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부엌에 들어선 타냐는 티포트부터 찾았다.
두 사람이 각자 차 한 잔을 마실 분량을 훨씬 넘는 물을 부은 뒤, 스위치를 눌렀다.
그녀는 물이 가열되는 소리를 들으며 티포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레슬리는 그녀의 뒤로 다가가 그녀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아직도 팔뚝 언저리가 차가웠다.
레슬리는 타냐의 이마와 입술, 그리고 차가운 팔에 키스하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그의 키스가 타냐를 따뜻하게 해줄 수는 있겠지만, 지금은 커피 한 잔이 더 효과가 좋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레슬리는 타냐의 팔을 두어 번 쓰다듬은 뒤, 역시 집주인이 가르쳐 준 찬장을 열어 커피와 각설탕, 스푼, 머그컵 등을 꺼냈다.
자신의 컵에 커피 두 스푼, 각설탕 하나를 넣은 레슬리는 타냐에게 물었다.

"커피는 몇 스푼이나 넣어줄까?"

물이 끓는 소리에 귀기울이던 타냐는 레슬리를 바라보고 이렇게 말했다.

"난 커피 안 마셔. 그냥 설탕 두 개만 넣어줘."
"알았어."

레슬리는 타냐의 잔에 각설탕 두 개만 떨어트렸다.

-똑똑

두 번의 노크 소리와 함께 부엌문이 열렸다.
노부인이 두터워보이는 담요 두 장을 품에 안고 들어왔다.

"미안해요, 혼자 사는 집이라 이불이 그렇게 많지 않군요. 이거라도 써요."

레슬리는 노부인이 사실은 마음씨가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부인... 이제 막 커피를 마시려던 참이었어요."
"커피만 마시면 속이 쓰릴 수도 있겠군요... 늙은이 혼자 사는 집이라 변변찮지만 냉장고에서 뭐라도 좀 꺼내 먹어요."
"고맙습니다."

이번에 대답을 한 것은 타냐였다. 그녀는 뜨거운 설탕물이 든 머그컵을 들고 씨익 웃었다.
레슬리가 맨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어디 모자란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 미소였다.
그렇지만 이제 레슬리는 그녀의 미소가 가지는 의미를 안다.
그녀의 미소는 순수한 감사와 사랑, 호의를 담아낼 뿐이었다.
타냐의 화답에, 노부인의 입가에도 아주 잠깐 미소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편한 밤들 되어요..."

노부인은 부엌을 나섰다. 자물쇠가 걸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바닥은 이곳저곳 이빨이 빠진 오래된 타일이었고, 바깥 공기만큼이나 차가웠다.
타일 바닥에 손을 대어 온도를 가늠한 레슬리는 노부인이 가져온 담요 하나를 절반 정도 펼쳐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나머지 담요 하나를 어깨에 걸친 뒤, 담요에 앉아 벽에 기댔다.
담요에서는 나무 냄새가 났다.

타냐는 레슬리 몫의 커피를 가져다 주었다.
자기의 컵까지 맡긴 타냐는 조심스레 냉장고를 열어 보더니, 거기서 오래되어 보이는 크로와상 하나를 꺼내왔다.

타냐는 레슬리의 옆에 앉아, 그의 어깨에 걸쳐진 담요를 들추고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레슬리로부터 컵을 건네 받은 타냐는 곧 설탕물을 홀짝이기 시작했다.

"맛있어?"
"응. 달아. 빵 먹을래?"

타냐는 크로와상을 조금 찢어 레슬리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녀가 기대어 있는 탓에 레슬리의 한쪽 팔은 자유롭지 못했다.
타냐는 팔을 빼서 빵을 받으려던 레슬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빨리 입을 벌리라는 듯, 레슬리의 입가에 빵조각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레슬리는 누군가가 자기 입에 넣어주는 음식을 받아먹어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가 기억이란 걸 갖추기 시작한 이후에는 그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레슬리가 마지못해 빵을 받아먹자, 타냐는 자기 몫을 뜯어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차에 기름이 얼마 없는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커피를 한 모금 삼킨 레슬리가 말했다.

"난 차에 대해서는 잘 몰라. 얼마나 갈 수 있을 것 같아?"
"글쎄... 계기판 눈금으로 봐서는... 지금까지 온 것의 절반 정도가 아닐까."
"기름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걷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태워 달라고 하거나."
"나쁘지는 않네. 자기 발로 걸어갈 수 있다면.

레슬리는 지나치게 긍정적인 타냐의 말에 피식 웃었다.

"기름이 어디서 떨어질 줄 알고 걸어가. 내일 아침에 집주인에게 부탁해서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려달라고 해야겠어."
"그럼 어떻게 되는데?"
"기름이 떨어지기 전에 적당한 도시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난 브루스터만 아니면 어디로 흘러가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어. 브루스터만 아니면."

타냐는 레슬리와 자신이 살던 작은 동네를 증오했다.
그녀를 만난지 2주 만에 납치하다시피 차에 태우고 도망쳐 나온 레슬리는 타냐가 왜 그리도 브루스터를 증오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를 처음 본 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녀의 목과 다리 언저리에 있는 푸른 멍자국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후회 안 해?"

레슬리의 질문에 타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뭘?"
"브루스터를 떠나온 거. 그것도 만난 지 2주 밖에 안 된 내 손에 끌려서."

타냐는 마지막 남은 빵조각을 둘로 나누어 레슬리의 입에 밀어넣고 자기 입에도 넣었다.

"후회 안 해. 솔직히... 네가 무슨 생각으로 날 끌고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만약 네가 돌아가고 싶다면 다시 돌아갈게."
"헛소리하지마. 난 절대, 죽어도, 두 번 다시는 그 엿같은 동네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차라리 지금 밖에 나가서 얼어죽고 말겠어."

타냐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앞을 쳐다봤다.
레슬리는 한 쪽 팔을 뻗어 푸석한 타냐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머리를 기댔다.
그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역시 레슬리에게 기대어 왔다.

"내가 돌아가고 싶어할까봐 걱정하는 거라면, 쓸데 없는 짓이야. 만난지 2주 밖에 안 된 깡마른 남자애보다도 가치가 없는 동네라구."

타냐는 자신이 뱉은 말에 레슬리를 얕보는 것처럼 들리는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닫고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 화났어?"
"화 안 났어. 그리고, 나 마른 건 다들 아는 사실이지. 그리고 브루스터보다 가치있는 남자라니,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네."
"응. 그 개똥같은 동네 100개보다 훨씬 낫지."

레슬리는 타냐와 맞닿은 몸이 서서히 따뜻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몇 발자국 앞에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닥쳐올 크고 작은 문제들에 대한 걱정을 잠시 동안 잊게 해주었다.
차갑게 식은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내려놓고, 레슬리는 타냐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레슬리의 손길에 머리카락을 내맡긴 채 어느 새 잠들어 있었다. 잠든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레슬리는 천천히 타냐의 어깨와 얼굴을 감싸서 바닥에 눕혔다. 그는 다리를 베게 한 후 어깨에 걸쳐져 있던 담요를 끌어내려 그녀의 몸에 덮었다.

적막 사이로, 쌔근대는 타냐의 숨소리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그녀를 지킬 수 있을까?

싹튼지 2주가 된 사랑에게 앞으로 닥쳐올 일들은 분명 버겁기만 하리라.
그러나 레슬리는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철없고 조그맣지만 그 누구보다도 천진한 미소를 가진 소녀와 함께라면.

둘이서 함께 걷기 시작한 첫날 밤, 그들은 부엌 바닥에서 잤다.
출처 글쓰기 좋은 질문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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