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대한평가3 (전두환)
게시물ID : history_21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anchester
추천 : 12
조회수 : 1119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1/07/25 20:28:48
1.12.12, 신군부 정권장악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는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에게 김재규에 대한 조사를 명령합니다. 이 과정에서 생긴 합동수사본부를 통해 전두환이 부각되는 계기가 됩니다. 당시 대통령은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행직을 거처 대통령직을 수행합니다. 박대통령이 개인적인 야심과 사명감이 공존하는 사람이었다면 전두환은 개인적인 야심과 권력욕이 가득한 사람이었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5.16이 장면정권의 무능으로 인한 혼란을 해결하는 것이 명분이라면 명분일진대..12.12는 갖다 붙일게 없습니다. 정승화와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에 대한 수사문제로 갈등을 겪던중 정승화가 수사에 비협조적이라며, 김재규와 공모했다며 정승화를 체포 하며 일으킨것이 12.12입니다. 명백한 쿠데타인 5.16보다도 명분이 약했기에 박대통령이 5.16이후 혼란수습으로 민심을 얻었던 반면 전두환에 대한 민심은 그닥 좋지 않았습니다. 물론 대통령의 재가없이 선조치 후보고로 이루어진 사건이었고, 최규하는 이미 대통령이라는 하나의 상징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5.17에 비상계엄을 확대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야당인사, 재야인사들을 체포 구금하고, 사실상 정치에 참여하는 수순을 밟기 시작합니다.

2.5.18
민주주의 체제가 신군부에 의해 제 기능을 상실하자 전남대 학생들이 야당정치인의 석방과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광주에서 데모가 벌어지는대 이것이 5.18 광주항쟁의 시작입니다. 어쩌면 더 최근의 사건이기에 성격규정에서 또한번 논쟁이 발생하는대요 폭동이냐, 민주화운동이냐는 거죠. 분명하게 말할수 있는건 5.18은 민주화 운동이며 시민들의 항쟁은 정당 했다는것이 제 의견입니다. 전두환과 군인들이 헌정절차를 깡끄리 무시한채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는대 국민들이 항의하는것을 폭동이라고 규정하는것은 말그대로 극우파들의 반동이라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5.18이 다른민주화 운동과는 달리 논쟁이 많은것은 불청객이 섞였다는 겁니다. 흔히 운동권 을 NL과 PD 로 구분하죠. NL이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로 간주 하고 민족해방을 외치며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계파(지금도 성조기 태우면서 주한미군 철수, 맥아더 동상철거를 외치고 있죠, 지금 민주노동당이 일부입니다)라면, PD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와 정당결성에 주력하는 계파이지요(지금의 진보신당의 주류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주체사상파들이 시위를 주도 했었다는게 5.18의 옥의 티 입니다. 전두환정권이 강경진압하면 사그라들거라 생각했던게, 강경진압으로 인한 시민들의 반감과 강경진압이 주사파 운동권들에게 명분을 제공하여 군대 무기고 탈취와 무장, 선동으로 일이 겉잡을 수 없이 커저버린 점도 있습니다.
실제로 5.18이후 상당수 5.18항쟁 관련자 윤기권 등이 1991년에 수령님품으로 간다며 월북하였고(5.18로인한 보상금 2억원을 수령했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5.18을 기념하고있습니다. 지금도 일부 민주화 인사를 가장한 주사파들이 5.18민주화 운동으로 로 인해 정당성을 얻었으니, 전두환 신군부의 가장 큰 실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처음부터 정권을 잡지 말았어야 했다는게 맞겠지요)

3.집권, 경제호황
5.18이후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단 1표의 반대표 와 나머지 찬성표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하지만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전두환이 억세게 운이 좋았던 것이 마침 세계경제 3저호황과 맞물려 유능한 인물이었던 김재익을 청와대 수석비서관으로 임명, 경제문제에 관해서는 절대 간섭하지 않았습니다(경제에 관해서는 당신이 대통령'이라는 말을햇었죠).  어찌나 신임이 두터웠던지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올려놓은 군부세력실세인 허삼수 허화평이 김재익을 견제하자 둘다 청와대에서 내보냅니다. 덕분에 김재익을 비롯 경제관료들이 아무통제없이 능력을 펼칠수 있었습니다. '오명'(건국대총장을 지내셨는대 지금은 잘모르겠습니다)을 기용하여 한국통신공사(지금 KT)설립 등 대한민국 IT산업의 기반을다지기 시작합니다. 덕분에 유신후반 석유파동으로 잠시 주춤했던 경제가 건국이래 최대 성장을 기록하며 빈곤층이 급격이 출고 중산층이 확대됩니다.(김재익은 아웅산 테러로 인해 순직합니다) 권력에있어서는 영리한 전두환이 언론과 자유의 통제로 인한 국민의 불만을 다른곳으로 돌리고자 '통금폐지' 스포츠로 관심을 돌리기위해 '프로야구 창단' 결정적으로 1981년 올림픽을 유치합니다. 

4.직선제 개헌, 군사독재의 연장.
대선이 다가오면서 국민들의 직선제 요구가 높아지자 지난 대선처럼 간선제로 대통령을 뽑겟다는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호헌철폐를 외치는 국민들의 반대와 박종철(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로 유명하죠)치사 사건을 계기로 6월항쟁이 일어납니다. 처음에 청와대 측근들의 의견에따라 무력진압을 계획했던 전두환은 여당인 민정당 의원들이 유혈사태를 우려하여 반대하자 개헌요구를 수용  직선제로의 개혁이 이루어지며 민정당 총재직을 노태우게게 넘깁니다. 전두환에 대한 민심이 떠난만큼 군사독재의 종결이 자명한듯 보였으나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에서 김영삼이 경선에서 승리 대통령후보가 되자 이에 반발한 김대중이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 결국 야당의 표는 김영삼과 김대중으로 갈렸던 반명 여당표의 결집이 이루어저 노태우가 36%의 득표율로 당선됩니다..사실상 전두환의 하수인이나 다름없는 노태우가 3분의 1남짓한 득표율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대안세력으로 평가받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욕심이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노태우당선직후 전두환에대한 규탄 목소리가 높아지자 전두환은 백담사에 잠시 은거합니다.


전두환정권의 경우  수많은 악행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시절이 '그래도 살기는 좋았다'라고 기억하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경제에있어서는 대한민국의 황금기라고 해도 좋을만큼 호황이긴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두환이 광주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끼친 해악을 정당화 시킬수는 없죠. 당시 국민들이 경제적 풍요뿐만아니라, 민주주의에 강한 열망을 보였던것이 정말 다행입니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