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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삶이기를
게시물ID : readers_220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김밥천국만세
추천 : 2
조회수 : 68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10/08 17: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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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나를 반겨주는 건지, 조롱하는 건지 모를 밝은 태양이 가장 먼저 보인다. 매일 밤 잠들 때, 저 태양을 다시는 보지 않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지만, 하늘은 야속하게도 내 기도를 절대 들어주지 않는다.
 

잠을 자던 벤치에서 일어나려고 굳은 몸을 꾸물거리고 있는데, 잠시 잊고 있던 그들의 공격이 내 귀를 마구 괴롭힌다.
 

자동차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듯 발산하는 거친 엔진 소리, 뭐가 그리도 좋은지 서로 시시덕거리며 지나가는 그들의 발소리와 웃음소리, 길거리 상인들이 자신 좀 보아달라고 내뱉는 호객 소리.
 

행복한 것들끼리 행복에 겨워 포효하고, 넘치는 행복을 감당할 수 없어 서로 나누기 바쁜 그들의 소리가, 날 괴로워 미치게 만드는 소리가 내 귓속을 강타한다.
고통스럽다. 잠시 누운 자세 그대로 귀를 막아보지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 손을 통과하여 내 마음을 어지럽힌다.
 

부럽지? 너도 우리처럼 되고 싶지? , 하지만 넌 안 돼! 거지 주제에 어디 건방지게 행복을 넘봐? 행복은 우리 영역이야. 넌 그저 불행의 땅에 씨앗이나 뿌리며 살아. 그 씨앗이 발아되는 일은 없겠지만. 어쩌겠어? 그것이 네 복인걸. 불행도 복이야. 왜냐고? 불행한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이 훨씬 많거든. 너희는 선택받은 거야. 하하하.
 

너무 괴롭다. 아직도 귀가 욱신거린다. 요즘 들어 자주 환청이 들린다. 어디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귀가 문제인 것인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마도 둘 다일 확률이 높지만 말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벤치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빈 소주병이 눈에 들어왔다. 가지고 있던 마지막 돈이었다. 하루 3끼는 고사하고, 하루 1끼라도 제대로 된 쌀밥을 먹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이제 다시 빈털터리인데 오늘은 또 어떻게 버텨야 할지 벌써 막막하다.
 

시선을 돌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운동하는 사람들, 데이트하는 커플들, 애완동물을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 등 각양각색의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이 가시가 되어 내 눈을 찔러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한 방울 흐른다.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됐는지 생각해보았다.
 

가장 먼저 교통사고가 있었다. 내 잘못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이들과 약속한 가족여행을 떠나는 중이었다. 눈이 감겨왔지만, 운전대를 놓지 않았다. 그날마저 여행을 미룬다면 아이들이 받을 상처와 실망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기분 좋아 떠드는 소리에 정신을 잡아가며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 집중하는 줄 알았었다. 그러나 서서히 시야가 좁아져 갔다. 그리고 포근하게 감겼던 두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내 느낌엔 눈을 깜빡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로 잠들었었나 보다. 나와 아내는 큰 부상이 아니었지만, 우리 아이들은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아비의 실수 한 번으로 내 자식들은 목숨을 잃었다.
 

불행은 불행을 낳는다고 했던가, 아내는 날 증오했고 우리 부부의 대화가 끊어져 갈 무렵, 무리한 사업 확장의 실패로 집 안에 빨간 딱지가 붙여졌다. 그와 동시에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고, 난 그 요구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아내는 떠나갔고, 그렇게 나는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 어휴, 이번 달도 이것저것 빠지고 나니까 남는 게 없네. 죽겠다 정말. "
 

문득 들려온 현실 속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보니 남자 한 명이 벤치에 앉아 한숨을 거듭 내쉬고 있었다. 보아하니 사회를 향해 내디딘 첫 발자국이 땅에 스며들기도 전인 사회 초년생으로 보였다.
저 나잇대에 청년들이 흔히 겪는 일이다. 이제껏 자신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던 부모님의 품을 벗어나 살다 보면,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번다는 것은 내 여가생활을 즐기고, 나를 위해 사용한다기 보다 다른 누군가에게 돈을 갖다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집주인에게 돈을 드리고, 나라에 세금을 바치고, 휴대폰 통신사에 돈을 내고, 보험회사가 돈을 빼가고 등등 모두에게 베풀고 나면 남는 돈은 지극히 일부뿐이다.
재테크? 그것도 있는 사람이나 하는 이야기다. 아직 학자금 대출 빚이 남아있다.
꾸역꾸역 빚을 다 갚고, 저축을 시작하려고 하면 결혼의 압박이 다가온다. 그런데 차도 없고, 집도 없고, 모아둔 돈도 없다.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그것도 다 평범한 일반인들 사이에나 해당하는 이야기다.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잔인한 현실에서 살고 있다. 내가 지금 더 청년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억만금을 줘서라도 돌아가고 싶은 행복한 현실이다.
죽겠다는 소리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진짜 죽고 싶은 사람이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나는 행복한 청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당장 오늘 끼니를 걱정해야 했고, 오늘은 뭘 해야 할지 걱정해야 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구걸이라도 하려면 유동인구가 많은 곳으로 가야 하는데 이 공원은 사람이 너무 적었다.
 

오늘은 알코올과 허기 모두를 잡을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 수 있기를 희망한 채 걸음을 옮겼다. 당장 이틀, 삼일 허기를 참을 수는 있어도 술이 없이는 하루도 버티지 못한다. 알코올이 들어가지 않으면 잠도 오지 않고, 이유 없이 불안하며 온몸이 떨려온다. 그러니 돈이 생기면 1순위는 밥보다는 술이었다. 물론 어제도 그러했고.
 

조금 걷다 보니 공원 입구에 사람들이 줄지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나와 같은 노숙자들이었다. 호기심에 다가가 보니 어느 단체에서 무료급식소를 개설하여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종교 같은 건 없는 편이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신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식사를 나눠주고 있는 저들이 나에겐 신이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내 차례가 다가왔다. 메뉴를 살펴보니 떡만둣국이었다. 얼마 만에 쌀로 만들어진 음식을 먹는 건지 모르겠다.
 

" 맛있게 드세요. 여기 들어있는 만두 저희가 하나하나 정성스레 빚은 거라 굉장히 맛있을 거예요. "
배급해주던 처자가 사글사글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뒤, 적당히 빈자리를 찾아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걸신들린 듯이 마구잡이로 입에 퍼 넣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부근에는 노숙자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어디서 다들 이렇게 몰려들었는지 봉사단체에서 설치해둔 테이블은 이미 꽉 차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발 늦게 도착한 노숙자들은 앉을 자리가 없자 하나둘 길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고, 그 수는 점점 불어났다.
한적한 공원을 이용하던 일반 시민들은 노숙자들이 떠들어대는 시끌시끌한 소리와 아무 데나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어 통행에도 불편을 느끼자 하나둘 불만을 토로하며 공원을 떠났다.
 

" 아우, 시끄러워! 거지들 잔치 나셨네! 오빠, 우리 빨리 나가자. "
 

" 아니, 아가씨. 뭐가 어쩌고 어째요? "
 

공원을 떠나려던 한 커플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린 말에 노숙자들이 따지고 들면서 싸움이 일어났다.
 

" 제가 뭐 틀린 말 했어요? 공원 전세 낸 것 마냥 큰 소리로 떠들기나 하고, 사람 지나다니기 불편하게 길이나 막고 있고. 안 그래요? "
 

여자는 조금 건방지다고 생각이 들 만큼 거침없이 쏘아대고 있었고, 노숙자들은 체념한 듯 묵묵히 식사를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식판까지 엎어가며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커플의 남자 쪽은 싸움을 중재하는 듯하면서도 여자친구의 말을 두둔하고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수군수군하며, 어느 쪽을 향한 건지 모를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 어머, 아저씨! 더러우니까 내 몸에 손대지 마요! 아우~ 퀴퀴한 냄새. 비위 상해 진짜. "
 

나는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 채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를 떠났다.
저들을 향한 손가락질은 노숙자 쪽과 커플 쪽 중 어느 쪽을 가리키는 것이며, 막말하며 시비를 걸어온 커플 쪽이 진상인지, 그런 행위를 하게 만든 노숙자들이 진상인지는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 같은 노숙자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것이다.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도, 그로 인해 욕을 먹는 것도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의 처지를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하고, 더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재기를 할 수 없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막노동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 같은 건 이미 버린 지 오래다.
그저 이렇게 밥 한 끼 공짜로 먹으면 재수가 좋은 것이고, 누가 돈이나 주고 가면 고마운 것이다. 미래를 향한 계획이나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사치 중의 사치이다. 당장 하루하루를 연명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먼 미래를 본다는 건 정신 나간 행동이다.
그렇게 걷다 보니 오늘 잠에서 깨어난 벤치가 보였다. 물론 그 옆에 놓인 빈 소주병도 함께 말이다.
 

난 급식소가 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싸움의 열기는 상당히 가라앉아 있었다. 노숙자들은 그냥 정신 나간 여자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듯했고, 커플들은 노숙자들이 더는 따지고 들지 않자, 돌아가려는 듯했다. 나는 근처로 조용히 다가가 여자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던졌다.
 

쨍그랑-
 

소주병은 여자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파편들은 비산하며 커플들의 다리에 상처를 냈다. 직접 맞은 것은 아니라 크게 찢어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화나게 하는 것과 피를 보게 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그들은 나를 향해 육두문자를 날려대며 다가오려 했지만, 지금껏 그들이 대면하고 있던 노숙자들의 벽을 뚫고 달려들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고생을 한 적도, 시련을 겪어 본 적도 없어 보이는 그녀의 가느다랗고 티 없이 뽀얀 다리에서 몇 가닥의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확인한 나는 미련 없이 뒤돌아 걸어갔다.
 

조금 걸어가다 보니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면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손을 눈에 갖다 대자 촉촉한 물기가 느껴졌다.
내가 왜 울고 있는 거지? 너무 화가 난 마음에 눈물이 나는 건가? 무엇이 화가 나지? 나는 냄새나는 거지새끼라는 걸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커플들에 대한 분노인가. 딸 같은 여자에게 저런 막말을 들어야 하는 내 신세에 대한 자기 혐오적인 분노인가. 잘 모르겠다.
 

한 번 시작된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눈물을 흘리며 걷다 보니 공중 화장실에 다다랐다. 안으로 들어가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을 바라보니 머리와 수염은 아무렇게나 자라나 지저분하기 그지없었고, 입고 있는 옷은 죄다 때가 타서 갈색빛이었다. 정말 꾀죄죄했다. 그리고 눈 주변엔 눈물과 때가 섞여 시커먼 땟국물이 범벅이었다.
 

" 이런 거지새끼. "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욕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그 여자에게 미안해졌다. 거지새끼에게 거지새끼라고 한 건데,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잠잠했던 눈물이 다시 한 번 터져 나왔다.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내 처지와 내 몰골과 내 상황을 보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난, 그 화장실에서 어린애처럼 한참을 펑펑 울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걷고 또 걸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어 땅만 보고 묵묵히 발걸음을 놀렸다.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혔다. 뒤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내 옆을 스쳐 가는 수많은 사람이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보고, 손가락질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태양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문득 쌀쌀함이 느껴져 주위를 둘러보니 다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제 여름은 다 지나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긴 한가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발밑을 흐르고 있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그 밝기를 다 하고 저물어가는 태양을 감싸 안아 마지막으로 힘껏 반짝이도록 도와주는 것 같았다. 태양이 담겨있는 강물이 무척이나 포근해 보였다. 저 강물의 기운을 받아 태양은 내일이 되면 언제 저물었느냐는 듯 다시 힘차게 떠오를 것이다. 사람들이 쳐다도 보지 못할 만큼 밝고 눈부시게 말이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태양도 받아들이는 강물인데, 저 높이 떠 있는 태양에게도 힘을 북돋워 주는 강물인데, 나에게도 힘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저 품으로 뛰어들어 안겨있다가 나온다면, 나도 이 지긋지긋한 삶을 벗어나, 다시 한 번 밝게 타오를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인가에 홀린 듯 난간으로 다가갔다. 밑을 바라보니 주황빛으로 물들어있는 강물의 모습은 차갑거나 무섭다기보다는, 따뜻하고 안락해 보였다. 그래 나도 저곳에 들어가면 재기할 수 있어. 나는 한쪽 다리를 들어 난간을 넘으려고 했다.
 

빵빵-
 

" 아저씨! 뭐하시는 거예요! 거기서 떨어지면 죽어요! "
 

지나가던 내 행동을 본 택시기사의 외침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나는 내 모습을 살펴보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서러웠다. 너무 서러워 눈물이 또다시 내 볼을 적셨다.
 

옆에서 택시기사가 뭐라고 계속 말을 걸어왔지만, 귀에 들어오는 말은 없었다. 그 자리를 벗어나 계속 걸었다. 택시기사도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속도를 올려 떠나갔다.
 

나는 강가에 있는 공원으로 내려갔다.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은 날씨가 쌀쌀하여 주변에서 신문지를 비롯한 쓰레기들을 주워왔다. 그리고는 적당히 한적한 장소를 찾아 누웠다. 이 공원은 크기가 좀 있고, 바닥이 잔디밭이라 사람들이 꽤 많아 조용한 곳을 찾는 것에 무척 힘을 들였다. 그렇게 눕고, 주워온 쓰레기들을 덮고 나니, 나도 하나의 쓰레기가 된 것 같았지만 상관없다. 냄새나고, 버려지고, 사람들이 피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늘은 쓰레기처럼 잠이 들었다.
 

 

 

뭔가가 툭툭 치는 느낌이 들어 잠에서 깨어났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떠 앞을 바라보니, 꾀죄죄한 차림의 노숙자 3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정신이 안 차려져 멍하니 누워있는데, 눈앞이 번쩍하더니 내 몸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무차별적인 발길질이 날아와 꽂혔다.
 

" . . . 거지새끼! . 여긴 우. . 우리 구역이야! 꺼져! "
 

그랬다. 노숙자들 사이에서도 내 구역, 네 구역이 있었다. 여긴 잔디밭이라 푹신하고, 유동인구도 많아서 이들이 진작 찜을 해놓은 장소였나 보다. 지금껏 이런 장소들을 잘 피해 다녔었는데, 어제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아무 생각 없이 쓰러져 잠들었나 보다. 한참을 두들겨 패다 내가 미동이 없자 그들은 나를 향해 한껏 침을 뱉은 뒤 떠나갔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가 여기 쓰러져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하는 동안, 이 공원에 있는 어떠한 사람도 날 도와주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하다. 더러운 거지가 더러운 거지를 때리는데, 깨끗한 일반인이 굳이 끼어들어 더러워질 필요가 있나 싶다. 멀찍이 떨어져 날 구경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표정에서 연민이나 동정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들 하나같이 날 경멸하고 혐오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에이 거지새끼. 먼지나 날리고 말이야. 뭐가 이리 시끄러워? 공원 전세 냈어? 어머머, 짐승도 아니고 저게 뭐하는 짓이야?
, 근데 너무 어울리네. 주변에 흩어진 쓰레기들과 함께 쓰레기처럼 엎어져 있는 꼴이라니.
이런 아름다운 곳의 미관을 해치는 저런 노숙자들은 싹 다 긁어모아서 어디 섬으로 보내버렸으면 좋겠어. 거기서 자기들끼리 흙을 파먹고 살던, 서로 싸우든 맘대로 하라지? 에이, 아침부터 못 볼 꼴 보네.
 

그들은 어느새 나에게 흥미를 잃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추하게 엎어진 상태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더더욱 내가 불행해 보였다. 그들이 내뿜는 행복한 기운과 행복한 소리가 다가온다.
, 안돼. 듣기 싫어. 오지 마. 아악!
그것들은 내 온몸을 무차별적으로 난도질했다. 불행한 것들은 싹을 뽑아야 한다는 듯이 마구 날카롭게 나를 베어 갔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날 죽여 없애기라도 할 듯이 잔인하게 공격해왔다.
불행해. 넌 너무 불행해. 왜 아직 살아있어? 그냥 죽어. 죽어버리라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하지 말고 사라져버리라고! 꺼져!
난 그 자세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온몸에 달라붙는 따가운 햇볕에 눈을 떴다. 움직이기 위해 굳어있는 몸에 힘을 불어넣으려 했지만, 몰아치는 고통이 방해해왔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쓰러져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꾹 참아가며 몸을 일으켰다. 눈앞이 하얘지면서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등을 기대고 앉아있을 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자 가까운 곳에 있는 벤치가 눈에 띄었다. 비척거리며 다가가 쓰러지듯 앉았다.
 

" 하아…. "
 

노숙자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는 아는 게 없었기에 여기서 두들겨 맞고 쫓겨나고, 저기서 두들겨 맞고 쫓겨나고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맞아가며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로는 그런 부류를 피해 가는 방법을 터득했었는데, 어제는 잠시 방심했었나 보다.
 

정말 이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차라리 일반 시민에게 더럽다고 욕먹으면서 맞는 게 덜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뿐이다. 나보다 나은 사람도 아니고, 이런 최하층민인 나랑 같은 급의 사람들이 자기네들 구역 확보한답시고 때리고 쫓아낸다. 거지인지 노숙자인지 구별이 안 된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만 다른 공간에 떨어진 듯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혹시 내가 불행을 흡수하는 사람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불행해지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행복해지고?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데 어떻게 나만 불행할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의 얼굴에서는 근심, 걱정, 고뇌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나에게 과시하듯이 행복한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씁쓸한 표정으로 둘러보고 있던 나는, 나들이를 나온 듯한 한 가족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은 돗자리 주변을 빙글빙글 뛰어놀다 돗자리로 다가와 엄마와 아빠가 입에 넣어준 음식을 물고는 또다시 까르르 거리면서 뛰어다닌다. 아이들의 부모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정말 행복해 보였다.
 

나는 딱 저런 모습을 원했었다. 우리 가족이 사고를 당하던 날, 저런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 피곤함에도 운전대를 잡았던 것인데, 그 선택 하나가 우리 가족을 산산이 부숴놓았다.
 

씁쓸한 마음에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폭행의 후유증은 끝났다. 어차피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인데, 이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딱히 정해놓은 목적지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이 공원을 떠나야 했다. 뭉그적거리다 한 번 더 그 패거리들을 만난다면 그땐 날 죽일지도 몰랐다. 노숙자 한 명 죽는다고 알아줄 세상이 아니므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아사로 판명 짓고 화장한 후, 무연고자 봉안당에 안치할 것이다. 사실 지금 내 형편에 그 정도 장례면 호강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삶이라도, 괄시받고 멸시받으며 살아도, 바퀴벌레처럼 질기게 오래오래 살고 싶다. 딱히 목표도 없고, 어둡기만 한 미래지만 살아야 한다. 사람으로 태어나 벌레로 죽고 싶지는 않다.
 

얼마를 걸었을까? 저 앞에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지나다니는 버스도 많고, 이용하는 사람도 많은 정류장이었다. 목적지를 저곳으로 정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구걸하기 위해서였다.
 

정류장 뒤쪽 후미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앉기가 무섭게 사람들을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이 정도는 예상했다. 불쌍해 보일 것이다. 그러니 얼마라도 줘. 많이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술 한 병 살 수 있는 정도의 돈. 알코올이 필요했다. 어제 술을 먹지 못했던 후유증인지 몸이 떨려왔다.
 

그렇게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다들 수군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요즘 세상이 좀 흉흉한가? 병든 거지로 보이지만 언제 미친 행동을 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선행을 베풀다가도 화를 입을 수 있는 게 요즘 현실이다. 그래도 마땅히 갈 곳도 없었기에 그냥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노숙자가 된 후, 얻은 취미랄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사람을 관찰하는 일이다.
일반인일 때는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느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바라볼 여유 같은 건 없었지만, 지금은 남는 게 시간이었다.
게다가 나에게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돌아오는 건 비참한 마음뿐이니 다른 행복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게 마음이 편했다.
 

정말 많은 사람이 보였다. 교복에 책가방을 메고 오늘 게임 들어오라고 외치며 지나가는 학생들, 예쁘고 멋있게 차려입고 버스를 기다리는 젊은이들도 보이고, 시장에서 장거리를 봐오는 아주머니들, 행복해 보이는 젊은 부부와 유치원 옷을 입은 아이들, 그리고 재잘재잘 거리는 아이들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는 누군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그들의 삶에 내가 끼어들 자리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내 인생이 행복한데, 구태여 불행한 사람과 엮여 좋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행복하고 즐거운 것만 바라보고 즐기기도 바쁜 시간 틈에, 더럽고 냄새나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 시간은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나랑 별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도와주겠지, 어디서 들었는데 저런 거지들 다 부자라더라, 맹인이라며 구걸하는 사람들은 밤이 되면 눈이 뜨이고, 다리를 못 쓴다며 구걸하는 사람들도 밤이 되면 잘만 걸어 다닌다더라. 알고 보면 나보다 잘살지도 몰라. 속으면 안 돼. 이런 마음으로 본인 스스로 위로하며 그냥 지나간다.
 

내가 그랬었다. 내가 행복하게 살아갈 때 거지들을 보며 느낀 감정이었다. 물론, 정말 부유한데 구걸하는 사람들, 거짓으로 감성팔이 하며 구걸하는 사람들도 정말 있지만, 그렇지 않고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는 걸 그때의 난 알았어야 했다. 지금의 나처럼 천 원 한 장, 동전 하나가 절실한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나는 그대로이지만 버스정류장 근처에 사람들은 계속 바뀌었다. 물론, 나를 쳐다도 보지 않는 사람과 힐끗 보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계속 사람들을 바라보고 앉아있는데, 내 앞에 리어카가 멈춰 섰다. 뭔가 하고 바라보니, 리어카엔 박스나 유리병들이 쌓여있었고, 그것을 끌던 할머니가 굽어진 허리를 이끌고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손에는 빵과 우유를 든 채였다.
 

" 아이고, 총각. 여기서 요로코롬 앉아서 뭐하는 거여. 얼른 이거 묵어."
 

잠시 상황파악이 안 되는 바람에 쳐다보고만 있었다. 할머니 본인도 어려워 보이시는데 왜 나한테 이걸 주는 거지? 정말 받아도 괜찮나?
 

" 뭐 하는겨, 빨리 묵어! 아까부터 보니께 계속 여기 앉아있드만. 밥 안 묵었제? "
 

할머니는 내 손에 빵과 우유를 쥐여주며 소리쳤다.
 

" …….감사합니다. "
 

" 오메, 목소리에 히마리가 하나도 없네. ! 이것도 가져가. 아까 주슨 건디 깨끗하니께 그냥 써! "
 

할머니는 혼내듯이 소리치는 말투와 다르게 담요로 포근하게 내 몸을 감싸주고, 내 옆에 앉으셨다.
 

" 어여 묵어! 안 먹을 꺼여? "
 

할머니의 말을 신호탄으로 빵과 우유를 허겁지겁 먹어나갔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에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이런 상황은 또 처음이었다. 할머니 본인도 매우 힘들어 보이시고,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실 것 같은데, 왜 나한테 이런 걸 챙겨주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누군가의 진심 어린 호의였다.
 

내가 빵과 우유를 다 먹을 때까지 할머니는 내 옆에서 날 바라보고 계셨다. 이윽고, 다 먹고 나자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쥐고 말씀하셨다.
 

" 총각, 많이 힘들지? 그래도 워쩌겄어. 힘내서 살아가야지. 사정은 잘 모르지만, 다른 건 생각하지 말어! 다 잊고 자신을 위해 살아가. 총각의 행복을 위해 살란 말이여. "
 

" 할머니는 행복하신가요? "
 

" 그럼~ 난 이렇게 사는 게 재밌고 좋구먼. 그러니께 이렇게 여유 있게 총각도 도와주고 하는 거 아니여. "
 

내가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자 할머니는 내 등을 톡톡 두드려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난 그럼 갈 테니께 밥 굶지 말고 잘 살어! "
 

나는 혼란에 빠져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가시는 할머니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왜 행복하시지? 나이 들어 허리도 굽으시고 리어카를 끌고 다니다 박스나 유리병이 있는 곳에서 털썩 주저앉아 쓰레기들 사이에서 박스 해체작업, 유리 분류작업 등등을 하시는 게 행복하단 말인가? 누가 봐도 불행한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난 다 먹은 빵 껍질과 빈 우유 팩을 만지작거렸다. 저렇게 벌면 얼마나 버신다고 나 같은 노숙자에게 이런 걸 챙겨주신단 말인가. 노숙자 생활 평생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보긴 처음이었다. 지금껏 행복해 보이고 잘사는 사람들을 보며 날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 아닌 원망을 했었는데, 나보다 조금, 아주 조금 나아 보이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나니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알 수 없는 찝찝한 기분을 뒤로하고 구걸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정이야 어찌 됐건 오늘 하루 끼니는 챙긴 셈이니, 더는 여기에 앉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이제는 잘 곳을 찾아야 했다. 오늘처럼 그런 꼴을 또 당할 수는 없었으므로 신중히 찾아야 했다. 또다시 목적지 없는 방랑을 시작했다. 물론 이름 모를 할머니가 덮어주신 담요는 한 손에 꼭 쥔 채였다.
 

걸었다. 오늘 아침 맞았던 곳이 욱신거렸지만, 참고 걸었다. 어차피 아픈 곳은 시간이 지나면 낫기 마련이다. 인간 생활의 3대 요소인 의. . 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마당에 아프다고 끙끙거리며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그저 또다시 맞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칠 뿐이다.
 

잠시 정신을 놓고 걷다 보니 지하철역 안에 들어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노숙자들이 매우 많았다. 이곳을 봐도 노숙자, 저곳을 봐도 노숙자였다. 하나같이 박스나 신문지, 비닐봉지 등을 모아와 아주 작은 그들만의 공간을 꾸리고 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노숙자를 바라보았다. 왜소한 몸집에 서서히 은빛으로 물들어가는 머리칼을 가진 노인이었다.
그는 어디에서 얻었는지 삼각김밥을 먹기 위해 포장을 뜯고 있었다. 내가 그를 향해 다가가자 음식을 뺏는 거로 오해했는지 날 째려보며 몸을 돌려 경계했다. 난 그럴 생각이 없으니 안심하라는 의사 표현으로 두 손을 펴서 손바닥을 내보인 후 조심스레 다가갔다.
 

" 뭐죠? "
 

" 뭐 하나만 여쭤보려고 합니다. 갈 곳이 없는데, 여기 아무 데나 자리 깔고 쉬어도 됩니까? "
 

" 그러세요. "
그는 짧은 대화를 마치고 허겁지겁 삼각김밥을 먹어치웠다. 혹시 이곳도 어느 노숙자 패거리에 들어가야만 쉴 수 있는 공간인가 하고 물어보았던 건데 내 기우였던 것 같다.
나는 안심하며 순식간에 삼각김밥을 먹어치우고 자리에 누워있는 남자의 곁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이런 곳이 있었다면, 진작에 찾아왔을 텐데 아쉬웠다. 나 같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으니 왠지 모를 동질감도 느끼고, 지하철 역사 안이니 밤에도 쌀쌀함이 덜 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나이, 이 신세가 되어서 친구를 만들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주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외로움이 가셨다. 내가 어디에서 누구와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사람 취급을 받아야 이야기를 할 텐데, 우리 같은 거지들이 사람이 고프고 대화가 고파 다가가면 본체만체하며 도망가버린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구걸할 때 이외에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되고, 닫혀진 입은 열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엔 내가 다가가더라도 도망가지 않고, 불쾌해 하지 않을 사람들이 많으니 한층 마음이 안정되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앉아있으니, 옆자리의 노숙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 그쪽은 아직 이런 생활을 한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얼마나 되셨소? "
 

" 6개월 조금 안 됐습니다. "
 

" 쯧쯧. 얼마 안 됐구먼. 궁금한 거 있소? 아는 건 다 설명해 주리다. "
 

" 좀 전에 삼각김밥 같은 거는 어디서 얻은 겁니까? 돈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그는 내가 당연히 사 먹은 게 아니라 얻어먹었다고 확신을 함에도 전혀 불쾌해 보이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선 해맑게 웃으며 역사 내에 있는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점 등을 가리켰다.
 

" 저런 곳에서 다 가져다준다네. 유통기한이 오늘까지인 음식이라던가, 다 팔리지 않아 버려야 할 음식들. , 우리로선 고마운 사람들이지. 이것저것 가리면서 먹을 처지인가? 그래도 매일 주는 건 아니라네. 많이 남아있을 때만 주지. "
 

생각보다 정말 괜찮은 곳을 발견한 것 같았다. 물론 매 끼니를 챙겨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마는 가만히만 앉아있어도 누군가 밥을 챙겨주는 것 아닌가.
 

" 그래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앉아있는 거군요. "
 

" 그런 이유도 있고 누가 와서 쫓아내거나 하지도 않다 보니 자연스레 정착한 거라네.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있는 노숙자들은 어설프긴 하지마는 나름대로 의. . 주 중에 식과 주를 보장받고, 친구라고 하기는 뭐 하지만 혼자는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지 다른 곳에 있는 노숙자들과는 다르게 생동감이 있었다. 물론 이곳에도 산 송장처럼 가만히 누워있거나 앉아있는 사람도 물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끼리끼리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어디서 났는지 모를 소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 눈에는 그들의 모습이 정말 즐거워 보였다. 실제로 그들이 즐거운지 어떤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6개월간 더럽고, 암울한 세상만 보다가 마주한 지금 이 풍경은 내 마음속에 즐거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 그래도 여기는 사람 사는 것 같네요. "
 

지금껏 보아왔던 대부분의 노숙자는 모두 죽음을 앞둔 사형수들처럼 표정도 없고, 의욕도 없고 그냥 숨 쉬는 인형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달랐다. 시장통처럼 북적북적한 느낌은 아니더라도, 고요함은 없었다. 나는 어쨌든 살아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 사람 사는 것 같다라…."
 

그는 내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
 

" 그쪽은 어쩌다 이런 생활을 하게 된 거요? "
 

난 그 질문에 수많은 장면들.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얼굴과 눈을 뜨니 보이는 병원의 풍경, 나를 보는 변해버린 아내의 싸늘한 시선 등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 제 잘못이었습니다. 지금도 수백 번씩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아빠는 거짓말쟁이라며 울어대더라도 여행을 떠나지 말걸. 아니, 그 전날 일을 적당히 할걸. 아니, 사업을 하지 말고 공무원이나 해서 주말에는 아이들과 많이 시간을 보낼걸. 아니! 그냥 거기서다 같이 죽을 걸…."
 

말을 하면서 점점 격양되어가는 감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눈에선 눈물이 흐르는 듯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내 아이들은 이렇게 뜨거운 곳에서 아빠를 저주하며 울부짖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날 이런 곳에 보냈어. 넌 아빠가 아니야. 나를 죽인 악마야! 너 때문에 우리 가족이 불행해졌어. 엄마가 불쌍해. 너 같은 놈에게 시집을 온 것도. 엄마의 인생에 이혼이란 오점을 남긴 것도. 다 불쌍해. 너도 죽어야 해. 더 불행해져야 해. 잘못한 것은 넌데 왜 고통은 우리가 받아야 해? !
 

또다시 환청이 들려온다. 너무 괴롭다.
 

" 괜찮소? "
 

내 몸을 흔들어대는 남자의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정말 미안합니다. 아이들에게도, 아내에게도…."
 

" 미안하네. 괜히 이런 질문을 해서. "
 

남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사과했고, 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얼마간 서로 말없이 앉아있었는지 모르겠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정적을 뚫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내 이야기도 하는 게 맞겠지. 나는 애초부터 번듯한 직장, 단란한 가정 아무것도 갖추지 못했다오. 공사판에 놓인 작은 컨테이너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생활하고 있었지. 그런데 그거 아시오?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고 옆에서 잡아줄 아내도 없는 사람들이 가장 도박에 빠지기 쉽고, 사기도 당하기 쉬운 부류라오. 내가 그랬지. 보증을 서줬어. 그렇게 난 그동안 뼈 빠지게 일해서 모은 돈을 한 번에 날리고, 빚쟁이들에게 시달렸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서는 내 모든 걸 뒤엎고, 때리고 협박했지. 그런데 어떡하나. 난 그 많은 빚을 갚을 형편도 안되거니와 대신 갚아줄 가족도 없는데, 그들도 깨달았는지 방법을 바꾸더군. 내 신장을! 내 눈을! 내 몸을 팔아서 갚으라고 말일세. 난 도망쳤지. 죽을 각오로 뛰고 또 뛰었어. 그 이후로는 하루하루 고통과 불안의 연속이었지. 언제라도 내가 숨어있는 곳을 찾아내 내 배를 가르고, 내 모든 것을 꺼내 갈 것 같은 기분. 죽고 싶었네. 살아갈 의미가 없었어. 그래도 죽을 수 없었네. 정말 하찮고 보잘것없는 내 목숨이지만, 이렇게 죽기엔 내가내가 너무 불쌍했네. 내가 죄를 지었으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하는지 너무 불쌍했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흘러 이렇게 여기까지 온 걸세. 아직도 덩치가 큰 남자나 험상궂게 생긴 남자, 검은 양복의 남자들을 보면 몸이 떨려오네. 지금 당장에라도 어디선가 튀어나와서 날 잡아갈 것 같아서 말일세. "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마땅히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야 내 잘못으로 이렇게 된 거라지만, 이 남자는 배운 것도 없고 챙겨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다가 악인이 걷어찬 발길질에 맞아 이렇게 된 것 아닌가.
 

안쓰러웠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어디 있으며, 더더욱이 사연 없는 노숙자는 어디 있겠느냐마는 내가 모든 이의 아픈 사연을 다 알 수는 없다. 나에게 가슴을 열고 다가온 사람들의 사연만을 알 수 있다. 이 남자는 나에게 다가온 것 아닌가.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혼자 아파하고, 마음을 다쳐왔을까.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게 벌어진 상처인데, 내가 위로의 말을 몇 마디 건넨다고 해서 그 상처가 아물어질까?
나는 그냥 묵묵히 듣고만 있었고, 남자는 말을 끝마치고도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들도 각각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있겠지. 모두 힘들겠지. 누군가는 사랑에 상처를 받아 아파할 테고, 우리처럼 돈에 시달려가며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가족이 아파서 할 수 있는 게 바라보는 것밖에 없어 우는 사람도 있을 테고, 학업성적이 나오지 나와 머리를 쥐어뜯는 학생도 있을 것이고, 모든 걸 포기하고 일탈의 길로 빠져들어 방탕하게 노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가출을 하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고, 무능력한 상사 때문에 한숨을 내쉬는 직장인들도 있을 것이며, 하늘이 무섭지 않은 듯 치솟듯 물가를 바라보며 좌절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장사가 안돼 하루 종일 계산기만 두드려가며 시간을 보내는 자영업자도 있을 것이고, 꿈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누구든지 고민이 있고, 상처가 있을 것이다. 모두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알아야 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행복한 점이 너무나도 많다. 부모·형제가 살아있고, 편히 잘 수 있는 잠자리가 있고, 따뜻한 물에 샤워도 할 수 있으며, 친구도 있다. 먹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으며, 부족함 없이 옷을 갈아입는다.
 

그들은 이런 사소한 것들이 누군가에겐 얼마나 큰 꿈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잠시 휘청거리더라도 얼마든지 다시 똑바로 걸을 수 있는 힘이 있다. 우리처럼 모든 것을 다 잃은 상태가 아니다. 희망이 있다.
 

난 내 옆의 남자를 포함해 다른 노숙자들을 한 번 바라보았다. 이들에게서 그리고 나에게서 희망을 보려면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할까? 물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죽을 각오로 노력한다면 희망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그럴 의지조차 없다. 그냥 이렇게 조용히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에 만족한다. 이제 더 나빠질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변화를 꾀하려 하지 않는다.
 

난 아직도 웅크리고 있는 남자의 어깨를 조심스레 토닥거렸다. 굳이 자신의 아픔을 끄집어가며 날 위로해 주려 노력했던 남자다.
 

" 괜찮아요. 이제 다괜찮아요…."
 

남자에게 내 말이 들렸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고개를 들고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의 행복을 눈으로 빨아들이기라도 하려는 듯이 계속 바라보았다.
 

난 그런 남자를 뒤로하고 자리에 눕기 위해 이름 모를 할머니가 주신 담요로 바닥에 깔았다. 세상에는 악인이 있는 만큼 의인도 있는 법이다. 거창하고 멋스러운 일을 해야만 의인이 아니다. 자신의 처지가 어떻듯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 그것이 의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자리에 누워 요 며칠 새 만난 사람들을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생활비에 시달리는 사회초년생 남자,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던 봉사단체 사람들, 내 가슴에 비수를 꽂던 커플과 그들과 대립하던 노숙자들, 내 목숨을 살려준 택시기사와 그 목숨을 가져갈 뻔한 노숙자 패거리들, 나에게 따뜻함을 선사해준 고마운 할머니와 힘들게 살아왔던 내 옆의 남자.
 

짧은 순간에 많은 사람을 만나며 희로애락을 느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을 만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내가 지금과는 얼마나 달라지느냐이다. 몇 년 뒤에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고, 지금과 똑같을 수도, 혹은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다.
 

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삶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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