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노무현 대통령 재임 당시, 느닷없는 한미FTA 선언에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놀란건 저뿐만이 아니었죠. '노무현이 하는 일이면 뭐든지 반대!!'를 외치던 한나라와 조중동도 이때만큼은 어떤 반응조차 내놓지 못했습니다.(어, 이게 뭐지. 얘가 미쳤나..? 왜 우리한테 좋은 걸 해주지..? 이런 반응;;) 진보 진영에서야 맹비난을 퍼부었구요.(노무현에게 신자유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였죠, ㅎㅎ)
왜 노무현은 한미FTA라는 카드를 선택했는가..에 대한 사견입니다. 틀린 부분이 있다면 제 지식이 모자라서 그러니 지적해주십시오..
먼저 이건희의 '샌드위치론'에 따른 위기의식이 컸을 겁니다. 중국과 인도는 엄청난 경제성장으로 우리를 쫓아오고 있고, 선진국 수준의 기술이나 경쟁력은 확보하지 못하니 가격에서는 중국에 치이고, 기술이나 인지도에서는 선진국에 치이는 샌드위치에 낀 상태와 같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아직 미국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이전이고, 미국은 엄청난 파생금융상품으로 사실상 아무 것도 안하고 떼돈을 벌고 있었죠.(이런걸 전문으로 하는 '금융공학'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그 유명한 BBK도 MB가 이 시절에 파생금융상품을 하려고 설립한 회사죠. 사실 이 시기에 발생한 버블 때문에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 터지면서 금융위기가 찾아온 거구요..) 반면에 일본은 전세계가 호황을 구가할 때에도 장기불황의 늪에서 간신히 빠져나오는 형국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생각이었을 겁니다. 이제 제조업으로 경쟁하는 시대는 지났다. 다음 시대는 금융업을 주로 하는 서비스업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일본을 모델로 하는 제조업 기반의 경제 시스템이다. 이걸 미국식으로 완전히 개조하지 않고서는 더이상 경쟁해 나가기 힘들다. 즉, 노무현에게 한미FTA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경제시스템 모두를 미국식으로 바꾸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을 겁니다. 따라서 다소의 불이익은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이루어내야 하는 과업이구요.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지금 주소를 미국식으로(무슨길 몇번지 이런 식으로) 바꾸고, 로스쿨과 메디컬스쿨 등 전문대학원을 설립하는 등 국가 시스템을 미국식으로 재편하기 시작한 것이 노무현 정부 때부터였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개성공단입니다. 제 기억으로 당시 미국에서는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제품을 한국산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고, 노무현은 다른 어떤 것을 포기하더라도 이것만은 지키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지금 시끄러운 ISD를 받아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도대체 한낱 개성공단이 뭐가 그리 중요했을까요? ISD보다도 더? 전 세계에서 임금이 가장 싼 나라가 어디일까요? 바로 북한입니다. FTA체결로 관세가 철폐되면 개성공단 제품은 미국 시장에서 품질뿐만 아니라 가격면에서도 중국, 인도와 경쟁할 수 있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데요, 아까는 우리가 중국,인도와 선진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라고 했지만, 이제는 개성공단 제품으로는 저가 전략으로 중국,인도와도 경쟁할 수 있고 국내 제품으로는 고급화 전략으로 선진국과 경쟁할 수 있는 위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개성공단이 활성화되면 제2, 제3의 개성공단이 조성될 것이고 더불어 자연스럽게 북한의 개방수준과 소득수준도 올라가서 통일비용 부담도 덜어지게 될 것입니다. 즉, 개성공단이 포함됨으로써 한미FTA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북미FTA가 체결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미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편합니다. FTA라는게 서로에게서 뜯어먹을게 있어야 성립이 되는 것인데 북한은 사실상 뜯어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나라거든요. 여기에 자기네 시장 문호만 열어주는 셈이니 얻는 것 없이 손해만 보는 장사인 겁니다. 게다가 미국이 우리의 통일을 원할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동북아는 미,일,중,러의 세계 4대 강국이 부딪히는 지점이고 여기서 북한과 우리나라가 그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이라는 주적이 있기 때문에 주한미군의 유지도 명분을 얻을 수 있구요. 예컨데 당장 통일이 되고 통일한국에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면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이 매우 거셀 겁니다. 주한미군이 철수한다면 동북아에 대한 미국의 입지도 상당히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노무현은 한미FTA에 개성공단을 포함시켜서 북한 경제를 살리고 점진적 개방을 유도함으로써 이를 통해 통일에 한발짝 다가간다는 노림수까지 갖고 있었던 겁니다. 통일에 비교한다면 ISD정도야 양보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이었을 겁니다. 제가 이런 추측을 하는 것은 그 당시 노무현이 뜬금없이 내놓은 동북아균형자론이 떠올라서 입니다. 우리나라가 열강 사이에 끼어 이리저리 치이는 존재가 아니라 힘의 균형이 미묘한 판의 중심추가 되어서 판 전체를 좌우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는데요, 현실성도 없고 암만 그래도 우리나라를 너무 과신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통일한국이라면 다르죠. 확실히 동북아의 균형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미국도 이러한 개성공단의 파괴력(경제적인 측면 뿐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을 뒤늦게나마 눈치챘기 때문에 모양새 빠지게 재협상을 해가면서까지 개성공단 생산품은 FTA대상에서 제외시킨 것이구요. 이명박 정부는 어리석게도 순순히 그 중요한 개성공단을 내놓았죠.(사실 자동차산업 관세율 따위가 문제가 아닌겁니다, 개성공단에 비하면)
글이 길어졌는데요, 정리하자면 제가 생각하는 노무현의 FTA는, 1. 국가 시스템을 제조업 중심의 일본식에서 서비스, 금융업 중심의 미국식으로 바꾼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 꼴 나는 것이 명약관화하니까, 이대로 말라죽느니 한번 도박을 해보자.. 2. 개성공단을 포함시켜서 사실상 북미FTA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해서 북한을 점진적으로 개방시키고 자연스럽게 통일로 유도할 수 있다. 3. 이를 위해서는 다소의(아니, 꽤 큰) 희생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자신의 정치적 지지세력에 대한 불이익과, 그에 따른 대통령 개인에 대한 비난까지도.. 뭐, 정말 이런 고민 끝에 나온 '모 아니면 도' 식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반해 이명박의 FTA는 말 그대로 재벌의, 재벌에 의한, 재벌을 위한 FTA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국가나 민족의 미래에 대한 고민은..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이에 대한 얘기를 하려면 환율정책과 '잃어버린 10년'이야기를 또 안할 수가 없네요. 이명박 정부 들어서 가장 먼저 한 것이 고환율 정책입니다.(강만수 장관의 등장이죠.ㅎㅎ) 그리고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이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정의합니다. 100년에 1번 있을까말까 한 전 세계적 호황을 정부의 잘못된 경제 정책으로 날려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노무현 정권 당시 저환율 정책으로 수출 대기업들이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서 수출을 많이 하지 못했다는 불만입니다. 이 말도 일견 일리가 있습니다. 특히 삼성의 입장에서는요. 반도체 산업은 특성상 승자가 독식하는 구조입니다. 1위 업체가 대량의 설비투자를 통해 약탈적 단가를 책정하고, 2, 3위 업체는 이를 쫓아오지 못하면 경쟁을 포기해서 독점적 구조를 유지하는 전략입니다. 사실 이 시기는 삼성전자에게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지금도 1위를 지키고 있지만, 이 시기에 환율정책만 뒷받힘해 줬으면 일본이고 대만이고 미국이고 경쟁업체들을 싸그리 말려 죽일 수 있었을 겁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잃어버린 10년'입니다..
그러나 수출기업이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환율 정책보다는 저환율 정책이 훨씬 유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자원을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석유만 봐도 1$=\1,000(저환율)일 때와 1$=\2,000(고환율)일 때를 비교해 봅시다. 똑같은 2,000원을 갖고 저환율일 때는 2L를 넣을 수 있는데, 고환율일 때는 1L밖에 넣을 수 없습니다. 밀가루값도, 옥수수값도, 커피값도 전부 마찬가지입니다.(우리나라에서 원재료가 나오는 제품만 빼고 전부다) 고환율에는 반드시 물가 상승이 동반됩니다. 마찬가지로 해외여행을 나가도 저환율일 때는 여행비용이 100만원이면 될 것이 고환율일 때는 200만원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저환율일 때는 해외여행도 부담없이 가고 그럽니다. 강만수 장관이 재임 당시 '환율이 너무 낮으니까 우리나라 국민들이 외화를 낭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벌들 입장에서는 가격경쟁력 안나오는 와중에 죽을둥 살둥 신제품 개발하고 디자인 차별화해서 어렵게 외화 벌어왔는데 자기들은 그 혜택을 못누리고 국민들만 누리고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수출기업이 어렵게 돈벌어오고 국민들이 혜택 누리는게 정상 아닌가요? 결국은 수출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도 국민들인데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소득재분배도 되고 좋은 거 아닌가요? 솔직히 '잃어버린 10년'동안 국산제품 품질이 월등하게 좋아졌습니다. 가격 경쟁이 어려우니까 고품질 전략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세계 최고 수준의 TV, 드럼세탁기, 냉장고, 에어콘, 자동차 이런게 나온게 아닐까요? IMF이전에 수출이 잘나갔다고 하지만 그때는 '싸니까 산다'는 지금의 중국산과 인식 차이가 없었습니다. 냉혹한 경쟁 상황에 놓이면 우리 대기업들은 더 강해집니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노무현은 한미FTA를 할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어, 우리나라 대기업들 저환율 정책에 가격경쟁력 없는데도 이만큼 하네? 그럼 미국이랑도 한번 붙어볼만 하겠네? 머, 이런 생각..)
주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환율 정책일 때는 외국인이 우리나라 주식을 삽니다. 환율을 계속 낮추고 있으므로 고환율(1$=2,000원)일 때 1억원어치(=5만불) 사둔 주식이 그냥 둬도 10만불로 올라갑니다.(환율을 계속 낮추고 있으므로 1$=1,000원이 된다고 가정하면 10만불 짜리가 되죠.) 따라서 한국 주식은 계속 보유하고 싶은 주식이 되고 주가도 올라갑니다. 반면에 고환율 기조가 되면 그 역이 되므로 외국인들은 주식을 보유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빨리 차익 실현하고 팔려고 하죠. 그게 이명박 당선 이후 고환율 정책을 채택하면서 주가가 폭락한 이유입니다.(물론 다른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제 이론이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한미FTA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한미FTA를 통해서 관세가 철폐되고 미국산 수입품이 저렴하게 들어와서 물가가 안정되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라면 FTA보다는 저환율 정책을 채택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대신 수출기업들은 죽을 맛이겠지요. 또한 FTA를 하면 정부입장에서는 관세 수입이 줄어드므로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는 어디선가 더 세금을 걷어야 합니다. 더 세금을 걷을 대상이라면 국민 뿐이겠지요.
할말이 많다보니 또 글이 길어졌는데요, 이명박의 FTA는 정리하면 이겁니다. 1. 수출기업(주로 재벌)이 최대의 이윤을 얻게 해야 겠다. 2. 북한이 국물을 얻어먹게 하고 싶지는 않다.(개성공단 out)
노무현의 FTA 같은 전략적 구상도 없고, 북한의 개방 유도와 통일과 같은 정치적 노림수도 없습니다. 아주 단순한 맥락입니다. 어찌 보면 순진하달까요..
그런데 문제는 노무현의 FTA도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인한 금융위기도 없었고, 미국식 시스템이 정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죠. 미국의 국채 채무는 눈덩이처럼 증가하고 있고, 부채에 대한 이자 비용이 미국 정부의 재정 건전성을 크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달러는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같았던 파생금융상품들은 허공에 떠있는 신기루처럼 그저 숫자에 불과할 뿐 실체는 어디에도 없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 우리가 정말 미국식 시스템을 그대로 도입해야 하는걸까요? 북한의 개방과 통일이라는 노림수도 걷어차 놓고? 가카는 BBK도 그렇고 파생금융업(이라고 쓰고 돈놀이라고 읽습니다;;)을 몹시도 해보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한미FTA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ISD만 가지고 말이 많은데 저는 이것도 불만입니다. ISD는 어찌보면 부차적인 부분에 불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