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개혁을 단행하여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의무교육제를 도입하고 각급 학교를 증설하여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높이는 한편,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강경외교를 견지하였다. 또한, 휴전 후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지원을 확약받았다.
남북분단을 막지 못했고, 한국전쟁을 막지 못하였으며 자신을 반대하는 사회정치적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해 야당과의 첨예한 정치파동을 낳기도 했다. 잇따른 개헌으로 자신의 독재를 강화해 나아갔고 결국에는 혁명에 의해 물러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 대통령
독재적인 통치에 의해 박정희정부는 이 기간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연간 10%를 넘나드는 고도성장이었고 국민소득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한편,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국가안보면에서 빈틈없는 태세를 구축한 것은 박정희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박정희는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대화에 힘써 한동안 남북적십자회담·남북조절위원회회담 등을 열었고, 남북간 밀사교환을 이루었으나 대화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빈부격차를 가속화시켰고, 황금만능사상으로 사회갈등과 함께 국민정신문화를 크게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전두환 대통령
대외관계와 대북관계 및 스포츠외교 분야에서 다소 진전된 모습을 보였으며, 경제부문에서도 3저호황에 힘입어 물가안정·수출신장·대외무역 흑자를 기록하는 등 긍정적인 성과를 나타냈다.
대내적으로는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으며 인권을 유린하는 등 군사독재정치의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노태우 대통령
남북관계의 진전으로 1991년 9월 16일 남북한이 만장일치로 유엔에 동시가입하는 등 대북정책의 큰 성과가 나타났으며, 1992년 8월 24일에는 중국과도 역사적인 국교수립이 이루어져 82년만에 양국관계가 공식적으로 회복되었다.
수천억원 규모의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국민적 지탄을 받았으며, 그 결과 1995년 11월 16일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서울 구치소에 구속 수감되어 무기징역을 구형받았다.
김영삼 대통령
사정개혁과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등 정치 개혁을 필두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제거, 국군보안사의 조직 축소와 명칭 변경, 금융실명제 실시 등 핵심적인 개혁이 시작되었으며,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또한 12·12사태와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수감하였다.
임기 중 발생한 무수히 많은 사건과 사고들뿐만 아니라 정경유착의 표본인 한보비리사건 및 아들 김현철의 국정개입 등 일련의 사건으로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집권 말기에 발생한 외환위기 상황에서 IMF관리체제를 수용함으로써 엄청난 국민적 비판 속에서 임기를 마감했다.
김대중 대통령
IMF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했을 뿐 아니라, 대(對) 미국 관계뿐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발언권을 높이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월드컵·아시아경기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두 아들과 측근의 비리로 도덕성에 흠집이 났고,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노동조건이 악화되었으며, 햇볕정책 추진과정에서 국민적 동의 없이 대북 송금을 추진해 남북관계에서 거둔 중요한 업적의 빛이 바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
고질적인 지역주의를 청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사회 전반에 만연한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데도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미(對美) 외교에서는 "대등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북한과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데 힘썼다.
숨가뿐 개혁정책은 보수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잇따른 부동산 정책에도 불구하고 집값이 치솟자 서민들마저 등을 돌려 지지율은 더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