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땅에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몸을 추스리기 위해 수통을 꺼내 물을 몇 모금 마시고, 주머니에 있는 작은 빵조각을 꺼내 우물우물 씹었다.
'이러다간 굶어죽거나 목말라 죽겠군..그나마 적군에게 죽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악몽 같다.
국가에선 군인인 우리를 '나라와 국왕 폐하를 지키는 숭고한 방패'이라고 칭찬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새벽의 공격은 끔찍했다. 허허 벌판에서, 몸을 숨길 바위 하나 없는 벌판에서, 전우들은 적군의 포탄과 총알에 허무하게, 너무나 허무하게 쓰러져 갔다. 살아남은 전우들과 후퇴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모두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머리가 터져나가고, 내장을 쏟으며 죽어나갔다.
결국 혼자서,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가야 했다. 나 혼자 살겠다고 말이다..
젠장.
아내가 보고 싶다. 사랑스러운 아내.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어여쁜 내 딸. 내가 징집 영장을 받고 집을 떠날 때 내 딸은 아직 눈도 뜨지 못한 갓난아기였었지..
고향을 떠난지 몇년이 흘렀지? 지금은 걸음마를 배웠겠지...말도 한 두마디 배우고 있겠고...
살아 돌아가야 한다.. 이 전쟁에서 살아서 가족을 만나야지. 그래서 고향에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ah.....'
무슨 소리지? 설마?
옆에 놓인 총을 들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겨눴다. 어두워서 어디에서 소리가 나는지 분간이 어려웠다.
주위를 살펴보니 누군가가 쓰러져 있는 것 같았다.
누구지? 아군? 적군? 아니면 우연히 다친 민간인?
'helfe.........' (도와줘......)
독일어? 그럼 적군???
젠장!!!!!!!!!!!
'ah.....helfe.....' (도와줘...) ......
분명 독일군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총을 겨누고 있지 않았다. 땅에 누워서 손을 뻗어 도움을 청하며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쓰러진 독일 병사를 살펴보니, 가까운 곳에서 포탄을 맞은 듯 군복이 찢어지고 얼굴은 피로 젖어 있었다.
비록 당장 죽을 정도로 심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나를 쏜다거나 할 상태는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눈을 다쳤는지 내가 독일군의 적군인 영국 병사인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적군이다.
쏴야 한다.
저 사람은 적군이다. 국가를 위해서, 아니, 내가 살아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쏴 죽여야 한다.
하지만, 독일어를 모르는 나라도, 그 신음소리는 그 사람이 부상자라는 걸 나타내 주고 있었다.
...........
쏠 수 없다.
이 사람에게 총을 쏠 수는 없다.
적군, 아군을 떠나서 이 자는 부상자이다. 부상자에게 차마 총을 쏠 수는 없었다.
"'........."
뭐라도 해야 겠군...
손수건을 꺼내 얼굴의 피를 닦아 주었다. 다행히 눈 위가 좀 크게 찢어져서 피가 많이 나왔을 뿐이고, 다른 곳에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다만 눈을 다쳐서인지 내가 영국군 인 것을 모르는 듯 했다.
'danke..danke shen...' (고맙습니다...)
예상대로였다. 아마 내가 뒤늦게 온 독일군 위생병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크게 다친 곳은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독일어는 몰랐고, 무엇보다 내가 영국군이란 걸 알면 당장 나에게 대검, 하다 못해 발길질이라도 할 것 같았으니까.
살아있어라. 전쟁이 끝날때 까지 살아남아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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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편지 왔어요! 독일에서 온 편지 같은데?"
딸아이의 목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렸다. 회상은 그만 둬야겠구만.
"아. 알았다. 지금 거실로 내려 가마."
슬리퍼를 끌며 거실로 내려왔다. 가만. 어디까지 회상했었지?
...그래. 그 독일군 병사를 놔두고 길을 헤멨지. 그러다가 행군중이던 다른 영국군 부대를 발견하고, 결국 아군 진지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지.. 하지만 부대 지휘관에게 호되게 혼났다. 제멋대로 도망가다가 길을 잃고 나를 증명해 줄 인식표도 잃어버렸다고.. 다행히 내가 참가했던 전투가 워낙 격렬하고 아군의 피해가 격심해서 큰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세월이 흘러 딸아이도 훌쩍 성장했고 아내와 나의 머리에도 서리가 내리가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밭에 나가 농사일을 하다 아내와 딸과 함께 점심을 먹고 다시 농사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잠을 자고. 단조롭다면 단조롭다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에서 편지가 왔다고? 누굴까?
딸아이가 편지를 건네 주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오랬동안 당신이 누군지 찾고 있었습니다.
지난 그 끔찍한 전쟁 때, 포탄에 맞아 눈을 다친 저의 얼굴을 닦아준 사람이 누구인지 찾고 싶었습니다.
저는 처음엔 아군, 그러니까 독일군의 의무병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후방 병원으로 후송될때 곁에 있던 군의관에게 물어보니 워낙 전투가 격심했던 직후라 야전 의무병이 모조리 죽어버려서 저에게 응급처치를 해준 의무병은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후송되기 전 제가 쓰러진 장소에 한 인식표가 있었습니다. 분명 독일군이 아닌 연합군, 정확히는 영국군의 인식표였더군요. 그래서 그 인식표의 이름과 군번을 수소문하였고, 결국 당신임을 찾은 것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당신이 저에게 총을 쏴 죽여도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영국군이었고, 저는 독일군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저는 포탄에 눈이 먼 한낱 부상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총을 쏘기는 커녕 적군인 저를 살펴주신 분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