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 일간지에서 김한중 연세대 총장의 대담 기사를 읽고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이 정부가 설익은 '대학 입시 자율화'를 외칠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신속하게, 노골적으로 속내를 보일 줄이야. 예전에 좋아했던 이오공감이라는 듀오 그룹의 노랫말이 생각났습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리는 적이 없나."
김한중 총장은 "대학생 선발을 규제하는 곳은 사회주의 국가를 빼고는 한국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대학입시가 완전 자율화될 2012년부터는 수시 전형 전형의 경우 100% 본고사(김 총장은 대학별 고사라고 주장) 성적으로만 뽑겠다고 못박았습니다.
김 총장은 '본고사를 전격적으로 도입하면 사교육비가 늘어날 우려가 있는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본고사를 없앴는데 사교육비가 줄어들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사교육비는 입시방법과 무관하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앞으로 입시 방법 결정에 사교육비 문제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셈입니다.
그러면서 본고사 방법으로 "영어는 무조건 보도록 하며 단과대별로 인문계는 쓰기(논술)를, 이공계는 수학 등을 평가할 예정"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아울러 "내신 평가는 비교육적"이라면서 전혀 반영하지 않을 뜻을 내비쳤습니다. 입학사정관제는 "주류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판정했습니다.
제가 이 기사를 보고 가장 슬펐던 이유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사립대 총장이라는 분의 사고에 우리 교육에 대한 철학이나 비젼, 책임감 등에 대한 고려가 전무하하고 오로지 '우리 대학'의 이익(그것도 대단히 근시안적이고 단편적인)만 있다는 점입니다. 세계 선진국들의 고등교육 정책에 대해 정말 잘 모르시는 것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 하시는 것인지 엉터리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김한중 총장이 생각하는 미래의 인재상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국·영·수 과목만 잘하면 미래 세계에서 요구할 모든 능력을 다 갖추는 것인가요? 그럼 학창 시절 다채로운 경험을 쌓으며 여러가지 가능성을 모색하고, 주지과목 뿐 아니라 다양한 학문에 대한 관심과 탐구력을 기르며, 예체능 활동을 통한 감성과 교우 관계, 봉사 활동 등에 의한 인성의 고양은 인재의 덕목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인가요?
거꾸로 주지교과 위주의 우리 교육이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는 지적이 일반적이지 않나요. 선행학습과 사교육으로 학문에 대학 열의와 배움의 즐거움, 창의력을 말살한 채 억지로 주입하는 교육이 세계 초일류 국가의 도약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우려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 총장이 말하는 대입 선발 방식에는 아무리 뜯어봐도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이나 대안, 비젼이 전혀 없습니다.
김 총장이 교육의 사회 통합적 기능에 대해 완전히 도외시하고 있는 점도 '어이 없음'입니다. 영어, 수학, 논술만 강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합니다. 너도나도 영미권에 자녀들을 조기 유학시키느라 집안 기둥뿌리를 뽑겠군요. 수학이나 논술 사교육은 더욱 창궐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소화할 수 있도록 문제를 내면 되지 않냐구요?
설마 연세대에 입학하려는 학생들을 일반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준의 시험 문제로 변별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갖고 계신 것은 아니겠죠. 김 총장이 밝히는 시험의 포맷 자체가 조기유학이나 사교육 수요 유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돈 드는' 교육을 시킬 수 없는 계층은 연세대 수시 입학을 포기해야겠군요. 사회적 배려 대상자를 조금 뽑아주며 생색을 내는 전형 외에는 말이죠.
우리 공교육을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책임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의 초·중·고등학교 교육은 대학 입시에 목을 맬 수 밖에 없습니다. 대입 전형의 형태에 따라 일선 학교 현장의 풍경은 천양지차로 달라지는 점 모를 리 없을 것입니다.
학교 내신성적을 완전히 무시하고 국·영·수 실력으로만 학생을 뽑는다면 공교육은 어떻게 될까요. 내신 경쟁에서 벗어났으니 학생들이 서로에게 노트를 빌려주며 우애와 협동심을 기를 것이라 기대하시나요? 맙소사입니다. 아예 학교에서 친구 얼굴을 보기 힘들어질지도 모릅니다. 극단적으로 학원에서 사는 학생도 있을 테니까요. 대학들이 그래도 겉으로나마 공교육 정상화를 외치는 염치는 있었는데 아예 이런 최소한의 체면마저 걷어차버리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입니다.
저도 입학사정관제가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운용하기에 따라 심지어는 특목고 학생들을 마음대로 뽑는 창구로 전락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가능성을 모색할 여지는 충분히 있습니다. 역시 운용하기에 따라서는 눈에 드러나는 성적 외에 그 학문에 대한 열정이나 학생의 잠재력을 찾아낼 수 있고 이는 현재 우리 공교육이 안고 있는 수많은 모순들을 해결하는 기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김 총장이 입학사정관제를 할 수 없다는 논거가 말문을 막습니다. 응시생이 8만명인데 사정관은 5명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 막대한 전형료 수입을 동원해 사정관을 더 확충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미국식 사정관제를 원용하기 힘들다면 교수가 자신이 가르치려는 학생을 직접 뽑도록 시스템을 연구해보면 안되나요? '우리 학교가 원하는 미래형 인재가 이런 것이다'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 학부모들의 반발을 극복할 자신감이 없나요? 도대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혁신적 사고를 하기 보다는 현실적 제약을 내세워 과거의 구태로 돌아가겠다는 태도는 전형적인 무사안일주의 아닌가요.
마지막으로 '대학생 선발을 규제하는 곳은 사회주의 국가 빼고는 한국뿐'이라는 대목에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럼, 유럽 선진국 가운데 대학 평준화를 실시하고 있는 나라들은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대학이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대학을 '선택'하도록 하는 제도보다 더 심한 '대학생 선발' 규제가 있나요? 자녀를 미국에서 교육시키는 두 가족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가족의 자녀는 미국의 유명한 보딩스쿨에 들어가서 주변의 부러움을 샀죠. 나머지 한 가족의 자녀는 그냥 동네에 있는 공립학교에 다니더군요. 우리나라 사람들 생각으로는 당연히 전자의 학생이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보딩스쿨에 간 학생은 뛰어난 학생들 틈에 끼여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중간쯤의 성적을 유지한 반면 공립학교에 간 학생은 교내에서 적극적인 학생자치 활동과 교외 봉사활동을 펼치면서 주지사 상을 타는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랬더니 후자의 학생은 하버드에 장학금까지 받으며 진학했지만 전자의 학생은 우리가 이름을 아는 대학도 가지 못하더군요.
대학들이 자체적으로 이런 선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규제가 필요 없죠. 하지만 우리의 유명 대학들이 과연 그렇습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죠.
인터뷰 기사를 읽고 하도 우리 교육이 걱정스러워져 표현이나 어휘가 과격했습니다. 연세대 관련자 분들의 기분을 언짢게 했다면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다만 다른 대학도 아닌 연세대가 이런 식으로 교육 발전에 역행하는 사고와 태도를 언명하시는게 하도 적절치 않아 절로 흥분되는군요.
김한중 연세대 총장은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연세대처럼 선발해 교육시킨 학생과 입학사정관제 등의 다른 방법을 이용해 뽑은 대학의 학생이 이 사회에서 누가 더 유용한 인재로 성장하는지 경쟁을 하면 저절로 훌륭한 제도가 살아남지 않겠느냐'고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 교육에 이런 경제학적 명제가 강력히 작용된다는 점입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부디 연세대가 우리 교육에서 갖는 위치와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하셔서 그에 걸맞는 선도적인 입시 방법을 내놓아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그것만이 국민 모두가 수긍하는 '자율'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