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현충일 하루 전인 5일 오후 7시 대전 유성구 봉명동 군인휴양소인 계룡스파텔 2층 한식당.
2002년 6월 29일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에 맞서 싸우다 꽃다운 나이에 숨진 해군 장병 6명의 유족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고 윤영하 소령, 고 한상국 조천형 황도현 서후원 중사, 고 박동혁 병장의 부모들이다.
6일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된 자녀를 만나기 전에 서로 얼굴이나 보자는 뜻에서였다.
식사를 간단히 마친 유족들 사이에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해교전 직후 전국에서 추모 열기가 타올랐고 국민은 이들을 ‘영웅’이라 불렀다.
당시 21세의 나이로 숨진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51) 씨가 소주 한 병을 시켜 황도현 중사의 아버지 황은태(60) 씨의 빈 잔에 가득 따랐다.
황 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아이들을 영웅이라 불렀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있다. 그 영웅은 누구를 위해 존재했는가. 우리가 아니라 바로 국가와 민족을 위했던 것 아닌가.”
당시 피격된 고속정 참수리 357호 정장(艇長)이었던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종하(64) 씨가 말문을 이어 갔다.
“나라를 지키다 의롭게 숨진 6명의 우리 아이를 국민이 오랫동안 기억하길 바라는 것은 우리의 욕심이겠죠. 다만 그들의 희생이 헛되이 되는 것 같아 아쉬울 뿐입니다.”
그는 “시계는 시침과 분침, 초침이 맞아야 한다. 하지만 그 시계 뒤에는 제대로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우리 사회가 ‘고장 난 시계’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위치에서 나라를 지키다 숨진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묻히고 있다는 아쉬움이다.
황 중사의 아버지 황은태 씨가 말을 받았다.
“북한엔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고 폭력 시위대엔 너그러운 이 정부에 누구 하나 큰소리치며 제지하는 사람이 없어요. 네 편 내 편 가르고, 서로가 잘났다고 나서는데도….”
말문을 닫고 있던 조천형 중사의 아버지 조상근(64) 씨와 한상국 중사의 아버지 한진복(61) 씨도 “당시 숨진 영혼들이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국민들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안도할 뿐”이라고 말했다.
오후 9시경 서후원 중사의 가족들이 고향인 경북 의성에서 모내기를 마치고 뒤늦게 도착하자 앉아 있던 유족들은 모두 일어나 반갑게 포옹을 하며 서로 눈물을 훔쳤다.
서해교전 이후 이들은 1년에 4, 5차례 만난다. 현충일과 서해교전이 벌어진 날의 음력 기일, 그리고 양력과 추석 때 등이다.
이달에도 서해교전 음력 기일인 13일에 경기 평택시 해군 제2함대사령부 법당에서 만난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독일 월드컵 한국과 토고전이 열리는 날이다.
나라를 지키다 피격된 357호정 포대 안에서 끝까지 방아쇠를 두 손으로 꼭 붙잡고 숨져 간 이들의 목소리가 월드컵의 함성에 묻힐 것이라는 게 이들 부모의 서글픔이다.
●서해교전
한일 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 25분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북방경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의 선제공격으로 일어났다. 25분간의 교전에서 윤영하 소령 등 장병 6명이 전사했다. -------------------------------------------------- 아닙니다.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 기억합니다. 철 모르고 시류에 휩슬려서 날뛰는 애새끼들이나 철저하게 교육받고 행동하는 노빠들이나 외면하죠, 아직도 대부분은 다 기억합니다. 북괴의 만행을 어떻게 잊습니까. 6.25를 잊나요? 6.25를 못 잊는것처럼 우리들은 다 기억합니다.
이제 그 지긋지긋하고 사실인지도, 명확하지도 않은 5월의 어느 특정날은 지나가고 이제 진짜 호국 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6월인데, 또 그놈의 월드컴이나 현 정부가 기리는 일은 않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