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난 가난한 프리미어리거" [ 조회수 : 27,176 ]
[2006년 08월 22일 09시 57분]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리던 프리미어리그 개막전이 기분좋게 끝났다. 다행히 3-2로 역전승을 거뒀고 나 역시 만족할만한 경기를 펼친 덕에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새 집에 입주한 지가 얼마 안돼 아직 인터넷이고 뭐고 살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 잘 몰랐었는데 아는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한국에서 많은 팬들이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계시는 것 같아 무척 고맙다. 영국 언론들도 예상 밖의 호평을 계속 해주고 있어서 더욱 힘이 난다. 하지만 욕심은 없다. 프리미어리그에서 데뷔 시즌이니까 부상 없이 시즌 내내 주전으로 뛰기만 해도 좋은 성과라고 생각한다. 계속 개막전만큼만 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겠지만.
결과는 3-2 역전승이었지만, 쉽지 않은 경기였다. 상대팀 미들스버러에 좋은 선수들이 많은데다 우리팀은 프리미어리그 첫 경기여서 다들 조금 긴장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경기에 나설 때는 져도 손해볼 것 없다는 심정으로 경기장에 올라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먼저 2골을 내주고 뒤져 있으니 “이거 큰일났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이거 내가 팀을 잘못 고른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 팀 전력이 너무 약해보였기 때문이다. 나야 무작정 열심히 뛰는 것 외에는 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팀이 참패라도 하게 되면 한국 팬들의 실망도 크실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순식간에 동점을 만들고 경기를 또 뒤집어 버리니 정말 살 맛 나더라. 뛰면서도 너무 신이 났고 교체되어 나오는 순간에도 만족스러웠다.
팀은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고 영국 언론들도 좋은 말들을 많이 해주는 듯 하지만 정작 우리 팀의 코펠 감독님은 별다른 표현이 없다. 2-2 동점을 만들고 맞이한 하프타임 때에도 감독님은 별 얘기가 없으셨다. 선수들은 극적인 동점이 된 직후라 많이 흥분되어 있었는데 감독님은 조용조용 할 얘기만 하셨다. 경기 다음 날, 코치들은 나에게 정말 잘했다고 칭찬을 거듭했지만 감독님은 역시나 아무 말씀이 없었다. 전에 있던 울버햄튼 감독(글렌 호들)님과는 영 딴판이다. 그런데 이 스타일이 나와 잘 맞는 것 같고 편하다. 더 믿음도 가고 좀 있어 보이기도 하니까.
감독님 덕분인지 팀 분위기도 아주 좋다.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나 다들 호흡이 잘 맞고 서로 챙겨주는 분위기다. 프리미어리그 팀이라고는 해도 이전에는 줄곧 하위리그에서만 뛰었던 팀이라서 그런지 팀 규모나 시스템을 보면 오히려 아직 2부리그에 있는 울버햄튼보다도 더 하위리그 팀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선수들이나 구단 직원들이나 모두 한결같이 순수하고 마냥 친절해서 이적생인 내가 쉽게 팀에 적응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선수들하고도 쉽게 친해졌다. 그 중에서도 흑인선수 송코와 가장 먼저 친해졌다. 입단 이틀만에 “같이 윈저(근처 관광도시)에 여행가자”며 나를 잡아 끈 송코 덕분에 팀에 좀 더 쉽게 동화될 수 있었다. 사실, 나도 레딩 선수들과 전부 안면이 있기는 하다. 2년간 챔피언십리그에 뛰면서 맞붙은 적이 있어서다. 하지만 경기를 몇 번 뛰어봤다 해도 솔직히 누가 누군지, 이름이 뭐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영국 선수들은 아무래도 내가 동양인이다보니 한,두번만 보면 쉽게 기억하고 알아챈다. 다 순수하다고 말을 하는 게 그래서 나한테 먼저 와서 아는 척을 하고 친한 티를 낸다. 새로운 팀에 둥지를 튼 내 입장에서는 모든 게 고맙기만하다.
레딩 이적 초기에 내가 신경을 더 쓴 건 오히려 집과 가족이었다. 마땅한 거처를 구하지 못해 가족들이 고생했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이영표 선수 집에서 얼마간 묵기도 했다. 내 집이 아닌 곳에 가족을 두고 훈련을 하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이곳에 울버햄튼에서보다는 작지만 예쁜 집을 얻게 되어서 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첫 경기를 잘 하긴 했고 이제 집도 구해 맘이 편해질법도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아직 많이 이르다. 팀에서조차 신입생인데다 그 팀이 하위권 전력의 팀이고 아직 주전 확보도 담보할 수 없어서다. 나보다 먼저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 박지성-이영표 두 선수하고만 비교해도 그렇다. 아직 난 내가 그들과 같은 프리미어리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 아직 내가 그저 ‘가난한 프리미어리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급여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이룰 것이 더 많고 노력도 더 많이 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수한 분위기의 우리팀에서 뛰게 된 게 너무 좋다. 다들 강등 후보로 거론해서인지 사람들의 예상을 깰 수도 있고 또 더 높이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것도 신나는 일이다. 이제 곧 아스톤 빌라와의 경기가 있는데 울버햄튼 시절 친선경기에서 만나 이겨본 적 있는 상대여서 자신감도 생긴다. 개막전에서처럼 최선을 다해 뛸 생각이다. 이 경기가 한국에서는 아침 6시에 방송된다고 하는데 아침 시간이라 가족이나 친척들이 TV로 보기 쉬울 것 같아 더 잘 뛰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챔피언십리그에서는 한국에 계신 분들께 내 경기를 보여드리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조금 있었는데 프리미어리그에 오니 달라진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하고 긴장도 된다. 하지만 그만큼 더 좋은 경기 펼치고 싶다. 모두에게 즐거움과 뿌듯함을 주는 선수로 프리미어리그 첫 시즌을 마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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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및 코너 소개
설기현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레딩 구단의 미드필더다. 1998년 한국 청소년대표팀을 아시아 정상으로 이끈 그는 2000년 8월 벨기에 1부리그 로열 안트워프로 이적한 뒤 안더레흐트를 거쳐 울버햄튼에 입단했고 2006년 여름 레딩으로 이적, 마침내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했다. 2002년 월드컵 16강전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낸 그는 한국대표팀에 없어서는 안될 공격수로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도 프랑스전 박지성의 동점골을 엮어내는 등 맹활약했다.
(설기현 선수가 엠파스 <토탈사커>에 자신의 근황과 축구에 관한 생각들을 편집자의 펜을 빌어 에세이 형식에 담아 연재합니다. <토탈사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격려와 관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