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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수필입니다.
게시물ID : readers_223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스피드_웨건
추천 : 2
조회수 : 48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10/26 22:36:19

비가 그친 뒤의 가을 숲에서 나는 내음은 왠지 모르게 가슴을 뛰게 한다.

중학교 2학년 때 즈음이던가? 대여섯 집만 있던 우리동네 사거리에 제주도에서 이사온 나보다 한살 어린 계집애가 있었다.


키는 작지만 다람쥐처럼 바지런했고 코가 약간 들창코였지만 귀여운 아이였다.


늘 술에 취해서 막노동판에서 돌아온 그 아이의 아버지는 손에 잡히는 것만 있으면 그 아이에게 집어 던지고 동네가 떠나가라 고함을 질러댔다.


그때마다 알아듣기 힘든 제주 사투리로 자기 아버지를 타박하는데 실로 저녁 밥상에 앉아서 온 식구들이 그 아이의 따발총보다 더 빠르고 재치있는 궁시렁 소리에 폭소를 터뜨리곤 했다.


유독 술주정이 심한 것 같은 날에는 어머니가 그날 저녁 좀 많이 만든 반찬을 내 손에 들려서 그 집에 보내곤 했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술주정에 고생해 봐서 그 아이가 불쌍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중학생치고 인상도 사납고 덩치도 좋았던 내가 그 집 베니아 합판 문짝을 활짝 열고 "이거나 좀 드시고 조용히 해주세요."라고 하면 적어도 그날 저녁은 약간이나마 동네가 조용해졌다.


계집애는 키가 나보다 한참이나 작았다.

나랑 같이 서면 그 아이의 정수리가 내 명치에 올까말까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절대로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고 들었다.

동네에 좀 논다는 양아치들이 여름 새벽에 아버지 술 심부름 가는 그 아이의 허리를 붙잡고 이제 부풀기 시작하는 젖무덤을 더듬으며 까잽기 할 때 동네가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며 도무지 해석이 불가능한 욕설이 분명한 제주도 사투리로 고함을 질러댔다.


나와 사촌형과 윗집 대학생 형들이 "이거 일 났구나!" 싶어서 골목으로 뛰쳐나갔을 때는 양아치들은 벌써 달아나고 골목에는 그 아이 혼자 씩씩대고 있었다.


손아귀에는 양아치들의 대가리에서 뜯어낸 것이 분명한 살점까지 붙어 있는 머리카락이 한움큼이나 쥐고 코에서는 빨간 핏물이 흐르고 귀엽기만 하고 까불기만 하고 엄마도 없이 애비 등쌀에 넉살만 좋은 계집애인 줄만 알았는데 꽤나 야차같은 몰골을 하고 사내라면 구해주러 달려온 내게라도 덤빌 듯이 노려보았다.


그해 추석, 그 아이의 엄마가 몰래 다녀갔다. 서울서 식당을 다닌다던데 1년만 참으면 데리러 오겠다고 철썩같이 약속 하고 갔다고 내게 자랑을 했다.


계집애는 엄마가 사주고 간 손목 시계를 자랑하고는 혹여 아버지에게 들킬까 헤진 옷소매 속으로 감추고 총총히 반지하 셋방으로 사라졌다.

그날 아침이었던가?

손목시계를 들킨 것 같다.


애미가 숨어 있는 곳을 대라는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반복되었다.
무언가 살림살이들이 와장창 부서지는 통에 우리집 방구들이 주저앉을까 걱정까지 되었다.


한나절을 그렇게 소동이 일더니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떡집 송편을 가지러 심부름 가는 길이었다.


새집이 진 머리꼴을 하고 김치국물과 콩나물 국물로 온통 진물이 든 옷꼴을 하고 이제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 가랑비에 온 몸이 젖은 그 아이가 숲속 배수로 구멍에 숨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우리 집에 가자."


계집애가 집에서 그렇게 쫓겨나는 일은 자주 있었던 터라 그때마다 어머니가 보거나 내가 보면 집으로 데려와 코코아나 밥을 먹여서 잠 좀 재우고 돌려보냈던 터라 "우리 집 가자"라고 버릇대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가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펑펑 통곡을 하면서 울기 시작했다.


울다가 울다가 손에 꽉 쥐어서 핏기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꽉 쥐고 있어서 부서질 것만 같은 손목 시계를 내려다 보면서 펑펑 울기 시작했다.


어쩔 줄 몰랐다. 그저 그 아이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덜 떨어지게 우산 속으로 끌어당겨 주는 것만이 내가 해줄 유일한 적선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내 품에 뛰어 들었다.


찢어진 옷 속 사이로 그 아이의 하얀 어깨가 들썩였다.

당혹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고 지금껏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죄책감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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