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수많은 번역과 각색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읽었던 <앨리스>는 가물가물하고 (토끼를 쫓아가다 어떻게 되었더라? 이상한 모자장수랑 티타임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번에 독서토론을 빙자하여 새롭게 읽어 보기로 했다.
<앨리스>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언어유희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하면 일종의 부장님 개그(유럽인이 먹는 음식은 EU식(食) 등…… 나도 양심이 있어서 더 이상 할 수 없다.)로 칭할만한 말장난들이 많이 나온다. 바다거북의 선생님이 육지거북이라던가 (육지거북-tortoise의 발음과 가르치다- taught us의 발음이 비슷하다.) 수업시간이 매일매일 줄어 들거나(수업-lesson 과 줄어들다-lessen의 발음이 비슷하다.) 등의 언어유희가 등장한다. 말장난은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를 비슷한 소리로 묶어 웃음을 만든다. 즉 단어의 의미와 형식의 차이에서 재미를 찾는다. 보통 착각하기 쉬운 점이 의미와 형식을 하나로 보려고 하는 것이다. 단어도 의미와 소리가 분리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하나로 연결하고 만다. 말장난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비슷한 소리가 난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동시에 연상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의미와 소리를 개별적으로 생각한다면 언어유희는 웃음을 유발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앨리스>를 번역본으로 읽었을 때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앨리스>에서는 의미와 형식의 분리를 자주 보여준다. 앨리스가 케이크를 먹고 엄청나게 키가 커지는 장면(사실 이 부분은 조금 부러웠다.)이 있다. 여기서 앨리스는 자신의 발이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커지자 발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잘 지내라고 말한다. 또한 어떻게 편지를 보낼지 크리스마스 선물을 어떻게 보낼지를 고민한다. 보통 발은 자기 자신의 일부분으로 인식하기 마련인데 앨리스는 발을 타자로 인식하고 있다. 자아의 본질과 육체의 형식이 다름을 인지하는 것이다. 엉뚱해 보이지만 날카로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나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생각하는 뇌인가? 나의 몸인가? 내 몸과 나는 하나가 아니다.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잘랐다고 나라는 존재가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나의 발은 나와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이렇게 <앨리스>는 의미와 형식이 분리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 의미가 중요한가? 형식이 중요한가? 이건 마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정도의 유치한 수준의 질문이기는 하지만(본인은 용돈 주는 분을 좋아했다.) 그래도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면 어떨까? 즉 의미와 형식 어떤 것이 더 우선시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사람마다 그 대답은 다르겠지만 <앨리스>에서는 형식을 좀 더 우선시하고 있는 것 같다.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버섯을 먹고 키가 커지는 장면이 있는데(앨리스의 키가 자주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것도 외모의 변화를 줌으로써 본질과 형식의 괴리를 시각적으로 일깨우는 것이다.) 이때 앨리스는 목이 길어져 마치 뱀처럼 보이게 된다. 비둘기는 길게 자라난 앨리스의 머리를 보고 독사라고 외친다. 앨리스는 자기가 독사가 아닌 어린소녀라고 항변했지만 비둘기는 평생 수많은 소녀들을 보았지만 이렇게 목이 긴 소녀는 본적이 없다며 앨리스를 독사로 단정 짓는다. 즉 외형이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장면도 있다. 앨리스가 공작부인에게 아기를 넘겨 받았을 때 아기는 처음엔 아기였지만 꿀꿀 소리가 나더니 어느새 돼지로 변해버렸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한데 처음에 꿀꿀거리는 소리(형식)가 먼저 나고 아기는 점차 돼지(본질)로 변해버린다. 소리가 먼저 변하고 본체가 변한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형식의 변화가 내용의 변화를 이끌었다고도 볼 수 있다.
<앨리스>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다. 계속해서 변해가는 육체와 그에 따른 상황의 반전들, 언어유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들과 수많은 말장난의 향연. 그 안에서 우린 좀 더 근본적인 나를 찾는다. 나란 존재는 무엇이며 어떻게 규정되는가? 나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외모가 나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나를 규정하는 것이 나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에 앨리스가 재판을 받을 때 그를 둘러쌓던 병사들은 앨리스의 덩치가 커지자 카드더미로 변하고 마는 장면은 나와 타인과의 관계가 극적으로 변할 수 있음을 의미심장하게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만한 문제는 공작부인의 교훈으로 갈음한다.
‘남에게 보이는 대로인 사람이 되라’ 그러니까 좀 더 간단히 말하자면 ‘네가 남들에게 보이는 것과 다르거나 달랐었다면 남들에게도 다르게 보였을 테니, 남들이 너를 보는 것과는 다른 네모습은 절대로 꿈꾸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