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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을 결성한 김원봉 "일제의 주구를 처단하라"
의열단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마땅히 죽여야 할 대상' 이른바 '7가살'(七可殺)을 정했다.
1. 조선총독 이하 고관
2. 군부의 수뇌
3. 대만총독
4. 매국노
5. 친일파 거두
6. 왜적의 밀정
7. 반민족 토호열신(악덕 지방유지)
의열단은 '7가살'과 함께 5곳의 '파괴 대상'도 선정했다.
1. 조선총독부
2. 동양척식주식회사
3. 매일신보사
4. 각 경찰서
5. 기타 왜적의 중요 기관
"조선총독 죽이기를 5~6명에 이르면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을 것이고, 도쿄에 폭탄을 터뜨려 매년 2회 놀라게 하면 그들 스스로 조선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쓸쓸하게 귀국한 후 친일경찰에 시달리다 월북의 길을 택하다
김원봉이 구속된 것은 1947년 3월 22일이다.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총파업 배후인물로 몰린 것이다. 중부경찰서에 구금된 김원봉은 일제하 최악의 친일경찰이었던 노덕술에게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김원봉은 풀려나자마자 전 의열단원 유석현 집에 가서 꼬박 사흘간 울었다고 한다.
김원봉은 일제 군경이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붙잡으려고 했던 항일투사이다. 그런 그가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의 경찰에게 붙잡혀 철장에 갇히고 온갖 수모와 구타를 당했으니 3일간 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http://www.idomin.com/?mod=news&act=articleView&idxno=486704
"밀양 신랑 김원봉이오."
현재 흥행 가도를 달리는 영화 <암살> 속 김원봉(1898~1958) 선생이 신분을 확인하는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자신을 알리는 말이다. "밀양 신랑." 뜬금없는 '신랑'이라는 말에 관객은 고개를 갸웃하지만 이는 김원봉을 깊이 아는 사람에게는 남다른 수사이기도 하다.
김원봉 선생이 부인 박차정(1910~1944) 의사와 함께한 전사(戰士)적 동지로서의 삶과 로맨스는 전설이자 소설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게 척박한 중국에서 부부는 조국 독립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개설해 항일군사를 양성한다.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전선연맹, 조선의용대를 결성해 중국항전 참가와 일제타도 조국해방 임무도 수행한다.
박차정은 22명으로 구성된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맡아 활동 중 1939년 곤륜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다. 이 부상 후유증으로 박차정은 해방을 1년 앞두고 눈을 감는다. 김원봉은 해방 후 아내의 피묻은 적삼과 유골을 자신의 고향인 밀양 부북면 감천리 뒷산에 묻고 통곡한다.
한데 이 두 항일 열사를 기리는 일에 부산과 밀양은 차이가 난다. 박차정 의사 동상이 지난 2001년 금정구 만남의 광장에 세워지고 지난 2005년에는 부산시 지원으로 생가도 복원됐다.
뒤이어 기념관 건립 논의도 이뤄졌으나 밀양에 있는 묘는 '무덤'이라는 표현이 맞다 싶을 정도로 쓸쓸하게 남아 있다...(생략)..
출처 | http://media.daum.net/culture/book/newsview?newsid=20150807115104564 http://www.idomin.com/?mod=news&act=articleView&idxno=486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