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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은퇴.
게시물ID : humorbest_2247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ishael
추천 : 25
조회수 : 4050회
댓글수 : 5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9/02/07 21:06:06
원본글 작성시간 : 2009/02/06 23:37:58
롤러코스터와 같았던 고종수의 '13년'
[축구공화국] '풍운아' 고종수가 오늘(6일) 한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아쉬운 은퇴의사를 밝혔다. 

1996시즌 혜성같이 K-리그에 등장해 열 세 시즌 동안 프로 선수로 활약한 바 있는 고종수는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이 내린 축구 재능으로 평가받으며 스타로 군림해왔다.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탁월한 플레이메이킹과 패싱력 전매특허와 같았던 왼발 프리킥으로 상대 수비수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축구 외적으로도 스타 기질을 마음껏 뽐내는 등 축구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해왔다. 

열 세시즌동안 K-리그와 J-리그 그리고 대표팀에서의 활약을 통해 축구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고종수의 현역 생활을 되돌아 봤다. 

  
 
 

하늘 높은 줄 몰랐던 고종수의 전성기 

1995년, 당시 만 18세에 불과하던 한 고교 선수가 축구계에 점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기성용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기영옥 감독이 이끌던 금호고등학교에서 금호고 출신의 스타 플레이메이커 윤정환 이상의 재능을 가진 선수가 출현했다는 이야기가 축구계 사이에서 떠돌았다. 넓은 시야와 한 수 먼저 읽는 경기 운영, 날카로운 패싱력과 위협적인 왼발 프리킥을 가져 재능만큼은 당대 최고라는 평가가 뒤따라붙은 선수, 바로 고종수였다. 

초고교급 선수라는 수식어는 고종수를 금세 스타 반열로 끌어올렸다. 고종수의 재능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바로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에서였다. 당시 청소년 대표팀의 주장으로서 보기 드문 놀라운 재능을 가진 고종수는 비쇼베츠 감독의 신뢰 아래 축구 선수로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비록 대상포진으로 인해 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전에 출전할 수 없었지만, 비쇼베츠 감독은 고종수의 재능을 무척 아끼며 기회를 부여했고 고종수는 순식간에 한국 축구의 미래로 떠올랐다. 

고교 졸업후 고종수는 1996년 출범한 수원 삼성의 창단 멤버로 프로 무대에 발을 내딛었다. 김호 감독과 사제의 연을 맺은 시기도 바로 이때다. 이후 고종수는 거침없는 상승세를 보이며 순식간에 K-리그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2001년까지 K-리그 최고의 화두는 바로 '앙팡 테리블' 고종수였다. 

이 시기에 고종수는 수원에 두 차례 우승을 안겼고, 1998시즌에는 시즌 MVP를 거머쥐었다. 국가대표 선수로서도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전에서 벼락같은 슈팅으로 당대의 명수문장 호르헤 캄포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거침없는 당돌함으로 누르며 그는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2001년 1월 요코하마에서 벌어진 한일 올스타팀과 세계 올스타팀간의 경기에서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를 꼼짝못하게 하는 왼발 프리킥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2000년 아시안컵 이후 대표팀에 부임한 거스 히딩크 감독 역시 고종수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챘다. 고종수는 히딩크 감독 부임 초기에 대표팀을 이끌던 실질적인 스타였다. 칼스버그 컵에서의 맹활약을 시작으로 빠른 속도로 한국 축구대표팀의 사령관으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런 거침없는 상승세는 홈에서 벌어질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고종수가 대표팀의 확고부동한 중원의 사령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까지 불러 일으켰다. 

  
 
 

꺾여버린 고종수의 날개, 아쉬움만 남기다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고종수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탁월한 재능으로 인해 히딩크 감독, 김호 감독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한 몸에 받던 고종수는 2001년 초반 발목 부상으로 인해 정상적인 컨디션을 보일 수 없었다. 

부상으로 인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자 히딩크 감독도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이 부상으로 인해 고종수는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출전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 8월 전남 드래곤즈와의 원정경기에서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했다. 발목 부상 회복 후 다시 대표팀에 복귀해 월드컵에 출전하고자 했던 그의 꿈은 그렇게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한번 날개가 꺾여버리자 고종수는 좀처럼 제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소속팀 수원은 고종수의 장기 부상으로 인해 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루마니아 대표팀의 주전으로 활약했던 가브리엘 포페스쿠(등록명 가비)를 영입했다. 2002시즌 부상에서 복귀했지만, 가비와의 주전 경쟁에서 점차 밀려나는 모습이었다. '수원의 아들'처럼 보였던 고종수와 수원과의 관계도 점점 서먹해져 갔다. 

결국, 2003시즌들어 고종수는 일본 교토 퍼플 상가(현 교토 상가 FC)로 이적하게 됐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부상과 팀 동료 및 코칭 스태프와의 불화가 심했다. 특히 당시 팀을 맡고 있던 핌 베어벡 감독과의 포지션 마찰이 문제였다. 당시 베어벡 감독은 고종수를 스트라이커로 활용하고자 했고, 고종수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고 싶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2003시즌이 끝나자마자 고종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고종수는 시련을 떨치지 못했다. 이적 분쟁에 휘말리며 친정팀 수원으로부터 임의탈퇴에 몰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무릎 부상 역시 집요하게 그를 따라다녔다. 우여곡절 끝에 2005시즌 전남에서 새출발을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부상과 슬럼프 그리고 팀 분위기를 해친다는 명목하에 전남에서도 고종수는 임의탈퇴 신분에 묶이고 말았다. 

한 시즌동안 무적 신분이 된 고종수는 2007시즌 최윤겸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던 대전 시티즌으로 전격 이적했다. 1년간 운동장에 서지 못한 스타 고종수에 대한 구설수가 많았지만, 고종수는 대전 시티즌에서의 새출발을 통해 못다한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대전에서도 시련은 이어졌다. 최윤겸 감독과 이영익 코치간의 다툼으로 인해 대전의 팀 분위기가 내려앉으면서 출전을 위해 묵묵히 기다리던 고종수의 거취도 혼란에 빠졌다. 

다행히'은사' 김호 감독이 부임하면서 새롭게 희망을 잡는 듯했다. 대전의 창단 첫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값진 결실도 이끌어냇다. 하지만, 질기게 쫓아다니는 잔부상은 넘어서질 못했다. 2008시즌 내내 부상 치료를 놓고 대전과 마찰을 빚다 급기야 방출 대상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다. 또 한 번 거취 문제로 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지만, 고종수는 결국 이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아쉽게 은퇴를 선언하고 말았다. 

[축구공화국ㅣ김태석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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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해서 마지막을 불태웠으면..하고바랬는데..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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