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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급적 꾸준히 쓰려고 노력하는 짧은 글쓰기(19)
게시물ID : readers_221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18
추천 : 6
조회수 : 4706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5/10/13 01:47:54
*dfdf2님의 글(http://todayhumor.com/?readers_21940)을 보고 떠오른 이야기를 이제야 글로 옮겨봅니다.


"이것 봐."

세희가 왼쪽 가슴에 달린 훈장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녀는 그 훈장이 정말 자랑스러운 듯, 새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활짝 웃었다.
난 저 훈장이 어떤 건지 안다. 모두가 대단하다고 말하지만,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물건이다.

"이것 보라구!"

내가 뚱한 표정으로 훈장에서 시선을 흐트러트리자, 세희는 예쁜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내 어깨를 휙 잡아챘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예쁘게 웃었다.

"45번지에 사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대. 이건 거기에 대한 메모로 받은 거야."

나는 그 할머니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의 장례식에도 참석했었다.
그 할머니는 폐지를 모아서 겨우 입에다 풀칠을 했었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느 겨울 날, 마을 어귀에 세워져 있던 고급 외제 승용차가 그 할머니의 자식들이 타고 온 것이라는 사실만이 할머니를 둘러싼 것 중 가장 특별한 일이었다.
그 할머니는 마을 입구에 있는 슈퍼마켓 앞 평상에 앉아, 작은 야쿠르트 한 병과 단팥빵으로 끼니를 떼웠다.
성한 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 할머니는, 손으로 빵을 찢어 입에 넣은 뒤, 야쿠르트에 적셔 넘기곤 했다.
가끔 퇴근할 때마다 할머니와 마주치면, 묵묵히 목례라도 해주는 내가 고마운지 야쿠르트 한 병을 쥐어주곤 했다.

"이건 내가 처음 받은 훈장이야, 어때? 어울리는 것 같아?"

세희는 귀밑머리를 훑어 넘기며 짐짓 예쁜 척을 했다. 금색으로 도금된 플라스틱 쪼가리는, 세희의 아름다움 한가운데에서 거무죽죽하게 시들어 있었다.

그 훈장은 '남을 배려하는 사람'에게 주는 훈장이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 훈장을 받는 법에 대해서 알지만, 그 훈장을 누가 주는지는 모른다.
그건 우리 마을에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때, 거기에 대해서 슬퍼하고 공감하면 주는 훈장이다.

아,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슬픔을 메모지에 담아 마을회관 앞의 게시판에 붙이면 주는 훈장이다.

언제부터 그 훈장이 마을 안에 퍼지게 되었는지 역시 아무도 모른다.
다만, 나는 누가 맨 처음 그 훈장을 받았는지 알고 있다.

지금은 마을에서 제일가는 훈장 부자인 김씨 아저씨는 원래 성격이 좋고 입담도 센 편이라 인기가 많았다.
그는 쉰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장 부지런히 마을 일에 앞장섰다.

수민이네 개인 뽀삐가, 태어난 지 열 다섯해를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을 때였다.
김씨 아저씨는 아직은 어린 수민이에게 짤막한 편지를 써서 건넸다.
친구나 형제와 마찬가지던 개를 잃은 아이에게 나름대로의 배려를 한 것이다.

며칠 뒤, 김씨 아저씨는 세희가 매달고 있는 것과 꼭 닮은 훈장을 달고 나타났다.
모두가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게 뭐하는 물건이냐고.
그는 아침에 일어나니 대문 바깥에 그 훈장이 매달려 있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모두가 그 물건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번에는 타지에 나가서 살던 최씨 할아버지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몇몇 어른들은 최씨 아저씨를 모시고 아들의 시신이 안치된 곳으로 가서,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다.
거기에 함께하지 못한 사람들은 저마다 조그마한 쪽지를 적어 최씨 할아버지의 우체통에 넣어두었다.
아들을 잃은 사람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위로를 건네기는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들을 떠나보내고 돌아온 최씨 할아버지는, 우체통에 가득 든 쪽지를 읽으며 대성통곡했다.
며칠 뒤, 쪽지를 쓰고 돌아온 몇몇 사람들의 대문에 금색 플라스틱 쪼가리가 붙어 있었다.
김씨 아저씨는 두 개를 가지고 있었다.

윤씨 할머니의 손녀가 대학에서 떨어졌다.
이번엔 마을 회관 앞에 숫제 커다란 게시판이 붙었다. 친절하게도, 거기에는 접착식 메모지와 볼펜도 갖춰져 있었다.
김씨 아저씨의 훈장은 세 개가 되었다.

김씨 아저씨의 불룩한 아랫배까지 느러진 훈장은, 어림잡아 육십 개는 될 것이다.
네번 째로 많이 가진 사람은 세희의 동생인 윤희였고, 다섯 번째로 많이 가진 사람과는 고작 두 개가 차이날 뿐이었다.

훈장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자,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앞다투어 마을회관 앞 게시판을 찾았다.
웃기는 건, 쪽지를 쓴 모든 사람에게 훈장이 배달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누가 어떤 내용으로 훈장을 받는지 매우 궁금해 했다. 그러나, 훈장이 배달된 다음 날엔 게시판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접착식 메모지는 온데 간데 없이 치워져 있었다.

"또 딴 생각하지? 이것 좀 보라니까!"

이번에는 부드러운 소재의 플레어 스커트를 나부끼며, 제자리에서 팽- 돌았다.
흩날리는 머릿결과 옅은 분홍의 치마는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가슴께는 칙칙한 금색이었다.

나에게 야쿠르트를 건네주던 할머니의 장례식 날.
그곳을 찾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 일곱 명뿐이었다.
우리 모두가 훈장 따위를 달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도 '너는 왜 훈장이 없느냐?'고 묻지 않았다.

"자기는 그 할머니 돌아가신 다음에 어디 갔다온 거야? 안 보이던데."
"야근. 너는?"
"난 집에서 쪽지에 적을 내용을 연습했어. 열 번째 쪽지인데도 훈장을 못 받으면 어쩌나 조마조마하더라구. 뭐, 이번에는 받았으니 아무 상관 없지만."

그녀는 자신이 쓸 말을 동생인 윤희가 훔쳐볼까 겁이 나 방문까지 잠궜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윤희가 훈장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못내 즐거워했다.

"그 계집애가, '언니는 감정이 메말랐어.'라고 얼마나 놀려댔나 몰라. 이것 보라지? 나도 이제는 훈장이 있다구."
"그게 그렇게 좋아?"
"좋지.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거잖아. 나만 없으면 바보가 된 것 같다고."

세희는 가슴팍에 달린 훈장을 만지작거렸다. 어렸을 적에 동네 공터에서 술래잡기를 하며 놀던 시절 이후로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다음에는 어떤 쪽지를 쓸까? 자기가 좀 생각해줄래? 자기 글 잘 쓰잖아."

세희의 얼굴은 매우 예쁜 축에 속했다. 풍성한 속눈썹을 나풀거리며 내 얼굴을 들여다 보는 세희의 얼굴을 본 순간,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먹었던 탕국이 되밀려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난 글 못 써. 만약에 궁금하면 김씨 아저씨한테 물어봐. 훈장을 많이 가지고 있잖아? 뭔가 비법을 알고 있는 거겠지."
"난 그 아저씨랑 안 친하잖아~ 진짜 못됐네. 좀 알려주지."

나는 자켓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건 두 달 전에 프레스 절단기에 팔이 잘린 내 친구놈이 피우던 것과 똑같은 것이다.
내가 담패 피우는 것에 질색을 하는 세희는 코를 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세희의 핸드백 안에서 휴대전화의 벨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응. 언니 지금 밖인데? 아, 그래? 음, 그래 알았어. 이제 들어갈게."

코맹맹이 소리로 누군가와 통화를 마친 세희가 나를 돌아봤다.

"나 이제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이번엔 정률이네 언니가 인공수정에 실패했다네. 쪽지 다 쓰면 연락할게."

총총걸음으로 집을 향하는 세희의 스커트가, 칙칙한 금색으로 보였다.
난 아직도 많이 남은 담배를 세희가 사라진 방향에다 집어던졌다.

출처 자유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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