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대항해시대의 모습(1) - 타네가시마의 발전과 일본총포의 멸종
게시물ID : history_22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악진
추천 : 17
조회수 : 2162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1/07/29 02:11:37
조선조 임금 패턴은 숙종과 영정조에서 난관(!)에 부딪혀 있는 중인데요,
이게 아무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거 같아 잠시 한 눈 팔고 대항해시대에 대해서 그때 그때 시리즈물을 써볼까 합니다.
개척과 모험의 시대로 알려진 이 시기의 이면에는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어떠한 유혈과 착취가 있었는지, 세계문명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특별한 방향성 없이 괴발새발 생각나는대로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우리의 영원한 주적(?), 7천만 동포 대동단결의 주제인 일본 디스로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ㅋ
================================================================================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이래, 서양인들은 중국 마카오와 일본 사카이 등지까지 도착하기에 이르렀고
특히 일본은 포르투갈/네덜란드와 각별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서양식 화승총이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일본에 전래된 후에는 눈부신 기술/전술의 발전을 맛보았지만
어느 순간 급속도의 미스테리한 쇠퇴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 과정을 조감해 볼까요.

1. 화승총의 일본 전래
일본은 중국여행을 왔다가 항로개척 중이던 포르투갈 모험가로부터 1543년 화승총을 전래 받았습니다.
당시 그 모험가(이름은 페르낭 멘데스 핀투Fernao Mendez Pinto)가 표류한 곳이 큐슈 남부의
타네가시마種子島라는 섬이었는데,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화승총을 타네가시마라고 부르게 됩니다.

2. 타네가시마의 발전
초기 화승총은 품질이 매우 조악해서 창병이나 궁병보다 전투력이 열등했습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일본인은 개선의 귀재, 수십년만에 서양보다 우수한 화승총제품과 전술을 개발합니다.
유명한 <일제사격>전술이 그것인데요, 장전이 오래 걸리는 화승총의 단점을 전술로써 극복하는 이 방법은
사수들이 여러 열을 지어 차례로 총을 발사하는 것입니다. 1열이 발사한 후 장전하는 사이 2,3,4...열이 발사하고
그 사이에 장전을 마친 1열이 다시 발사하고....
오다 노부나가가 이 방식을 처음 도입한 것이 1560년대인데 비해 서양에서는 1590년대에야 일제사격 방식이 개발 됐습니다.
이 전술이 발전되어 총기는 전국을 결정지을 무기로 부상합니다. 1575년 오다 노부나가와 다케다 가쓰요리가 싸운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3만8천의 병력 중 1만을 타네가시마로 무장시킨 후 23열을 지어 총을 쏘았는데 20초마다 무려 1천발이 발사가 가능했다고 합니다.
이 전투는 보병부대가 기마부대를 격파한 혁신적인 사건이었습니다.

3. 타네가시마의 전성기
날으는 새도 떨어뜨린다, 는 뜻으로 조총鳥銃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고
다케다 신겐은 "이제 전쟁은 총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무모한 행동을 가리키는 말인 <무대포>는 총(=철포鐵砲뎃포)도 없이 덤벼든다는 뜻의 무뎃포無鐵砲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은 검병, 창병, 조총병이 혼합된 군대였는데
당시 일본은 다이묘가 스스로 자기병력을 조달하고 보급하는 체계였고, 조총병이 많은 부대일수록 부유한 다이묘의 군대였다고 합니다.
본국에 보내는 보급요청도 '창은 쓸모없으니 총이랑 화약을 더 주세영'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네요.
그만큼 무기로서 전투의 핵심요소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4. 돌연한 쇠퇴
그렇다면 일본은 총기제작과 전술이 꾸준히 발전했을까요?
놀랍게도 임진왜란을 정점으로 총기류는 순식간에 일본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실전에서 위력을 충분히 경험했다면 계속해서 기술을 발전시켜야 마땅하겠지만, 후대 메이지유신 때에도 사무라이 신선조가 일본도를 휘두르며 활개치고 다니는 걸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이상현상을 연구한 노엘 페렝Noel Perrin이라는 학자는 5가지를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1) 일본 사무라이들은 검을 다루는 자들이었고, 총포가 널리 보급되어 사회지배층이 교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2) 일본은 섬나라였기 때문에 외세에 침입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세키가하라 대전 이후 총포의 위력이 절박하게 필요할만한 안보위협이 없었다.
(3) 사무라이들은 일본도를 '사무라이의 혼'이라 생각하면서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어 다른 무기들을 천시했다.
(4) 총을 천시하는 분위기는 물론 외국인(서양인)을 적대하는 분위기 역시 외래문물인 화승총 개발에 제약이 되었다. 실제로 도쿠가와 막부는 기독교를 탄압하면서 쇄국정책을 폈습니다. 기독교도들이 사용하는 무기인 총은 더욱 기피할 물건으로 여겨졌다는 분석입니다.
(5) 일본도를 미학적이고 장인정신적인 면모가 있는 물건으로 여긴 반면 총은 아름답지 않은 무기라는 인식이 퍼졌다.

3번과 5번이 왠지 겹치는 것같지만 어쨌거나....
일본도를 미화하고 총을 격하하는 분위기는 손쉽게 엿볼 수 있습니다.
킬빌에 도검장인으로 등장하는 핫토리 한조나, 베가본드에서 철포가 잠깐 나왔다가 마는 것이 그런 배경을 두고 있죠.
사무라이 도검 문화는 단지 무기의 한 종류가 아니라 지배계급 문화의 핵심요소였던 겁니다. 마치 2011년 대한민국에서는 학벌로 신분을 보장받듯이 16,17세기 일본에서는 도검 문화로 지배계층이 된 거죠(물론 에도막부가 안정되면서 사무라이는 급속도로 문벌화합니다).
그런데 사무라이들이 신사적인 분위기에서 영웅적으로 싸우고 패배하더라도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문화가
총포의 발달로 산산이 부서질 위기에 처합니다. 조총병들은 농민이나 도시 하층민 출신이 대부분인데, 이들의 물리력이 커지면 
기득권 사무라이들의 프리미엄이 reset되는 거거든요...멋드러지게 할복도 하면서 미학 운운하는 기존 문화가 총기류가 발달하면서 들어설 자리가 없어질 수도 있는거죠. 귀족 사무라이가 천민 조총병에게 흉하게 쫓겨다니다가 참호 구석탱이에서 콩알만한 총탄에 맞아 죽는겁니다.
대체에너지 개발이 국제석유자본 때문에 훼방을 받고 있다는, 싸구려음모론이 연상되는 부분입니다만
16,17세기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아, 참고로 유럽에서도 기사계급이 화승총의 등장에 반발하는 현상이 마찬가지로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럽에서는 총포가 발달한 데 비해 일본에서는 총포가 자취를 감춘 이유는,
위에서 말한 페렝이라는 학자는 사무라이가 전 인구의 10%나 되었기 때문에 총포류를 몰아낼 정도로 강력한 저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17세기 이후 200년 이상을 평화롭게 보낸 것도 간과할 수 없겠죠.

결국 17세기 초반 이후 일본에서 총포는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습니다. 에도 막부는 총포제작기술을 명맥만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억제했고, 실제로 총포제작기술은 그렇게 고사했습니다.

5. 마무리
군사력이나 과학기술이라고 해서 단순히 진보만 거듭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항해시대 이후 전세계 곳곳에서는 격심한 문명변화가 벌어집니다만, 이외에도 타네가시마의 발전-몰락과 유사한 현상을 몇몇 살피게 될 것입니다. 설사 아주 유용하고 효율적인 기술(또는 음식품)이라 해도 이를 받아들이는 사회의 문화적,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만 진정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크게 발흥하면서도 일본에서는 별달리 포교되지 않는 이유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네요.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