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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천이에게 주는 글,
게시물ID : soju_227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알수없다,
추천 : 1
조회수 : 258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3/05/25 22:44:55

 

 

 

 

 

 

 

 

 

  단단한 아력[我歷]

 

  한 움큼의 담배연기를 폐 속으로 밀어 넣어도 공허에 허연 연기만 찰 뿐, 공[空]이란 메워지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는 공을 메우기 위해 목숨을 낳는 일은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중세의 음악이 광막한 대지에 흐르고 손가락은 현대의 자판을 걷고 있다.

  나의 중생대는 아귀처럼 피를 핥았나니, 붉은 피들이 펄떡이던 언덕들이여, 너희는 이제 잠잠하구나. 박제된 나는 허리를 펴고 날개를 펴다 멈춰 있다. 멈춰 있으나 펄럭일 수 있을지도 모르는 날개. 박제된 날개는 과연 날 수 있을까. 잠시 실험을 하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네 날개는 어디에 있는가.

 

  슬퍼야만 슬프다 말할 수 있는가. 웃는 소리는 모두 웃는 소리인가. 새소리는 모두 울음인가. 아니, 모른다. 흑흑하며 웃는 사람도 있고, 으흐흐하며 우는 사람도 있다. 표상과 본질은 차이가 있다.

 

  귀에 쩌렁쩌렁 울리는 음표들의 주인은 이미 내가 아니다.

 

  몇 잔의 술로 나는 황폐하게 날리고 있다. 모래는 차라리 습하다. 습한 사막의 길 위에 나는 그림자도 없이 걷고 있다. 잠 없는 꿈속을 헤매는 날들. 내게 한 잎의 잠이 주어진다면 깊게 덮고 자리라. 다시는 깨지 않을 잠.

 

  폐허가 된 도시에 아무렇게나 진군한 적군의 탱크가 되어 아무 활자나 세우고 싶어 손가락은 멈추지를 못한다. 포박해야 하는 언어와 달아나는 언어들의 미로를 무참히 무너트리는 보편이여! 너는 어디서 태어났는가, 라고 묻자 자폭하는 언어.

 

  가슴이 일렁인다, 일렁이는 가슴의 파도는 어느 해안에서 처절하게 부서진다. 바위는 이름이 없다. 역사는 시간을 들지 못한다. 시간을 들춰봤자 장판 밑에 기어다니는 편충들만 있을 뿐이다. 철저하게 분화하는 아메바들의 세상. 분화해도 아메바는 단세포다. 단세포들의 분화는 단세포들의 세상을 만들 뿐, 단세포가 분화한다 해서 다세포가 된다는 환상은 환상에 불과하다.

 

  무엇도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무엇이 아니다. 내가 견디기 힘든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면서 아무 것'이나 되는 이런 현실일 게다. 욕이라도 한 마디 하고 싶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무엇도 없다. 아무 것도.

 

  책상을 뒤엎고 책장을 뒤엎고, 활자들을 뒤엎어도 다음 날 일어나면 굳건한 얼굴로 정리되어 있는 이 더럽고도, 그 더러운 세상을 욕하며 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내가 더러워 나는 오늘도 씻는다. 더럽기 위해 깨끗하게 씻는다.

 

  이 가증이여!

  이 더러움이여!

 

  이 죽이고 싶도록 순진한 얼굴을 한 시간의 살생자여!

 

 

  

 

 

 

 

 

 

 

 

 

 

 

  2010.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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