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은 예술가와 같습니다. 태초에 우주를 창조한 것은 빅뱅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세계를 만들어낸 것은 중력이었습니다.
중력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원인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몇백 억년 만에 일어난 우주의 변덕일 수도 있고, 인류 역사에 마지막으로 기록될 우주재해 일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중력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재앙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앞서 무중력 상태에서의 일상생활을 조금 살펴봤습니다. 마지막에 어떻게 끝났는지 굳이 되새겨 본다면, 간단한 요기를 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태양을 바라보라고 말했죠. 그 이유를 좀 있다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정확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력이 사라졌고, 이는 우리 주변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중력이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애초에 힘의 개념에서 중력이라는 것 하나가 통째로 삭제되었다고 할까요. 중력이 아주 없어진 지금,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1)대기가 탈출합니다.
사실 대기는 중력이 있을 때도 조금씩 우주로 분출되었습니다. 특히 수소와 같은 가벼운 기체들은 그 정도가 심해서, 지표면에서의 대기 중에는 수소가 거의 함유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기의 탈출은 행성의 중력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집니다. 일례로, 목성의 경우 대부분의 대기, 아니, 아예 목성을 이루는 대부분의 물질이 수소와 헬륨입니다.
뭐가 됐든 중력이 사라졌으니, 공기분자들은 제각기 갈 길을 갑니다.
인류의 일부는 대기가 어느정도 선으로 줄어들면 질식사합니다. 문을 꼭꼭 잠그고 창문 틈새를 막아놓은 경우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습니다만, 바깥 대기의 압력이 떨어지면서 실내의 공기 유출도 더 빨라집니다. 일부는 공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벙커에서 생을 이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산소가 바닥나고 이산화탄소를 처리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 방법을 찾았다고 해도, 다른 이유로 인해 죽음을 맞이합니다.
지구의 생물종은, 특히 산소를 많이 소비하는 온혈동물이나 대형동물들은 질식사로 대부분 죽었습니다. 식물들은 조금 더 버틸 겁니다. 물속에 사는 생물종은 꽤 오래 살아남을지도 모릅니다. 저기압환경에서 물이 증발하겠지만, 증발한 물이 다시 응축할 수도 있고, 바다 전체가 증발하려면 시간이 꽤 걸립니다. 그보다는 산소가 더 빨리 없어질 것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한꺼번에 몰살당하거나 하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특별한 일이 닥치고 있습니다.
2)우주 곳곳에서 핵폭발이 발생합니다.
지구와 같은 행성들은 중력의 작용으로 구체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중력의 작용으로 지구의 핵 부분에는 밀도가 높은 철과 니켈, 그 외의 무거운 원소들이 대부분이고, 일부는 방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핵의 온도를 유지하는데 일조했습니다. 이들은 높은 압력과 온도로 액화되어 있고, 내핵의 경우 압력이 너무 높아서 고체 상태가 되었습니다. 중력이 사라진다면, 이들을 억누르는 힘이 사라지고, 그 대신 원래 상태로 팽창하려는 복원력이 작용하면서 핵이 말그대로 폭발합니다. (이게 핵폭발)
지금 생각해보니 간식먹을 시간도 없겠군요.
지구는 산산조각나고, 다른 행성들, 목성이나 토성, 수성 따위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성도 예외가 없습니다. 일부 소행성을 제외한 거의 모든 행성이 폭발합니다. 중력이 작용했었다면 그 파편이 뭉쳐 새로운 행성이나, 경우에 따라 항성이 생성되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금은 중력이 외출중이네요. 기껏해야 녹은 금속이 들러붙은 소행성이 생성됩니다. 경우에 따라 행성 비슷한 것이 생기긴 하겠네요. '행성 비슷한 것'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결과물이 융융상태의 갖가지 물질이 녹아 들러붙은 거대한 덩어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쁜 구체가 아니라 제주도 현무암처럼 생겼을 것입니다.
3)항성이 대폭발을 일으킵니다.
굳이 행성의 핵폭발과 분리한 이유는 이게 더 파괴적이기 때문입니다.
태양은 불타고 있습니다. 지구의 33만 배나 되는 질량을 가지고 있고, 표면의 중력가속도는 274 m/s^2 입니다. 그런데 이런 중력 상황속에서도 간혹 태양 표면을 이루는 물질이 뿜어져 나오고, 이는 플레어나 홍염으로 나타납니다.
태양을 구성하는 입자들은 중력이 사라지자마자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온도가 뜨겁기 때문에 더 빠른 속도로 움직입니다. 흠, 정확히 꼬리에 불 붙은 것 마냥 빠르게요. 한 때 태양이었던 수소,헬륨 등의 원자들은 폭발의 규모를 새롭게 개척하면서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진로에 있는 모든것을 불태우고 박살냅니다. 이 거대한 불의 구가 언제 1억 8천만 킬로미터의 거리를 뚫고 지구에 당도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죠. 수천만도의 들끓는 입자들이 내뿜는 노란색, 어쩌면 도플러 효과에 의해 파란색을 띌지도 모르는 복사광이 하늘을 뒤덮고, 열에너지를 담은 적외선이 광속으로 도달해 초목을 말려비틀고 마침내는 불태웁니다.
한 때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먹어살렸던 태양의 힘이 죽은 자들의 사체를 화장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의 집어삼킵니다. 그리고 지구를 넘어 나머지 행성에서도 똑같은 일을 벌입니다.
태양계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항성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이 파국 속에서 지구가 모양을 유지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형체가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한낱 소사체에 불과합니다. 제 생각에는 그냥 태양 폭발에 휩쓸려 날아갈 것 같습니다.
4)블랙홀이 피날레를 장식할 것 같습니다.
굳이 항성의 대폭발과 분리할 이유는 이게 최종보스이기 때문입니다.
블랙홀에 대한 연구는 많이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직접 견학을 가서 뭔가 던져볼만한 물건들을 사건 지평선 너머로 날려버리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나 살펴볼 수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우린 기본 개념만은 알고 있습니다.
블랙홀은 엄청난 질량을 가진 항성이 초신성폭발을 일으킨 다음의 상태입니다. 블랙홀은 엄청난 중력으로 범위안의 물질을 빛을 포함해 모두 빨아들입니다. 이 와중에도 블랙홀의 축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x선이나 여타 물질 따위가 광속에 가까운 제트로 뿜어져 나옵니다.
블랙홀을 이루고 있는 중력이 사라진다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제 짧은 지식으로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몇 가지 추측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중력이 사라진다면 블랙홀이 폭발합니다. 이 폭발을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은 없고, 수없이 많은 항성과 행성이 그 폭발에 휩쓸립니다. 물론 전 어떤 수학-과학적 증명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한다면, 거의 모든 나선형 운하의 중심부에 블랙홀이 있을 것란 추측을 같이 생각해보시죠.
5)우주 종말.
우주는 탄생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팽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팽창하는 속도를 줄여주던 요인이 바로 '중력'이었습니다만, 태양이 폭발할 때 중력은 뭘하고 있었죠? 잠시 외출중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우주는 훨씬 빠른 속도로 (정확히 얼마나 빠른지는 모르겠습니다.) 팽창합니다. 별의 유산과 수많은 생명체의 죽음은 우주가 팽창하면서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잔해가 먼지로 변하고, 먼지가 점점 옅어져 갑니다. 물질들이 서로 멀어지면서 상호작용할 기회를 잃게 되고, 에너지가 감소하면서 물질끼리의 부딫힘이 어떤 결과도 내지 못하는 일이 생깁니다. 우주는 점점 팽창하고, 마침내는 물질의 밀도가 극도로 낮아집니다.
고요하고 싸늘한, 어떤 흥미로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미래.
우주의 최후입니다.
이젠 중력이 돌아온다고 해도 되돌리거나 멈출 수 없습니다. 어처피 중력이 작용했었더라도 맞이하게 되었을 종말입니다.
그리고 무한한 시간 간격이 지나간 후, 최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돌아옵니다.
'빛이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