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이 세상에 현존하는 최선(最善)의 제국이다" - 볼테르(Voltaire, 1764)
우리는 보통 우리(중국, 한국)가 서양을 잘(거의) 몰랐기 때문에 서양도 동양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서양은 생각보다 동양(중국)에 대해 훨씬 많이, 그리고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17세기 유럽에서는 이미 중국에 대해 수많은 저서가 발간되고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그리고 영국 등지에서 널리 읽혔죠.
물론 중국에 대한 최초의 이야기는 13세기 마르코 폴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보다 체계적이고 폭넓은 이해는 16세기에 이르러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예수회였습니다.
16세기에 해외포교를 위해 결성된 예수회는 생각보다 꽤 일찍 중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 중 일부는 중국 조정에서도 관직을 얻는 등 크게 출세를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샬이 있죠.
그들은 그들이 중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혼자 삭히지 않고 고향인 유럽에 널리 알리는 데 지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를 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유럽에 돌아와서 중국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전하였는데, 프랑스 신부 한명은 루이 14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중국의 황제들은 루이 14세만큼이나 현명하고 자애롭고 능력이 있고, 제국은 매우 잘 통치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물론 그 신부는 중국의 황제가 루이14세보다 더 위대하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태양왕님 자비 좀 ㅠㅠ)
근대 이전의 중국은 명실상부 세계 최대 최강의 제국이었습니다. 압도적인 규모와 세련된 문화 그리고 우수한 품질의 공예품을 자랑하던 국가였으며 주변의 모든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던 국가였습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그런 중국에 모습에 당연히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진실로 중국에 완전히 매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진정 중국이 완벽하다고 생각해서 중국을 예찬하는 글을 썼다기보다는 사실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사실 당대 최고의 지식인 집단이었고, 계몽주의의 씨앗을 잉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성직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권위주의, 미신, 종교전쟁 등을 한심하게 생각했고, 유럽인들에게 다른 <대안>을 소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이야기를 그들의 목적에 맞게 <잘 포장해서> 유럽에 전달했고, 이에 감명받은 유럽의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그들이 혐오하던 당대의 시대상을 비판하기 위해 중국을 활용했습니다.
심지어 쟝밥티스트 뒤 알드(Jean-Baptiste du Halde)라는 프랑스인은 1735년에 <중국개론(Description de la Chine)>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하여 중국에 대해 많이 알리려고 (그리고 유럽을 까고자...) 했습니다.
위 책이 놀라운 건 중국에 대해 정말 자세하다는 점입니다. 중국의 하은주 시대부터 당대의 청조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었고, 중국의 18 성에 대한 자세한 묘사, 만리장성에 대한 묘사, 중국의 시, 문화, 전통, 도덕, 종교, 가족관계, 혼례, 장례, 군주들의 전기, 정치체제, 법률, 등에 대해 방대한 정보를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부록으로는 몽골, 시암(태국), 조선의 약사까지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방대한 정보를 담고 있었던 책이고, 백과사전 두깨로 4권에 달했으며 발간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영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으로 신속히 번역되었습니다.
볼테르는 이 책을 두고 <중국에 관련된 최고의 책>이라고 말하면서 엄청난 호평을 했습니다.
볼테르(프랑스)나 라이프니츠(독일) 같은 지식인들은 중국에 호감을 품는 것을 넘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찬미>했습니다. 그들은 당대의 권위, 즉 가톨릭 교회를 혐오했고, 기독교 없이도 합리적이고 자애로운 통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중국은 합리적 계몽군주가 다스리는 제국이었고, 군주정 귀족정 그리고 민주정의 요소가 모두 아우러져 인민의 행복을 가능케했으며, 샤를마뉴가 세운 제국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강력한 제국(마지막 부분은 이론의 여지없이 사실이었음...)이었습니다.
이들 덕분에 시누와세리(Chinoisserie, 중국학)는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수많은 철학자, 예술가 심지어 군주들에도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18세기 말에 이르면 중국에 대한 호감은 점점 악감으로 변하게 됩니다.
유럽의 경제성장과 해외팽창에도 그 이유가 있겠으나, 다른 한편으로 계몽철학의 변화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18세기 말, 몽테스키외나 루소는 볼테르르 비판하면서 중국을 깎아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사상에 있어 제일 중요했던 것은 <자유>, <권력의 분립> 또는 <인민주권> 등이었고 <자애로운 제국>의 이미지는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 어떠한 형태의 전제주의도 부정했었고 이를 위해 당대 교회와 왕권신수설 뿐만 아니라 <유가적 전제주의>도 부정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계몽주의(?) 학파들에게 중국의 이미지는 급격히 나빠지게 되었고, 중국은 유럽의 봉건제만큼이나 정체된 과거의 유물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영국 상인들이 중국에 더욱 적극적으로 진출하면서 중국에 대한 정보 소스가 다원화되었고, 이들은 많은 여행기를 저술하여 유럽에 예수회가 전하는 이야기가 아닌 다른 관점에서 다른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중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그들은 중국이 더럽고, 비도덕적이며, 나태하다고 묘사했던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접한 독일의 헤르더나 헤겔 등의 철학자들은 중국이 역사발전의 단계에서 도태되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중국은 암흑과 무지의 대륙으로 묘사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에 대한 비판 및 비난이 점점 심화되자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게 뭐냐면 중국인의 피부색깔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18세기 초 중반 유럽에서 중국인들은 <백인>처럼 묘사하고, 실제로 백인으로 분류했지만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점점 악화되면서 중국인들을 점점 어둡게 묘사하고, 그리고 급기야 <황인>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러한 인식으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인물은 영국의 외교관 조지 매카트니였죠. 그는 건륭제 앞에서 절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심지어 귀국하는 길에 중국은 허례허식에 가득찬 실속 없는 제국이며, 중국은 필히 파멸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편전쟁을 계기로 <위대한 중국>의 이미지는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