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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역사적으로 무슨 날인지나 알고 계신가요??
게시물ID : humordata_34861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난조선의A형
추천 : 14
조회수 : 904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06/08/29 16:34:49
ㅈㅅㅈㅅ...유머글은 아닙니다... 단지..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써 알았으면 하는 바람에.... 하지만...모두 다 읽어보시라는거... 1910년 8월 29일 오늘 우리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웠던 경술국치일입니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망국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고 또한 원수일본의 극악무도함에 소름이 끼칩니다. 한일병합 [韓日倂合]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한 1910년의 경술국치 전반을 이르는 말. 개항 초기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와 각축전을 벌이던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였다. 이에 일제는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일제는 러일전쟁과 동시에 1904년 2월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군사력에 기초해서 한국정부를 위협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를 체결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일제에게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많은 토지와 인력도 징발당하였다. 일제는 같은해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한일협정서)을 강제로 체결하여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에 두어 재정권과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또 일제는 한국식민화를 앞두고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얻는 공작에 전력을 기울여, 미국과는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밀약[桂太郞-Taft密約]’, 영국과는 8월에 제2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또한 일제는 9월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맺어 러시아를 한국 안에서 배제하였다. 한국식민지화의 국제적 승인까지 얻은 상황에서 일제는 1905년 11월 고종을 협박하고 매국리들을 매수하여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을 늑결(勒結)하였다. 이 조약으로 한국은 국권을 강탈당한 채 형식적인 국명만을 가진 나라로 전락하였다. 고종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한국의 주권수호를 호소하기 위해 1907년 6월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것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7월 24일에는 정미칠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권도 합법적으로 장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같은 달 27일에는 언론탄압을 목적으로 광무보안법을 잇달아 공포하여 한국민의 항일활동을 한층 강화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8월 1일부터 한달동안 한국식민지화에 최대 장애요인이었던 한국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한국군대를 강제로 해산한 일제는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남한대토벌작전’을 통해 강력하게 진압하였다. 그뒤 일제는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3대 통감으로 임명, 한국식민지화를 단행하도록 하였다. 그는 헌병경찰제를 강화하고 일반경찰제를 정비하였다. 경찰제의 정비로 한국경찰은 1907년 10월 일제 경찰에 통합되었다. 일제는 1910년 6월 각서를 교환하여 종래의 사법·경찰권 이외에 일반경찰권까지 탈취하였다. 이어 통감은 1910년 8월 16일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그 수락을 독촉하였으며, 같은 달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되었다. 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일제는 한국민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당분간 발표를 유보하였다. 조약체결을 숨긴 채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또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에야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讓國)의 조칙을 내리도록 하였다. 8개조로 된 이 조약은 제1조에서 ‘한국정부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제에 양여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은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27대 519년 만에 망하였다. 바로밑사진...경술국치 일어난 장소...현재 덕수궁 중명전.. 그밑은 조약문.. ㅅㅂㅇ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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