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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의 이야기.
게시물ID : readers_2268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등짝좀볼까
추천 : 2
조회수 : 36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11/15 20:5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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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배워야겠다는 필요성은 다섯 살에 느꼈다. 책을 읽어주는 것에 지친 엄마와 오빠가 더 이상 책을 읽어주지 않아서였다. 나는 책을 들고 아버지에게 가서 "아빠 나 한글 가르쳐줘, 엄마랑 오빠가 책 안 읽어준대."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한글을 가르쳐주었고 나는 그 이후로 집에 있는 책을 열심히 읽었다. 집에 있는 아이용 전집이나 전래동화 등은 금방 동이 났다. 아빠는 흐뭇해하면서 책을 사줬지만 경제적 이유를 감당하기 힘들어했고(오빠는 매 주 새 장난감 사줬으면서 말이야...) 포기 선언을 했다. 나는 그래서 엄마의 서재에 꽂힌 책을 읽었고 그게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이 기록한 그 이야기는 소크라테스와의 이야기였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일차원적인 해석으로만 읽었는데, 그게 굉장히 멋있었다. 나는 소크라테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전래동화 이야기라는 느낌으로 플라톤을 읽고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었다. 활자로 읽으면서 보면 책이랑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애늙은이가 되었고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의 잠언처럼 죽음은 슬픈 것이 아니다, 근데 정말 그런가...? 그런 생각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이야기나 그런 사회가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낮잠자다가는 꿈도 꿨다. 집 안에서 커다란 나무가 그늘을 이루면서 저 노을이 지는 태양 아래 흔들리고 있었는데, 소크라테스로 추정되는 할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생생해서 나와서 살폈는데 나무는 없었다. 내가 편집한 기억일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
 
 
그래서 애어른이 된 다섯 살의 나는 유치원이 지겨웠다. 차라리 집에서 책을 더 읽고 싶었고 그 유치원에 가야할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서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나 내년에는 유치원 안 갈래" 아빠는 물었다. "왜?" 나는 대답했다. "8살이 되면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럼 7살엔 유치원 들어가서 친구 사귀어야 하잖아."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근데 나는 네 살부터 유치원을 다녔고, 유치원 가서 낭비하는 시간이 아까워. 내년엔 쉴래." "그럼 유치원 쉬고 뭐 할 건데?" "아빠 따라다닐래." 아빠는 그래. 했고 나는 1년 동안 아빠를 따라다니며 영업하는 데 같이 다녔다.
 
 
사실 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귀찮게 느껴졌다면 아빠는 나를 유치원에 다시 보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막상 데리고 다녀보니, 영업하는 곳에 여섯 살 애기가 가니까 귀여워 죽겠을 그 나이의 아이가 영업하는 데 도움이 꽤 되는 거다. 나는 인사를 열심히 했고 용돈을 받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는데 그게 어른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라서 "애기가 입맛이 아저씨네 아이구 귀여워"하면서 덤을 주었다. 아빠는 영업하면서 룸쌀롱 안 가도 돼서 좋고, 아기 데려와서 좀 그래요, 하면서 불필요한 술을 마실 필요도 없고, 애기 앞에서 굽실대게 만들 사람도 없으니 다 좋고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아빠와 1년을 돌아다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세상이 정말 재미가 없어서 책만 읽었다. 애들이랑 놀기보다는 책을 주로 읽었는데 별명이 책벌레였다. 하루에 여섯 권 정도의 책을 가져가서 읽었고 읽은 책을 또 읽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나는 독서왕 상장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애들이 신기해했다. 네가 안 받았다고? 하면서. 독서카드를 거의 다 모았을 즈음에 나를 좋아하는데 표를 내지 못하는 어떤 남자아이가 내 카드를 다 찢어버렸다. 그 이후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도 독서카드를 모으지는 않았다. 나는 나를 좋아하는 것이 분명할 그 아이가 우스웠다. 소설 속에서 보면 어린 남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여자애 고무줄 끊거나 치마를 들추고 다니는데,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또래 남자애들은 우스웠다. 책에서 읽은 전형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냥 이성에게 관심이 없었다. 책이 유일한 관심사였으니까.
 
 
그런데 친구가 없었다. 나는 사회성도 부족했고 책만 읽어서 대화하는 법을 몰랐다. 친구를 사귀어야겠다, 고 생각한 시점부터 티비를 열심히 봤다. 그래서 애들이랑 연예인 얘기 하고 놀았다. 그러다보니까 나에게 재밌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책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뒤론 한동안 책을 잘 안 읽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아서 그다지 재미있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뭐 읽긴 읽었는데 하루에 여섯 권씩 읽고 그러지는 않았다.
 
 
요즘 쓰는 소설의 세계관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 기반한다는 것은 그냥 무의식중에 도서관에서 파이돈을 빌려 읽고 난 뒤였다. 요즘 자꾸 어릴 적의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굉장히 애쓰는 듯한 느낌으로 과거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게, 아마 소크라테스 할아버지가 기억하라고 기억하라고 나에게 주문을 건 것만 같다. 그러고 나니 나라는 인간이 굉장히 잘 이해됐다. 나는 소크라테스가 재밌으니 히랍사회를 재밌다고 생각한 모든 예술품이며 미술이며 책이며 가구며 영화들이 재밌을 수밖에 없던 거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재미없어하는 걸 이해를 못하는 거지. 소크라테스를 어렵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그걸 깨닫고 나니까 또 책이 막 말을 한다. 소설은 이렇게 이렇게 쓰라고 재잘재잘 말을 해준다.
 
 
그 이야기를 현정에게 했더니 현정이 언니, 이승원 교수님이 그런 말을 하시더라. 학부 때 굉장히 힘이 들었는데 다른 여자애가 읽다 보면 책이 말을 거는 때가 온다고, 했다고. 나는 그거 어릴 적에도 그랬어. 이랬더니 굉장히 부러워했다. 나는 그냥 책이 좋았고 책이 좋으며 책이 좋을 거기 때문에 글을 쓰는 거다. 다른 이유가 없다. 제일 좋아하는 게 책이니까. 근데 왜 좋아하는지는 요즘들어서야 알게 됐다. 그래서 요즘 너무 즐겁다.
출처 그냥 일기장에 적고 싶지는 않아서 오유에 올리는 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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