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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의 인생을 보면 대통령 자격이 보인다 문재인의 생애
게시물ID : sisa_2225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형아거긴앙돼
추천 : 7/4
조회수 : 35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8/27 16:24:06
생애 초기
1953년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함경남도
 흥남
 출신으로 함흥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흥남시청 농업계장으로 근무하다가 한국 전쟁
 당시 흥남 철수 작전
 때 미군
 군용함정(LST)에 몸을 실어 북한
에서 남한
으로 피난을 내려와 거제도 포로수용소
의 노무자로 일하면서 가족을 먹여살렸다. 문재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부산
 영도
로 이사왔으며, 문재인은 현재 북한
에 남아있는 이모 강병옥과 이산 가족 상봉을 한 바 있다.[2]
학창시절
부산남항초등학교와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
를 졸업하고 재수 끝에 예비고사 후기로 4년 장학금을 받고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에 72학번으로 입학하였다.[3]
인권운동가 활동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재학시절 운동권으로서 총학생회장이던 강삼재를 대신하여 당시 총학생회 총무부장로서 집회를 주도하다 1975년
 4월 11일
 집회 때 구속되어 1975년
 6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출소 후 강제징집 되어 1975년
 8월
 육군
에 입대하여 대한민국 39향토보병사단 훈련소를 거쳐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 수중폭파요원으로 복무하였다. 상병 복무 중일 때에는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미루나무 제거조로 투입되기도 하였는데, 당시 소속 부대 여단장이 전두환
, 대대장은 장세동
이였다. 6주간의 특수전 훈련을 마칠 때 정병주
 특전사령관으로부터 폭파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았고 자대 배치 이후 전두환 여단장으로부터 화생방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 1978년
 2월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사법시험
을 준비하여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사법시험 합격통지서를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서 받았다. 1982년
 사법연수원
을 차석으로 수료했으나,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이 좌절되었고, 노무현
과 사법시험 동기인 박정규
(노무현 정부 시절 민정수석 역임)의 소개로 노무현을 만나 법무법인 부산에 합류하였다. 법무법인 부산에서노무현
과 연을 맺은 것을 계기로 30년가까이 가장 친한 친구이자 최측근으로 활동했다.[4]
노무현
이 정치인이 되어 청문회 스타가 된 뒤에도 부산변호사협회 인권위원장을 지내면서 인권변호사로 일했으며,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 동의대학교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을 변론했다. 한겨례신문
 설립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문재인은 무료로 변론을 하게 되면 자칫 사건 당사자와 가족들이 재판을 경시하는 풍조가 나타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무료 변론은 하지 않았는데, 경상대학교
 교수들이 《한국사회의 이해》라는 저서를 강의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 되자 5년 간 변론을 맡아 항소심에서 승소를 하였을 때, 문재인이 받은 수임료는 고작 1백만∼2백만원대였다.[5]
참여정부 시절
변호사
 활동을 하며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기도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특히 2002년
 대한민국 제3회 지방 선거
를 앞두고,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이 몇차례 부산광역시장
 출마를 권유했음에도 ‘나는 참모용’이라며 ‘더 나은 사람이 출마해야 한다’고 고사하였다.[5]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문재인은 ‘변호사 업무에 복귀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5]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을 지냈으나,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악화로 1년 만에 청와대
를 떠났다. 그러나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네팔
 산행 도중[6]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 영자신문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을 꾸렸으며[7]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을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냈다.
청와대
 안에서 이정호
 시민사회수석, 이호철
 국정 상황실장 등과 함께 PK인맥을 대표했는데, ‘왕수석’으로 불리며 한나라당
으로 부터 ‘왕수석인 문재인 수석의 월권과 청와대의 시스템 경시로 인해 국정 원칙이 파괴됐다’는 비난을 받으며 2인자로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8]
 비서실장 시절 이해찬
 국무총리
가 부적절한 관계에 있는 인사들과 내기골프를 쳤다는 소식을 듣고 고심하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해임을 촉구하기도 하였으며[9]
,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시절 모든 직원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해내는 업무 스타일을 보였다.[10]
 또한 참여정부
 들어 검사장으로 승진한 17명 중 문재인과 이호철
비서관의 경남고등학교 동문은 한명도 없었는데, 두 사람은 아예 동창회에 얼굴을 비추지도 않았고, 고등학교 동창인 고위 공직자가 문재인의 방에 들렀다가 얼굴도 못 본 채 쫓겨난 적도 있으며, 또한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단 한차례의 식사나 환담 자리도 갖지 않았다고 한다.[11]

2006년
 11월 6일
 국정자문회의
 의원 138명을 보궐할 때, 국정자문위원으로 추가 보선되었으며[12]
,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문재인에 대해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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