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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humordata_9187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중어통역
추천 : 5
조회수 : 80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1/11/20 09:40:23
일요일 2시 반 4호선 당고개 행 지하철...
이 시간대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딱히 앉을 자리는 찾기 쉽지 않고 서있는 사람은 몇 안 되는... 마치 나만 입석표를 끊은 듯 하다.
문가에 서서 문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역시 넌 잘 생겼어'라는 등의 잡생각을 늘어놓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더러운 욕소리가 들려왔다.
"XXX같은 X아. X알 X................"
정신나간 여자다. 아무나 앞에 서서 욕을 쏟아냈다.
재수없게 찍히신 아주머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는 척을 했지만 미친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퍼부었다.
아마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면 혹시나 봉변을 당할까 꿈쩍을 않고 있는 것 같다.
반응이 없자 이 사람 저 사람 옮겨가며 욕세례를 퍼부었다.
다음에 자신에게 차례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며 슬며시 고개를 숙이고 자는 척 하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누군가 나서서 말려주기를 바랬다. 설마 이 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나서지 않을까.
어? 왜 다들 눈만 동그랗게 뜨고 구경만 하는거지.
하긴 신기하기도 하겠다. 난데없이 미친 여자라니...
신고하기는 뭐하고(아직 크게 누군가 다치거나 한 것은 아니니깐) 나서서 말리기는 무서운 건가...
흐트러진 머리 , 때 묻은 츄리닝 , 원래는 흰색이었을 것 같은 짙은 회색 점퍼...
말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뜻 나서지는 못 했다.
오만가지 상상이 내 머릿속에 펼쳐졌다.
동네 고삐리들 삥뜯는 걸 말리는 것도 아니고... 미치긴 했지만 여자인데 주먹을 쓸 수도 없고.
혹시 흉기라도 가지고 있으면?
저 긴 손톱을 앞세워 달려들면?
침 질질 흘리면서 이빨을 내세워 물려고 달려들면?
내가 상상력은 이 세가지 가정으로 좁혀졌다.
그리고는 나름 대처법을 이미지로 예행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기최면.
쫄지마... 쫄지마... 네가 몇 년동안 배운 것들이 설마 하루 아침에 미친 여자앞에서 무너지겠어.
넌 강해. 넌 짐승이잖아. 정 안 되면 네가 먼저 물어 뜯는거야.
후... 긴 숨을 내쉬고 안경을 벗어 잠바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객차 중앙에 섰다.
손은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지만 여차하면 뛰쳐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
미친 여자와 나의 거리는 대략 5미터. 충분하다.
할머니를 괴롭히는데 열중해있는 미친 여자는 나를 인식하지 못한 듯 했다.
" 야! " 크게 소리치지는 않았지만 워낙 미친 여자의 소리외에 다른 소리는 없었기에 객차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미친 여자는 내 눈을 쳐다봤다.
" 내려! "
아... 어떻게 대처할지 이미지 트레이닝까지 마쳤건만 진작 대사를 생각해두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애드립으로 끝까지 달릴 수 밖에 없다.
미친 여자가 조용히 말했다.
" 네 "
예상 밖의 대답이다. 이렇게 쉽게 끝날 꺼라 생각 안 했는데....
욕하고 소리지를 때는 30대 초중반의 아줌마 목소리었는데 "네"라는 답변은 어린 소녀로 돌아왔다.
미친 여자는 지하철 문 앞에 섰다.
" 다시 타면 뒤진다 "
" 네 "
쳐다보지도 않고 문을 향해 댓구했다.
역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고 미친 여자가 내리고 문이 다시 닫히기 까지 그 여자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열차가 출발하고 안도감이 들었다.
뿌듯했다. 또 착한 일 하나 더 하는 구나.
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두려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박수 받고 고맙다는 인사까지 바란것도 아니었다. 그런 눈빛은 좀 아니지 않나.
내가 그렇게 무섭나.
나는 다시 지하철 문 앞에 서서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그다지 무서워 보이는 얼굴은 아닌데.... " 넌 착해. 하나도 안 무섭게 생겼어 "
상처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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