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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항쟁 3부 - 완. 다가온 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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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추천 : 11
조회수 : 86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7/11 15:4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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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 종족이 완악하다지만 / 어떻게 이 물을 뛰어건너랴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 와서 진치고 시위만 한다오
누가 물에 들어가라 명령하겠는가 / 물에 들어가면 다 죽을 건데
어리석은 백성들아 놀라지 말고 / 안심하고 단잠이나 자소
그들은 응당 저절로 물러가리니 / 나라가 어찌 갑자기 무너지겠는가
- 동국이상국집

... -_-

임용한 교수는 최씨 정권이 강화도에서 버틴 이유를 몽고군의 공세한계점으로 짚고 있습니다. 몽고군도 기본적으로 생업에 종사해야 되고, 그들을 징집해서 군사 행동을 펼칠 수 있는 시기는 가을부터 겨울 정도라는 것이죠. 사료에서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 않을 뿐, 5년에 걸친 3차 침공도 매년마다 침공해 총 4번 침공한 것을 합친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몽고는 고려를 영구 점령할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저런 여유가 이해가 되긴 합니다. 지금까지 침공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점들도 해결되구요. 문제는, 몽고군이 저런 상황이었다는 것을 애초에 최우가 알았을지, 그리고 그렇다고 지금껏 한 짓들이 이해가 되는지죠. 물론 임용한 교수도 그에 대해서는 전혀 쉴드를 치지 않습니다. 1차 침공부터 20년이 넘게 흐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려의 정예병인 도방 병력과 삼별초가 투입된 것은 몽고가 강화도로 가는 물길을 끊을 때에야 시작됩니다. 거기다 그들은 정말 미친듯이 잘 싸워줘서 더 분통이 터지게 하죠. 

아무튼 이 1256년은 중요한 분기로, 몽고도 고려도 필사적이 되었던 한 해였습니다. 길고 길던 대몽항쟁이 끝을 향해 가게 된 것이죠. 

대몽항쟁은 보통 7차로 구분합니다. 하지만 이게 대체 어디서 시작된 기준인지 알 수 없습니다. -_-; 5년에 걸친 3차 침공을 하나로 묶을 경우 5차까지는 그런대로 가지만, 차라대가 나선 6차부터는 꼬이죠. 차라대는 매년 들어왔거든요. 1254년부터 쭉이요. 거기다 매년 들어왔다가 나간 게 기록돼 있습니다. 이것들을 하나로 치느냐, 따로 치느냐에 따라 구분이 달라집니다. 임용한 교수의 경우 이걸 매년 쳐서 총 9차례 침공했다고 정리했습니다. 다만 임용한 교수의 정의와 달리 1255년과 1256년 초의 전역은 하나로 묶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마다 정리하는 법은 약간씩 다릅니다. 그냥 침공한 장수별로 나눠서 살리타부터 (3차는 살리타의 복수전이니 포함) 총 4개 전역으로 나누기도 하고, 3차까지와 4차부터를 나눠서 1기, 2기로 나누기도 하더군요. 사실 후반부, 몇 차인지 꼬이는 차라대의 침공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 탓이 클 겁니다. 원사에서 칸의 고려 정벌 명령 횟수로 따진다면 총 8회+1(현지 장수 단위의 무력 시위)입니다. 

저 같은 경우 그냥 1256년까지, 즉 현재 서술한 해까지를 6차로 보려 합니다. 보통 6차는 1254년의 20만여명이 붙잡혀 간 한 해만을 얘기하지만, 그 후에도 계속 들어와 있었습니다. 확실히 화친해서 전쟁이 끝났고 다시 시작했다고 볼 기준이 없는 이상 이 3년간의 일을 하나의 침공으로 묶어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왠지 다들 무시하고 있는데, 한 차례의 침공이 더 있습니다. 이건 그 때 가서 다시 얘기하도록 하죠.

그럼,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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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6년 6월, 몽고군에 투항했던 윤춘이 다시 도망 와서 강화도에 옵니다. 그는 압해도에서의 해전을 말 하며 이렇게 말 합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섬 안에 둔전하여 농사도 짓고 지키기도 하여 청야하여 기다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최항은 그 말을 옳게 여기고 집과 쌀, 콩 3백 석을 주었으며, 친종장군을 제수합니다. 네, 정말 옳은 계책이죠. 그런데... 그럼 지금까지는 뭐 한 거죠? -_-;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실행에 옮긴 모양입니다. 

당시 고려의 상황은 대체 어디까지 악화돼야 나라가 망하는지를 시험해 보는 것 같았습니다. 안 그래도 사정이 안 좋은데 강화도에서 홍수가 났고, 은으로 벼슬을 사는 상황이었는데도 곡식이 없어 사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벼슬아치들의 자식들을 억지로 시키니 그들도 사직하거나 도망갈 정도였죠. 줄이고 줄였음에도 (최씨가 자기 집에 투자하는 것만 빼고 -_-) 더 이상 벼슬아치들에게 줄 녹봉도 없었고, 오히려 그들에게 거둬서 충당해야 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신흥창(흉년에 대비한 창고)를 열어서 진휼한 건 최항의 가병이었습니다. -_- 아 예. 그들이 강화도를, 왕을, 자기를 지킬 병사들이었으니까요.

육지에서는 백성들을 억지로 섬으로 옮기려다 일도 벌어집니다. 청주에 파견된 송길유는 백성들이 집에 둔 물건 때문에 머뭇거릴까 해서 그들의 집과 곡식들을 모두 태워버립니다. (...) 이렇게 강경하게 내륙의 백성들을 옮겼고, 따르지 않는 자의 재물을 불태워 버리니 굶어 죽은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고 합니다.

-_-.............. 

그런 가운데 몽고군은 고려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8월에 차라대는 왕준과 홍복원을 데리고 갑곶강 밖에서 진을 칩니다. 산에 올라 강화도의 형세를 지켜보다 수안현(김포)_로 물러나 주둔했다고 하죠. 이번에는 정말로 염하를 건너려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차라대의 의지는 거기서 꺾입니다. 9월, 몽케에게 갔던 김수강은 그렇게 기다렸던 소식을 들고 돌아옵니다.

"비유하건대 사냥하는 사람이 짐승을 쫓아 짐승의 굴속으로 들어가, 무기를 가지고 그 앞을 막고 서 있으면 궁지에 든 짐승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또 얼음과 눈이 몹시 차서 땅이 얼어붙으면 초목이 어떻게 살아나겠습니까?"

고려왕이 나오는 걸 요구하는 몽케에게 그는 이렇게 설득합니다. 그러자 몽케는 기꺼이 반기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죠.

"너는 참으로 훌륭한 사신이다. 마땅히 두 나라의 우호(友好)를 맺도록 하라"

사실 저 말은 고려에서 정말 지겹도록 한 말이었죠. 그걸 생각하면 저것 말고도 김수강이 정말 몽케에게 잘 보였거나, 고려 중앙군의 투입으로 강화도를 치는 게 어려워졌다는 것을 몽케가 알게 된 게 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6차 침공은 마침내 끝을 맺습니다. 10월에 계엄을 해제했고, 이 때 "15개월만에 적이 돌아갔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차라대가 아예 포기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 달에 60명으로 애도(전남 고흥)을 공격하게 했지만 야별초가 60명 모두를 사로잡아 버렸죠 (...)

몽고군이 돌아갈 무렵, 나름대로 자기의 목소리를 내며 외교에서 활약을 펼쳤던 최린이 죽습니다. 그 때 그의 가족들은 "우리들은 누구를 의지하고 삽니까?"라며 울었고, 최린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 했다고 합니다.

"너희들은 오랑캐가 될 것이다."

예언일까요, 아니면 냉정한 예측이었을까요?

그 후에도 최항은 하던 짓을 계속 합니다. 12월에는 스스로 제중강민濟衆康民이라는 공신호를 칭합니다. 제세안민에 맞춰 해석해 보면 대중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했다 정도겠죠?

... 뭐라구요? -_-;

쑥대밭이 된 지역에서 세금 걷기도 계속됐습니다. 송극현이란 자는 다른 곳도 아니고 서해도(황해도)에서 낭실(뭔지 모르겠네요) 3백여 곡을 거둬서 바쳤고, 어사에 임명됩니다. 사람들은 그를 "낭실어사"라고 불렀죠. 정함이라는 자는 노성, 이규, 이창이 국정을 비방했다고 참소했고, 최항은 그들을 모두 죽였죠. 사람들은 정함을 식인자(者)라고 불렀습니다.

뭐 ~('-' )~ 몽고군이 물러나서 그런지 흔히 하던 걸 계속 하고 있네요.

그 해에는 이상 기온으로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았고, 역병이 돌았습니다. 시체가 길에 덮였고, 은 1근이 쌀 2곡에 거래될 정도였죠. 그런 가운데에서 1257년이 밝습니다. 이 쯤되면 뭐 강조한다거나 할 기운도 빠지네요.

1257년 1월, 최항은 큰 결정을 합니다. 봄에 몽고에 공물을 바치는 춘례진봉을 정지한 것이죠. 그 이유를 이렇게 댔습니다. 

"해마다 우리를 침략하니 섬겨도 소용이 없다"

네. 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걸 멈추면 다가오는 침공은 어떻게 할 생각이었을까요? 그 동안에도 육지의 사정은 나날이 악화돼 갔습니다. 4월에는 안열이 고성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윤군정과 권찬을 보내 토벌했는데 그 곳은 흥원창, 이도 결국 굶주림에서 나온 반란이었던 것이죠. 

참 이렇게 천년만년 살 것 같던 최항은 윤 4월에 갑자기 큰 병이 들어 죽습니다. 갑작스런 죽음이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후계는 정해져 있었죠. 3대를 넘어 4대 세습이었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최의, 최항이 기생에게서 얻은 아들로 천한 출신에서부터 그에 대한 컴플렉스까지 아버지 최항과 너무나도 쏙 빼닯은 아들이었습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젊었던 것은 확실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집권하자 아버지가 싼 똥을 치우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봄에 보내기로 한 공물이 오지 않았으니 몽고는 곧 다시 올 것이었습니다. 그의 능력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죠.

문제는 너무나도 갑작스런 집권이라 그의 지지기반은 최항 때보다 더 좁았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 최항보다도 멍청했습니다. 대대로 무능해진다는 것은 최씨 정권의 특성인가 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건 오히려 고려에는 희소식이었죠.

때는 1257년. 전쟁의 끝이, 대몽항쟁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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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끝났다. 남은 것은 폐허 뿐.

이 전쟁이 우리에게 말 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고려의 자주성? 호국 정신?

최씨 정권의 허수아비였던 왕과, 자기 살기에만 급급했던 최씨 정권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 해 주는가?

그리고, 그 동안 힘겹게 싸워 왔던 백성들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대몽항쟁은 끝났다. 남은 것은 무엇일까?

어찌됐든, 태자는 홀로 몽고로 떠났다. 그가 돌아오면서 대몽항쟁은 끝났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고려도 끝났다. 

1259년, 새로운 고려가 태어난다. 


대 몽 항 쟁

對 蒙 抗 爭


  4부 끝과 시작
출처 pgr 21의 눈시 bb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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