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6. 금요일
한불로
졸필에도 불구하고 지난 필자의 글에 대해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보여주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댓글을 보면서 필자가 느낀 점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클린턴의 정치 슬로건이 상기될 만큼 경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모두들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한국의 경제 발전과정과 그 의미를 좀 더 정치한 논리로 풀어가는 데에는 미흡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박정희 경제 정책에 대한 논점을 부각하지 못했는데, 이 주제는 박정희는 물론 현 야당의 성격을 밝히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쟁점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구하기에는 필자의 능력도 한계가 있거니와, 책 한 권의 분량도 부족할 것이다. 다만 독자들이 지적한 문제 중에 주요한 몇 가지 논점을 다룸으로써 지난 글에서 부족했던 논리를 보충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이 글은 지난 두 편의 글에 대한 보론의 성격을 갖고 있다.
야권 열성 지지자들이 펼치는 박정희에 대한 표준적인 비판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박정희에 대한 이러한 통념적 비판에 대해 장하준, 정승일 등은 이미 여러 매체와 저술을 통해 통렬하게 반박한 바 있다. 필자 또한 장하준 등의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그들의 논지에 기대어 몇 가지를 더 얘기해보겠다.
1. 박정희의 경제 발전 전략은 장면 정권과는 성격이 다르다.
박정희와 그가 이끌던 군부세력들이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제1의 과업으로 설정한 것은 경제부흥을 통한 빈곤 근절이었다. 그러나 의욕만 앞섰을 뿐 경제개발의 청사진을 제시할 역량을 갖고 쿠데타를 일으킨 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와 군부엘리트들이 민주당에서 구상했다는 경제개발계획 문건이라도 구해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찾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때문에 쿠데타 직후 박정희는 경제 계획을 수립할 인재를 찾게 되었고, 그 결과 유원식, 백용찬, 정소영 등을 추천받아 이들에게 경제개발 기본계획 수립을 명하게 되었다. 바로 이들 20~30대 젊은 소장파 경제학자들이 최고회의 안 골방에서 대략 2주 동안 토론과 연구를 하면서 계획안을 입안하게 되었는데, 이 때 당시 이들은 자유당판 '경제개발 3개년 계획안'이라든지, 민주당 때 작성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시안)을 입수하여 내용을 정밀 검토해보았다. 애초에 그들은 노력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그것에 기초하여 경제계획안을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검토결과 지난 정권에서의 경제개발 전략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데에는 이용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폐기되었다. 그 내용은 대체로 외국의 원조에 기대어 농어촌 지원하고, 탄광 사업 등 원자재 사업과 생필품 등 수입대체산업화 전략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경제엘리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만이 아니라 수출주도형 모델과 모방 성장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2차 산업에 대한 집중 육성을 수출전략으로 삼았다. 한정된 재원으로 1차 산업(농업)과 3차 산업(교육)과 더불어 발전시키는 균등발전 모델은 '거지가 헌옷 꿰매듯'한 전략이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교육은 20년 뒤에나, 그리고 농업의 종자개량, 수리사업은 최소 10년 이상이 소요되는 것으로서 자본 형성이 더디거나 정체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그들은 5년 내에 이윤을 낼 수 있는 2차 산업 공업을 집중 육성하고 이 또한 부품 소재를 수입하여 조립 수출하는 것으로 출발한다는 전략을 선택한다. 여기서 얻은 이윤으로 점차 부품을 국산으로 대체하면서 고용을 크게 확산시키며 경제성장을 도모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발상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민간 주도보다, 국가 주도형 경제운영 방식으로 추진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러한 기본 구상은 이후 추진과정에서 다소간의 수정을 거쳤지만 5.16 세력들의 전적인 동의와 전폭적인 지원 속에 박정희판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구체화되어 향후 20여 년간 한국 경제 발전의 모델의 시원이 되었다.
이처럼 박정희판 경제개발 계획은 민주당 장면 정부나 자유당 때의 경제개발 계획과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하는 노선이었다. 추진 역량의 유무를 차치하고 보더라도 장면 정부의 경제발전 전략은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한 수입대체산업화 노선으로서 남미식과 유사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더구나 당시 민주당과 윤보선은 경제발전 전략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도 결여되어 있었다. 피터현이라는 뉴욕헤럴드트리뷴 특파원 기자가 있었다. 그는 1963년 박정희와 맞붙었던 윤보선을 인터뷰했다. 이 기자는 윤보선과 집안 교류가 있을 뿐만 아니라, 5.16으로 인해 한국대사관 문정관에서 해임당한 경험도 있어서, 박정희에 대한 감정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윤보선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으로 취재를 했었다. 그러나 국내 현안과 비전에 대한 질문에 대해 거의 알맹이 없는 대답과 무대책으로 일관하여 충격적인 실망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예컨대 윤보선은 "본인이 집권하면 다 잘 될 것이다. 그런 것은 집권 후에 생각해 볼 문제다"라는 식이었던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방 유세 때 박정희가 제시한 분명한 경제철학과 노선을 보고서는 오히려 박정희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의 경제 전략이 민주당의 것을 일방적으로 베낀 결과라는 얘기는 터무니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2. 박정희의 경제프로그램은 미국과는 무관하다.
박정희의 경제 발전 전략은 미국에 의해 지도받은 프로그램이라는 설도 '로비로 김대중이 노벨상 탔다'는 얘기만큼 황당하기 이를데없다.
한국 전쟁 이후 냉전 체제하의 지정학적 요건으로 인해 미국의 지원과 관대한 시장개방이 한국 경제 발전에 주요한 계기를 만들어 준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미국이 제3세계에 권고한 전통적인 경제발전 정책은 일반적인 비교무역론에 따른 특화된 분업 모델이었지, 박정희가 추구한 선진국 모방 캐치업 모델을 권고한 적이 없다.
60년대 중반, 당시 미국에서는 박정희 정부에 대하여 시장 경제 노선을 채택하라고 수없이 촉구했다고 한다. 맥키논 같은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자본 자유화나 시장 개방 정책 등을 실시하라고 권고하는 식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권고한 금융자유화 조치를 취했다가 시장 이자가 삽시간에 뛰어올라 경제가 거덜 나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8.3 사채 동결 정책까지 시행할 정도였고, 이후 미국의 시장주의 권고는 박정희에게 'OUT OF 안중'이었다고 봄이 정확하다.
미국이 만류했던 조선과 제철 등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전략을 박정희가 강고하게 추진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 미국은 이것에 투자할 상업 차관은 거의 해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배상금으로 포항제철을 만들었고, 유럽에서의 차관과 베트남 파병으로 들어온 돈으로 조선 등 중화학 공업에 투자한 것이다.
모든 산업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산업 경쟁력을 갖춘 후, 자신들이 발전했던 경로를 개발도상국들에게 '친절히' 안내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장하준이 '사다리 걷어차기'라고 표현했듯 산업 선진국에 진입했을 때 '자유무역론'을 개발도상국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다.
더구나 박정희가 중화학 공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했던 70년대는 미국과의 관계도 그리 좋지도 않았다. 닉슨은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카터는 미군 철수 문제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는데, 박정희가 핵개발에 나서고 '자주 국방'을 강조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때부터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미국이 권고하는 전형적인 경제 정책은 아마도 유신 독재와 비슷한 시기에 쿠데타로 집권하여 수만 명을 학살한 피노체트의 칠레에서의 경제 실험이었을 것이다. 피노체트 정권에서의 경제 관료 그룹은 '시카고 보이스'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신자유주의의 이념의 산실이 되었던 시카고대학 경제학과 출신들로 포진되었다.
그리고 그 이념에 충실하여, 세계에서 처음으로 칠레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전면적으로 시행했다. 국가 산업 부문 대부분을 죄다 민영화하였고, 자본 시장을 개방화하였다. 그 결과 남미에서 비교적 소득 분배가 그런 대로 잘 되었던 칠레가 가장 불평등한 나라로 전락하게 되었고, 피노체트가 사라진 지금에도 OECD 국가 중 멕시코보다도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가 되어 버렸다.
피노체트는 잘 알다시피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옌데 정권을 CIA의 비호 속에 무너뜨리고 칠레를 세계에서 가장 친미적인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의 경제 원조를 많이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농산물과 구리 등 광산업 외에 이렇다 할 제조 산업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만일 60~70년대 박정희가 미국의 권고대로 선진국과 다른 산업 부문(경공업)으로 특화시켜서 경제발전 전략을 수립했다면 단언컨대 우리는 멕시코 같은 나라처럼 다국적 자본의 하청 공장으로 근근이 먹고사는 나라로 전락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독재를 실시했던 칠레라는 나라와 전적으로 대비되는 박정희의 경제 노선은 10년 후에 경제의 펀더멘털이 선진국 형의 산업화 국가로 만드는 기틀이 되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를 우상화하고 신격화하는 것이 우스운 것만큼, 그를 미국의 꼭두각시나 황당한 인물로 폄하하는 것도 유치한 짓은 마찬가지다.
3. 박정희의 관치경제는 재벌만 살찌우고, 중소기업의 희생과 빈부격차만 확대시켰나?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필자의 첫 번째 글에서 체험적인 면에서 반박한 바 있는데, 좀더 거시적인 측면에서 보충해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흔히들 싱가포르와 대만과 비교해서 한국에서의 재벌과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문제를 거론한다. 그리고 중소기업이 상대적으로 발전된 대만을 대안적 모델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중소기업이 발전했다고 해서, 소득이 평등해지고 대기업이 많다고 해서 불평등해진다는 것은 경험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전혀 관계가 없는 얘기이다.
싱가포르와 대만 그리고 한국 등 '아시아의 용'들은 모두 강력한 국가 개입주의로 경제가 발전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성장전략에 있어서 한국과 대만, 싱가포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대만은 공산당에 패배한 국민당이 옛 포르모싸 섬을 장악함으로써 대륙출신이 토착 타이완인을 지배하게 된 나라였다. 국민당 정부는 국가안보에 결정적이라고 간주한 중화학 공업의 경우, 공기업을 통해 발전시켰으며, 그 공기업 인사들은 대륙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대신 토착 타이완인들에게는 중소기업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유는 허용하고 그들에게 광범위한 지원을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