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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lovestory_218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ED-VIRUS★
추천 : 4
조회수 : 50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06/10/23 14:21:58
내가 탤런트와 결혼하자 친구들은 봉 잡았다며 부러워 했다.
“야, 그런데 제수씨 무슨 드라마에 출연하냐?”
“으으, 그게 저어 ...”
당시 아내의 역할은 가정부나 다방 레지였다.
일찍이 성우로 시작해서 탤런트가 된 아내는
집에 들어오면 대사 외운다고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다가
소파에 쓰러져 자는게 예사였다.
안방 장롱 구석에서 아내의 스타킹이라든가 속옷이
발견되기도 하고 냉장고엔 계획없이 사다 쟁여놓은 고기며
과일들이 제때 먹지 않아 신선도를 잃고 있었다.
하지만 잔소리 할 입장이 아니었다.
비록 단역이나 잘해야 조연이지만
아내는 그런대로 잘팔리는 연기자였다.
게다가 아내의 수입을 무시할 만큼
내 위치가 든든치 못하기도 했다.
모니터좀 해달라는 성화에 마지못해 텔레비젼을 켜면
못생기고 무식하고 촌스러운 여자가 식탁을 차리거나
시장판에서 삿대질을 하며 싸우고 있었다.
아내의 연기가 무르익을 수록 나는 텔레비젼과 멀어졌다.
작년부터는 한술 더 떠 중풍맞은 노파가 되어버렸다.
연기가 어찌나 능청스러웠는지 여기저기서
치매 노파 섭외가 들어왔다.
“나도 그런 역할이 싫어. 그치만
나만큼 실감나게 소화시키는 사람이 없다잖아.”
아내가 궁색한 변명을 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아내는 조금만 치켜주면 분간 못하고 몸을 던진다.
내게 빨간 불이 들어온 건
아내가 그런 역을 서너번 했을 때였다.
갑자기 아내를 안을 수가 없었다.
옆으로 돌아간 빈 입을 오물거리며
밥 달라고 보채는 노파가 자꾸 아내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아무래 고개를 흔들어도 노파는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아직은 매끈한 갓 마흔살 아내의 피부, 하이톤의 농익은 비음,
눈을 감으면 더욱 짙어지는 라벤더 향이 사기 같았다.
오히려 짓무른 눈, 구부정한 허리, 늘어진 한쪽 팔,
어눌한 목소리, 주름 투성이에 저승꽃 핀 얼굴이
이 여자의 본래 모습 같았다.
“당신 왜그래?”
아내가 아무리 달래도 나는 살아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고백할 수도 없었다.
“당신 마음을 다친거 아냐? 것도 병원가야 낫는대”
짚이는게 있는지 아내가 가볍게 치료를 권유했다.
저 여우는 다 알고있을 성 싶다.
그렇지만 자신의 일을 양보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내는 요즘이 전성기다.
이따금 CF까지 들어와 아내의 입은 다물어질 새가 없다.
나는 나날이 위태로워지는데 아내는 매사가 상승곡선이다.
아이들 밑으로 들어가는 돈이 점점
단위가 커지는 걸 빤히 알면서 당장 때려치우라고
무작정 목청 높일 배짱도 내겐 없다. 아내는 잃고
나도 잃을 것 같은 불안에 잠자리가 뒤숭숭하다.
“야, 제수씨 요새 떳더라. 증말 부럽다.
마누라 잘 둔 덕분에 늦복 터졌으니 언제든지
직장 때려치우고 들어 앉아도 문제없겠다.
그나저나 벽에 똥 바르는 할마시 역 죽이게 잘하던데 ... ”
친구들마저 눈치없이 염장을 지르고 술값까지 내게 떠밀었다.
집 앞까지 가지 않고 큰 사거리에서 내렸다.
달아다는 택시 꽁무니에 눈길을 주다가 집으로 향하는데
취기가 확 솟구쳤다.
아내를 안주로 낄낄대는 고약한 친구들 때문에
막판에 홧술을 들이 부은게 이제 올라오나 보다.
헛방을 딛어 비틀댈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잠시 가로수에 기대 숨을 골랐다.
아내가 아직 집에 들어와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느릿느릿 걸음을 떼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한 여자가 튀어나와 나를 지나쳐 앞질러 간다.
얼마만큼 가다가 여자가 뒤를 흘낏 돌아보곤 다시 걷는다.
오밤중에 선글라스라니?
여자가 걸음을 옮길 적 마다 좌우로 씰룩이는 엉덩이가
상당히 고혹적이다.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엔 나팔바지가 유행했다.
엉덩이가 꼭 끼이고 무릎 아래가 부챗살처럼 퍼진 나팔바지를
입은 아내가 꼭 저렇게 걸었다.
자기야, 나 모델 수업 받았던 거 모르지, 하면서.
여자의 뒷태가 사정없이 나를 끌어당겼다.
외로움과 절망, 그리고 묘한 퇴폐성이 엿보이는 뒷모습이었다.
여자는 또각또각 발소리를 내며
다시는 뒤돌아보는 일 없이 냉정하게 걸었다.
여자가 공원 끝에 불을 밝힌 주황색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나도 엉겁결에 뒤따라 들어섰다.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나는 거침없이, 마치 여자와 일행인 양 옆자리에 앉았다.
도발적인 파마머리에 무릎이랑 넓적다리께를 찢은
꽉 끼이는 칠부 진, 목이 깊게 파여 쇄골이 육감적인 니트 티,
아직 철이 일러서인지 여자의 반팔 소매 밑으로 오소소 돋은 소름,
아 나는 ...
“가끔 이런 식으로 여자한테 접근하나요?”
여자는 눈길도 안주면서 먼저 말을 걸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만화영화에 나오는 공주처럼 맑고 청량했다.
“지남철 같은 상대를 만났을 땐...”
여자가 살짝 입술을 깨무는 듯 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옆모습이지만 다물고 있는 저 입매, 낯익다.
여자는 눈길도 표정도 말도 상당히 아끼고 있었다.
전작 때문에 술기운이 빠르게 나를 점령했다.
눈매는 짙은 선글라스에 가려졌지만 분명 낯이 익다.
빈 소줏병이 너댓 개 세우졌다.
나는 빠르게 무너지고
여자는 점점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려 밖으로 나오자 여자가 쪼르르 따라나와
회양목 앞에서 내 등을 콩콩 두들겨줬다.
그래, 너였구나! 두드리는 리듬과 강도가
여자의 정체를 완전히 깨닫게 해 준 순간,
나는 인사불성이 된 척 사지를 늘어뜨렸다.
부축을 받으며 여자의 집에 가서 그 밤을 보냈다.
여자의 집은 여자의 선글라스처럼 깜깜했다.
여자는 끝내 자신의 눈동자를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취기 속에서도
내가 여자를 안았다는 사실이다.
여자에게선 방금 자른 생나무의 상큼한 향이 났다.
아내의 라벤더 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선함이었다.
기쁨의 꼭지점에서 여자가
꿈결처럼 환청처럼 들릴 듯 말 듯 소근거렸다.
병원엘 왜 가?
아내가 죽은 듯이 자고있다. 간밤의 일이 꿈만 같다.
숙취와 혼돈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흔들자
희미하게 생나무 향이 일어난다.
분명, 한창 때 아내에게서 나는 향내다.
목이 타 물을 먹으려고 일어서는데 아내 곁에
짙은 선글라스가 보인다.
당신이 탤런트라면 나는 탤런트 남편이야, 이 사람아.
잊었던 미소가 비어져 나온다.
선글라스를 장롱 밑에 밀어넣고
아내 곁에 가만히 몸을 눕힌다.
방금 자른 생나무 향에 좀 더 취하고 싶다.
『김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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