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아시다시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가능했던 원동력에는 쵸슈와 사쓰마라는 두 번들의 동맹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적어도 초기에는) 사쓰마가 보다 우위에 있었죠.
역적으로 몰린 쵸슈를 극적으로 살려준 것은 다름 아닌 사쓰마였고, 전대 사쓰마 번주의 양녀는 전대 쇼군의 정실(우리나라로 치면 중전에서 대비까지)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번 중에서도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자랑하던 번이었습니다.
사쓰마는 비교적 근대적인 공장을 운영했을뿐만 아니라 번의 자금력만으로 서양식 증기선을 구입할 수 있었고 쵸슈에게 돈을 빌려주고 또 대신 서양식 무기 (최신식 라이플, 암스트롱포 등) 를 구입해주기도 했습니다.
어떻게보면 중앙정부도 아니고 일개 번에 불과한 사쓰마는 어떻게 이런 막강한 자본을 갖추게 되었을까요?
그 비결은 바로 <설탕>에 있었습니다.
설탕, 정확히 말하자면 사탕수수는 사실 세계사를 바꾼 혁명적 작물이었습니다.
설탕은 대항해시대 시절 스페인처럼 은광이나 금광이 나는 식민지를 차지하지 못했던 영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게끔 도와준 작물이었고, 미국과 프랑스를 부유하게 만들어준 작물입니다.
당장의 섭취가 아닌, 가공해서 판매하기 위해 재배된 사탕수수는 플랜테이션과 노예무역을 아메리카 대륙에 전파했고 이는 다시 유럽 식민제국들의 자금줄이 되었기 때문이죠.
사쓰마가 다른 번들과 달랐던 점은 바로 이러한 마법의 작물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609년에 사쓰마는 류큐왕국을 정벌하고 거의 속국화시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19세기 초, 류큥의 아마미 군도에서 사탕수수 재배가 가능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곳에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운영하기에 이릅니다.
사쓰마 번은 남쪽에 위치라고 기후가 따뜻했기 때문에 사탕수수 재배에 유리했으며 실질적으로 사탕수수에 관한 한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즈쇼는 규슈 남단의 섬들에 명령하여 모든 논을 밭으로 바꾸어 사탕수수를 심도록 했다. 식량을 수입에 의존해야 했던, 그 지역 일대는 흔히 ‘사탕지옥’(砂糖地獄, 사토지고쿠)이라 불리는 거대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되었다. 엄격한 감독 아래 생산할당량이 정해져 심지어 아이들이 사탕수수에서 묻은 당분을 맛보려고 손가락을 빠는 행위조차 처벌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어른의 경우 사탕수수를 밀반출하거나 전용(轉用)하다 붙잡히면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즈쇼는 또한 사쓰마 번이 수출할 수 있는 다른 상품들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칠기, 평지씨, 밀랍, 약초, 사프란, 진사(辰砂), 종이, 가축 등에도 전매를 실시했다. 결국 1840년대에 사쓰마 번의 재정은 흑자로 돌아섰다. 이로써 사쓰마 번은 군사력을 키울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마리우스 B. 잰슨, <현대 일본을 찾아서 1>
아마 동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플랜테이션을 운영한 나라(?)는 사쓰마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자본력으로 자체적 근대화와 무장화에 성공했고 이를 기반으로 메이지 유신의 주력이 되었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