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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조선이 우습냐?>여진족 1만명을 학살하다!-2부
게시물ID : history_219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ungsik
추천 : 11
조회수 : 144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7/07 23: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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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아 부잔타이 <동해여진은 내가 접수한다!>

→ 1600년 당시 동해여진은 서쪽으로는 누르하치의 건주위, 북쪽으로는 부잔타이의 울아부 앞에 차려진 밥상과 같았습니다.
   앞서 조선이 시행한 두만강 인근 여진족 7000명 연회 기록에도 보이듯 당시 동해여진은 소규모 부족들이 산재해 있었고,
   노토부족이 조금 강대하다 하나, 누르하치나 부잔타이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습니다.
   이 당시 누르하치의 병력은 3~4만, 울아의 병력도 3만 정도 되었는데 두 세력다 호시탐탐 동해여진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울아의 부잔타이는 누르하치에 대한 원한이 극에 달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일전에 소개해 드렸듯이 1593년 누르하치가 세력을 단기간에 급속도로 확대하자
   여진과 몽고의 9부족 연합군 3만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누르하치의 건주위를 멸하기 위해 침공한 적이 있었지요.
   이때 울아국의 한 만타이(mantai)의 동생 부잔타이(bujantai)가 누르하치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부잔타이.png

누르하치 포위망 (9부족연합군 3만 쳐들어오다)(만주어 동봉) http://cafe.naver.com/booheong/107124

   만타이는 동생의 송환을 누르하치에게 요청하였으나 누르하치는 거절하고
   도리어 친동생 슈르하치의 딸을 부잔타이와 결혼시키고 일족처럼 후하게 대우해줍니다.
   이런 대접을 받은 정황은 1595년 12월 누르하치를 방문한 조선의 무관 신충일의 보고서에도 나옵니다.
   당시 정월 아침에 성대하게 연회가 베풀어졌는데, 부잔타이가 누르하치 앞에서 춤을 췄고,
   이에 흥이 난 누르하치도 어깨를 덩실거리며 춤을 춘 일이 있었습니다.

임란 중 여진방문기 7부 - 누르하치 춤을 추다! http://cafe.naver.com/booheong/106223
건주기정도기中
술이 두어 순배 돈 후에 올라부락(兀剌部落)의 새로 항복한 장수 부자태(夫者太)가 일어나 춤을 추었고, 
노추도 문득 의자에서 내려와 비파를 퉁기면서 몸을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부잔타이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술책이었고, 무려 4년 동안이나 건주위에 인질로 잡혀 있게 됩니다.
   누르하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부잔타이는 속내를 숨기고 그런 행동을 한 것이었지요.
   이에 결국 1596년 7월 누르하치는 부잔타이를 울아로 송환하기로 결정하고 
   휘하의 장수들로 호위하게 하여 울아국으로 보냅니다. 
   마침 부잔타이를 마중하러 나온 만타이가 내분으로 살해되고 울아국 한 자리를 놓고 
   부잔타이와 부잔타이의 숙부 힝냐가 대립하게 되는데요. 
   이때 누르하치가 보낸 건주위 장수들의 호위로 마침내 부잔타이가 울아국의 한에 오르게 됩니다.
   힝냐는 예허로 달아나고요. 
   이후 1598년 부잔타이는 직접 건주위를 찾아와 고두하며 누르하치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며 감사하다는 예를 표하지요. 
   이후 여러 차례 혼인동맹을 하면서 겉으로는 서로 친한듯 보였으나 실상은 동해여진을 둘러싼 긴장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노토부족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복종하라고 협박하기도 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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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르하치 <너 내꺼해라!>

   누르하치도 동해여진에 대한 군침을 끊임없이 흘렸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누르하치는 동해여진에 대해서 처음엔 상대 세력이 약하면 철저한 약탈과 포로획득을,
   강하면 혼인결맹을 통하여 내투를 시켰습니다. 
   또한 공공연히 동해여진은 전부 누르하치 자신에게 예속되었다고 표현하였지요.

월사집 中
북호(北胡)의 노토(老土)를 공격하여 분탕(焚蕩)하는 것이 좋은지 여부에 관한 의
(중략)
더구나 노추(老酋/누르하치)의 사납고 오만한 작태가 근래 부쩍 심해져서, 
(중략)
듣건대 (누르하치가) 노토와 혼인을 맺고 홀온(忽溫)과 동맹을 맺었다고 하니, 
접때 종성(鍾城)을 침략했던 것도 노적(老賊)이 우리의 천심(淺深)을 떠보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 누르하치가 노토와 혼인을 맺고, 홀온(忽溫/호륜의 음차, 조선은 울아 부잔타이를 홀온이라 통칭함) 즉 울아의 부잔타이와도
    혼인을 맺고 있는 상태라는 월사 이정구(李廷龜)의 의견이었습니다.
    누르하치가 본격적으로 동해여진을 대거 약탈하기 시작하는 년도는 1607년경 부터입니다.

만주실록 1597년 기사中
sure beilei harangga warkai aiman i anculakv
수러 버이러의 관하의 와르카의 부족 의 안추라쿼
dorgi birai goloi lotun. gasitun. wangginu ere ilan uju i niyalma be bume
안쪽(내內) 강(하河)의 지방의 로툰. 가시툰. 왕이누 이 3 머리 의 사람 을 주며
yehei elcin be gamafi anculakv dorgi birai golo be dahabuha.
예허의 사신 을 가지고 안추라쿼 안쪽 강의 지방 에 항복하게하였다.

무황제실록 1597년 기사中
其布占太亦因與夜黑通,將滿太妻都都庫氏所玩銅錘,遣使送與納林卜祿。
又將滿洲所屬斡兒哈部內按褚拉庫、內河二處酉長落吞、剛石吞、旺吉諾三人許獻夜黑,請其使而招服之。

그 포점태(布占太/부잔타이) 역시(亦) 야흑(夜黑/예허)와 더불어 통(通)함으로 인(因)하여,

장차(將) 만태(滿太/부잔타이의 형 만타이)의 처(妻) 도도고씨(都都庫氏)의 소유한(所) 완동추(玩銅錘/가지고 노는 구리 추)를,

견사(遣使/사신을 보냄)하여 납립복록(納林卜祿/예허의 한)에게 보냈다.

또 장차(將) 만주(滿洲) 소속(所屬)인 알아합부(斡兒哈部) 내(內)의 안저랍고(按褚拉庫)와

내하(內河)의 두 곳의 추장(酉長/酋長의 오기)의 낙탄(落吞)과 강석탄(剛石吞)과 왕길낙(旺吉諾) 3인의
야흑(夜黑/예허)에 허헌(許獻/헌송을 허락함)하고, 그 사신(使)을 청(請)하여 초유(招)하고 복종(服)시켰다.

만주실록 1597년 기사中
將滿洲所屬瓦爾喀部內安楚拉庫內河二處路長羅屯噶什屯旺吉努三人許獻葉赫請其使而招服之

(포점태가) 장차(將) 만주(滿洲) 소속(所屬)의 와이객부(瓦爾喀部) 내(內)의 안초랍고(安楚拉庫)와

내하(內河) 두 곳의 추장(長)인 나둔(羅屯)과 갈십둔(噶什屯)과 왕길로(旺吉努) 3인이
엽혁(葉赫)에 허헌(許獻/헌송을 허락함)하고, 그 사신을 청하여 초유(招)하고 복종(服)시켰다.

→ 1596년에 건주위에서 풀려나서 울아의 한이 된 부잔타이가 다음 해인 1597년에 후금의 설명대로라면
    당시 누르하치의 관하였던 동해여진의 와르카 부족과 내하 지역의 3부족 추장을
    부잔타이가 예허와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자신에게 항복시켰다는 구절입니다.
    이후 와르카 부족의 소유권을 두고 부잔타이와 누르하치는 첨예한 대립 끝에 
   1607년을 기점으로 서로 대규모 회전을 벌이기도 하였지요.

→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바로 동해여진의 내하(內河), 만주어로는 도르기 비라(dorgi bira)의 3부족 중 이름인
    로툰(lotun)/낙탄(落吞)/나둔(羅屯)인 추장의 존재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이 로툰이 조선에서 음차한 노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 1597년 부잔타이가 동해여진에 손을 대자, 
    이에 질세라 누르하치도 1천 병사를 보내 동해여진 와르카 부족의 안추라쿼를 습격합니다.

만주실록 1598년 기사中
aniya biya de warkai aiman i anculakv golo be dailame unggifi
정 월 에 와르카의 부족 의 안추라쿼 지방 을 싸우며 보냈고.
dobori genefi anculakv golo be sucufi orin funceme gaxan be gaifi.
밤 가서 안추라쿼 지방 을 습격하고 20 남은 마을 을 취했다.
tere goloi ba bai gaxan be gemu dahabufi gajiha.
그 지방 땅 땅의 마을 을 모두 항복시키고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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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토(혹은 로툰) <니네들 다 꺼져버렷!!!>

   앞서 후금 사서의 1597년 기록을 살펴보면, 자칭 누르하치 소속의 동해여진을 부잔타이가 빼앗아 갔다는 구절이 있는데요.
   실상 노토나 와르카 등의 동해여진은 두 세력 다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8월1일 기사中
올아적(兀阿赤)이 노토(老土)를 들어오도록 초치하였다. 
그러자 노토가 답하기를, 
『우리는 조상 이래 대대로 조선을 받들어 오면서 2백여 년 동안 무사히 살아왔다. 
  그런데 올아적이 무슨 일로 나를 부른단 말인가.』 하였다. 
그리고는 곧 성을 쌓아 험한 곳에 웅거하면서 올아적이 쳐들어 올 경우 죽음을 무릅쓰고 들어가 지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

   당시 울아(ula)는 후금과 청의 사서에 올라국(兀喇國)/오랍국(烏拉國)/오랍부(烏拉部)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조선의 음차로 올아(兀阿)가 아닐까 싶습니다.
   1597년에 울아의 부잔타이가 노토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에게 복속하라고 협박질 하는 대목으로 보입니다.
   이에 노토는 <꺼져!>라고 말하고 응전태세를 갖추지요.
   
   와르카 부족도 마찬가집니다.
   1607년 누르하치가 점점 세력이 강대해지자, 와르카 부족의 피오성주 첨터허는 
   누르하치에게 부잔타이가 너무 괴롭혀서 살 수가 없다. 도와달라는 청을 하게 됩니다.

여진_5국.jpg


만주실록 1607년 기사中
be bai goro de dalibufi ulai gurun de dahafi.
나 땅이 멀음 에 가로막혀서 울아의 나라 에 항복하였고.
ulai bujantai beile membe ambula jobobumbi.
울아의 부잔타이 버이러 우리를 많이 괴롭힌다.
meni boigon be ganame yabu!
우리의 집안(호구) 를 가지러 맞이하라!

→ 부잔타이의 착취가 너무 심해 와르카 피오성의 성주 첨터허가 만주로 부족민을 이끌고 오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누르하치는 친동생 슈르하치, 장남 추옝, 차남 다이샨에게 3천 병사를 주어 와르카 피오성의 500호를
    호위하여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헌데 이 소식을 들은 부잔타이가 1만병을 동원하여 길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급습하게 됩니다.
    슈르하치는 뒤로 빠져버렸고, 추옝과 다이샨의 남은 병력은 1천에 불과했는데
    용맹하게 적진으로 돌진하여 울아병사 3천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 일로 추옝과 다이샨은 용사라는 칭호의 바투루라 불리게 되지요.


서쪽 누르하치에게 치이고, 북쪽 부잔타이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우리의 불쌍한 동해여진 노토님 ㅠ.ㅠ
슬슬 남쪽에서 그동안 만만하게 봤던 다크 조선님의 역습이 시작됩니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장쾌하게.

노토님 캐불쌍 ㅠ.ㅠ
사스가_조선.png


-마지막 3부에서 계속됩니다^^
출처 http://cafe.naver.com/booheong/115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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